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은, 사랑하는 이와 사별하는 상황에서조차 침착함과 고요함을 지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예수께서는 마리아와그 일행이 우는 모습을 보시고는 비통한 마음으로 괴로워하시며 함께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입니다(히 4:15). - P161

여기서 ‘체휼하다‘는 표현은 개역한글판 번역인데,
영어성경 신국제역NIv에는 ‘empathize (공감하다)‘로 되어있습니다. 체휼의 ‘‘은 ‘심장이 피를 흘린다‘는 뜻이니, 체휼한다는 것은 몸으로 같이 겪고 마음으로 피를 흘릴정도로 공감한다는 의미일 터입니다. 그러니 죄에 얽매여종노릇하는 인류의 고통을 체휼함으로써 십자가에서 피흘려 ‘죄의 삯‘인 죽음을 우리 대신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호모 엠파티쿠스의 온전한 표상 아닐는지요. - P161

김영봉 목사에 따르면, ‘바리새Pharisee‘는 세상과 이방인 등 불결한 것으로부터 결별하여 분리된 삶을 산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분리된 자‘, ‘분리주의자‘ 등을 의미한다는군요. - P167

이에 대해 김영봉 목사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중요한 두 갈래 중 ‘제사법‘은 철저히지키면서 ‘시민법은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율법은 본래 두 가지, 곧 예배와 십일조 등 종교적 의무에 관한 ‘제사법‘과, 일상생활에서 정의와 자비, 신의를 지키는 삶에 관한 ‘시민법‘으로 구분되는데, 예수님은 시민법을 더 중요시하셨다는 겁니다.  - P168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지켜 행하며 살아가는 ‘시민법‘ (리처드 마우식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적 시민교양")을소홀히 하거나 무시한 결과, "회칠한 무덤" 같은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다시 말해 "경건의 모양이 "경건의 능력" 보다 앞서는 삶 말이지요.
결국 바리새적 경건이란 자신들의 ‘율법제사법적 의‘
의 완성에 기울어진 자기만족적 경건 아닌가 합니다. 예수께서 "바리새 사람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건 그런 의미 아니었을까요.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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