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의 참전이 남긴 부작용은 또 있었다. 왜란 시기 조선 국경은 명나라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개방되었다. 군인과 관리들, 상인들을비롯한 각계각층의 중국인들이 압록강을 건너 무시로 드나들었다. 그들과 조선 사람들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명나라는 조선의 내부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 P165
명군이 지나가는 길목에 점포를 설치해서 명군병사들이 쉽게 일용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은 마지못해 몇 곳에 점포를 설치했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오랫동안면포와쌀을 이용했던 상거래 관행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 P168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을 보면 왜란 당시 육식을 즐기던 명군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눈에 띈다. 명군이 들어가는 마을에서는 소나 돼지,닭같은 가축이 전부 없어진다. 명군은 닭을 가장 즐겨 먹어 피 한방울이라도 버리는 것이 없다. - P168
명 상인들이 조선으로 몰린 까닭은 또 있었다. 명군 지휘부가 그들을불러들였던 것이다. 왜란 초반 조선에서는 은이 무용지물이었다. 당시까지 조선 사람들은 은을 화폐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동전이나 지폐도 쓰지 않았다. 물건을 팔고 살 때는 오로지 쌀과 면포를 갖고값을 치렀다. - P167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사정은 달라졌다. 한반도는 명나라 군인들뿐만 아니라 상인들로 넘쳐났다. 상인들은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멀고 위험한 곳일지라도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전쟁터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명상인들이 다투어 조선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일차적으로 노린 것은 명군의 봉급이었다. 당시 명군은 봉급을 은으로 받았다. - P166
당시 일본은 세계 굴지의 은 생산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런데흥미로운 것은 그 배경에 두 명의 조선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인김감불(佛)과 노비 검동(同)이 그들이었다. 두 사람은 16세기 초반세계 최초로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란 것을 개발해냈다. 은광산에서채굴되는 은광석에는 은뿐만 아니라 다량의 납이 들어 있다. 따라서 은광석에서 은과 납을 분리하는 제련 기술 없이는 은생산이 늘어날 수 없다. 검동과 김감불이 바로 그 기술을 개발했던 것이다. - P171
뗏뽀도 없는 집단이 덧뽀를 가진 집단에게 겁 없이 덤비는 것‘. 그것이 바로 ‘무뎃뽀다. - P173
멕시코에서 개발된 막대한 양의 은이 태평양 연안의 항구 아카풀코(Acaupulco)에서 배에 실려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쏟아져 들어오는 은을 바탕으로 명나라 경제는 번영을 구가했다. 강남의 경제 중심지로 들어온은은 명나라 구석구석까지 유통되면서 화폐가 되었고, 그와 함께 상품화폐경제가 눈부시게 발달했다. 명나라가 세계 최초로 ‘은 본위제를 시행할 수 있었던 것도 무역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늘은 덕분이었다. - P173
16세기 후반 명은 해마다 몽골족과여진족을 막기 위한 국방비로 총 세출의 3분의2이상을 투입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사천 지방에서는 양응룡應)의 반란이 영하(夏)에서는 보바이(拜)의 난이 일어났다. 이 세가지 전란을 보통 만력삼대정(萬曆)이라 부른다. - P174
곧 이어 신종황제는 황태자의 혼례식을 치렀다. 혼례식에 쏟아부은 비용 역시 만력삼대정을 치르는 데 들어간 비용에 버금갔다. 아무리 무역을 통해 은이 넘쳐난다 해도그것은 분명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 P174
재정 위기를 맞아 신종황제가 내놓은 대책은 희한한 것이었다. 인색하기로 소문난 그는 자신의 개인금고, 곧 내탕(內) 속에 어마어마한 양의 은화를 챙겨두고 있었다. 그는 금고 속의 은화를 푸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은을 모았다. 그것은 궁정의 환관들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이었다. - P174
만력황제 주익균(朱翊)1573년 제위에 오른 그는 즉위 초반 장거정(張居正)의 개혁정치를 이끌어 명의 국력을 충실히 했다. 하지만 생전에 자신의 거대한 무덤인 정릉(定陵)을 미리 만드는가하면, ‘광세의 폐‘를 일으켜 명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는 왜란 당시 원군을 보냄으로써 조선 지식인들로부터는 조선 후기 내내은인으로 추앙받았다. - P175
중국사에서도 악명 높은 ‘광세지폐(稅之幣)‘가 시작되고 있었다. 세를 거두는 데 반드시 은광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상세를 거둘 때 반드시 상인이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민간의 모든 농토가 은광이요, 관리와 농민, 수공업자가 모두 상세를 내야할 사람들이다. - P175
그 서막은 1602년(선조 35) 3월, 명에서 황태자가 책봉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려 왔던 고천준(顧天)이란 자에 의해 열렸다. 그의 엄청난 수탈때문에 조선은 그가 황태자 책봉 사실을 알리러 온 것인지, 아니면 조선에서 은을 거두어 가려고 온 것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였다. 압록강을 건너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들르는 곳마다 은을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렸다. - P176
1609년(광해군 1) 광해군을 조선 국왕으로 승인하는 예식인 책봉례(封禮)를 주관하기 위해 왔던 태감 유용(用)과 이듬해 광해군의 맏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의식을 주관하기 위해 왔던 태감염둥(登)의 행태는 분명 광기 그 자체였다. - P177
조선 조정은 전전긍긍했다. 호조의 신료들은 호조가 1년 동안 모아놓은 은을 염둥 때문에 열흘 만에 전부 써버렸다고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했다
광해군 명사가 비록 무례하다고는하지만 황제의 명을 받아왔으니우리가 그를 대할 때는 마땅히 성의를 다해야 한다. 이잘 조치토록 하라.
이항복 성의와 정성이란 모두 빈말일뿐단지 은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을 잘 접대하는 대책이란 다만을더주는 데 있을 뿐입니다. - P180
광해군 당시 은화 수만 냥이면 1년 재정의 거의 3분의 1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 같은 액수의 은이 명사들이 행차할 때마다 흘러 나갔다. 속이 쓰리긴 하지만 명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 바쳤던 ‘백성들의 고혈‘이자 ‘눈물‘이었다. - P182
노아간도사 휘하의 여진 부족은 크게 해서, 건주야인 여진으로 나누어지는데 누르하치는 건주 출신이었다. 그가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대세력가로 성장하는 과정에는 당시 요동 지역의 명군 사령관인 이성량(李成梁)의 영향력이 컸다. 이성량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참전했던 명군 제독 이여송의 아버지로서 본래 조선족이었다. 일찍부터 무공을 세워 요동지역에서 군벌로서 확실한 기반을 잡았던 그는 휘하의 여진족들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으로 통제하는 데도 수완을 발휘했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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