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64. 1973년이 아니라 1873년 오타인 것 같다.














1973년빈세계박람회 때는 아랍에서 온 어떤 왕세자가 면담 일정을 잡아주지 않는다고 난동을 부린 일까지 있었다. - P64

교양이 없다고 며느리를 비난하면서 두 딸과 루돌프 황태자를 빼앗아 갔다. 남편은 당대 빈의 인기 여배우를 애인으로 두었다. 황실의숨 막히는 분위기와 따분한 의전에 넌더리가 난 시씨는 남편과 여배우의 연인관계를 용인해주고 빈을 떠났다.  - P65

나중에는 호프부르크보다 부다페스트 교외의 여름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헝가리 말을 익혔고 헝가리 옷을 입었으며 헝가리 시녀의 보살핌을 받고 헝가리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었다.
시씨의 유별난 ‘헝가리 사랑‘은 언드라시 (Andrássy Gyula) 백작과 관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 P65

쇤브룬을 떠나오면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를생각했다. 페미니즘이 문명의 큰 흐름으로 떠오른 오늘날에도 합스부르크제국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였던 이 사람이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했다.  - P69

어릴 때부터 유난히 어리석고 고집이 섰던 막내딸 마리아가 대표적이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된 마리아는 사치와 방중을 경계하라는 어머니의 거듭된 경고를 끝내 무시했다가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았다. - P73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로지 타고난 성격과 재능 덕분에 유능한 군주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 형제가 없었기에 어려서부터군주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고 권력 행사와 관련한 직접 간접 경험을쌓았다.  - P73

그곳의 슈퍼스타는 클림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키스였다. 나도 이 그림이 아니었다면 굳이 벨베데레에 가지 않았을지모른다. 클림트 작품 말고도 볼만한 그림이 숱하게 많은데, 에곤 실레의 작품들 역시 클림트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 P75

벨베데레는 ‘전망 좋은 테라스‘를 가리키는건축 용어인데, 상부와 하부로 이루어진 이 궁전은 이탈리아 출신 사보이 왕자 오이겐(Eugen von Savoyen)‘이 18세기 초반에 지었다. 사보이왕가는 1권 로마 편에서 소개했던 통일 이탈리아왕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가문이다. 오이겐 왕자는 넓은 부지를 구입해 공원을조성한 다음 하부와 상부 두 저택을 차례로 지었는데, 그 저택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구입해 벨베데레라는 이름을 붙이고 왕실의 예술품을 보관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 P74

빈대학교는 14세기에 태동해 19세기 후반에는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하는 유럽 최고 수준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본관은 링에 있지만 캠퍼스는 시내 전역에 흩어져 있으며,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어, 철학자 카를 포퍼,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를 비롯해 대단한 학자들을 배출했다.  - P82

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글로벌전쟁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거대 제국들을 무너뜨렸다.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제국의 폐허 위에 각각 오스트리아공화국과 터키공화국이라는 조그만 신생국이 탄생했고 러시아제국에서는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 최초의 사회주의체제가 들어섰으며 동유럽과 발칸반도, 중동 등에는 수많은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다.  - P85

가우디는 돈 많은 부동산업자의 의뢰를 받고 호화 연립주택을 지었고 훈데르트바서는 공영 임대주택을 설계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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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2022-07-01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생각의길 출판사 담당자입니다. 편집부 불찰로 오타를 바로 잡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적에 감사드리고 재쇄에 바로바로 수정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