그것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염두에 두고 생각해낸 발상이었다. 우선모문룡이 섬으로 들어가면 육지에 있을 때보다는 조선이 후금으로부터받게 될 위협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금이 기마전에는 강하지만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해전에 취약한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모문룡을 후금군의 공격 사정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어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표하되, 조선 역시 후금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착상이었다. 모문룡은 1622년 11월, 광해군의 권유대로 철산 앞바다에 있는 가도라는 섬으로 들어갔다. 그를 섬으로 들어가게 하려 했던 광해군의 오랜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 P244
인조와 조선의 새정권이 명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 그의 한마디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모문룡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조선 조정에 수시로군량을 요구했다. 조선은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고, 어떤 해에는 1년 경비 가운데 3분의 1이 모문룡에게 지출되었다. - P245
모문룡은 결국 ‘임자‘를 만났던 것이다. 일찍이 광해군이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듯이 원숭환 역시 그의 사기성을 간파했다. 그를 ‘장차의화근‘으로 여겨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던 광해군의 외교적 감각은 분명대단한 것이었다. - P247
명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섬뜩한 시나리오였다. 누르하치가 조선수군을 이용하여 산동 등 내륙 지방을 공격하면 자신들의 조운로漕運路)가 위협받을 것이고, 그것은 가만히 앉아서 망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 P251
서광계의 협박 소식을 들은 직후 광해군은 부랴부랴 이정구(李廷龜)를 불러들였다. 이정구는 당시 조선에서 제일가는 문장가였다. 특히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짓는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다. 심지어중국인들까지 그의 문장 실력을 인정했다. - P252
그를 북경으로 보냈다. 이정구는 북경에서 예의 화려한 문장과 언변으로 조선 사정을 설명한 뒤 ‘서광계 문제를 해결했다. 광해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 P252
정조 대 편찬된 『충렬록』에 실려 있다. 광해군은 ‘심하전투‘ 이후 김응하를 추앙하는 사업을 벌임으로써 "조선이 후금에게 고의로항복했다"고 여기던 명의 의심을 잠재우려했다. 이런 목적에서 편찬한 것이 추모시집인 충렬록』이다. 따라서 광해군대 편찬된충렬록』은 정조 대 편찬된 『충렬록』과는 다른 책이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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