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테파니의 비밀노트 ㅣ 고려대학교출판부 인문사회과학총서
필립 라브로 지음, 조재룡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0년 4월
평점 :
열세살 소녀가 직접 써서 출판사에 넘겼다는 이 책이,
사실은 열 세살도, 여자도 아닌 40대 중년 아저씨가 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프랑스에서는 스테디셀러였던 이 책에 흠뻑 빠져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 주었는가 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다 알면서 봤음에도 글 속의 스테파니에게 쉽게 몰입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호밀밭 파수꾼>에서 홀든이 보여주었던 그 괴팍하고 반항스러운 모습들을 자꾸 떠올리게 하며
여자 홀든처럼 보였던 스테파니에게 정도 들게 되었으니
나는 뭐, 누가 썼든지간에 소설에 집중하며 볼 수 있었으니 별로 상관 없는 듯.
하지만 옮긴이 글에서 보이는 프랑스 현지에서의 반응들 중에서
책에서의 그 스테파니가 지금쯤 멋지고 우아한 여성이 되어있을 것이라고 상상했을 사람들을 보면,
정말 사기꾼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네.
어리고 순수하고 명랑한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먼,
조금은 엉뚱하고 망상에 쉽게 사로잡히고 또 살짝 반항스럽기도 해서 당황스러웠지만
역시 정의롭고 솔직한 모습이 열세살답기도 해서 조금은 엄마미소 지으면서 볼 수 있었던 스테파니의 모습들.
홀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실 주인공이 지내는데에 있어서 홀든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 혹은
정상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했던 것에 비하면, 스테파니의 경우는 조금은 열악하지 않았나 싶다.
항상 각자 다른 이유로 집을 비우고 늦게 들어오기 일쑤에다가, 어린 딸아이에게는 관심도 없어서
스스로 관심을 끌기위한 리스트를 마련해두고 반복하는 스테파니에게 있어서의 부모님들이 그러했고
또 그 중에서도 엄마는 특히 엄마로써 어린 딸에게(사실은 나이가 많은 딸이더라도)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을 아예 드러내보여주고 말았다.
그 날, 처음으로 가출(이라고 하긴 민망하지만)을 했다가 돌아왔던 그 날 아침,
스테파니를 보자마자 뺨을 두대 때리던 엄마는 그러고나서 아빠에게 스테파니를 밀치고
아빠는 그런 스테파니의 뺨을 또 세번 더 때린다.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니가 없어서 그들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나 아빠는 없어진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길길이 날뛰고 흥분했었는가를 이야기하며
그를 신경쓰느라 힘들었다는 얘기를 반복한다. 스테파니는 그런 상황을 보고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그리고 정작 그들이 없어진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과 관심에는 통 신경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캐취하면서
얼마나 많은 실망과 좌절감과 집안에 있어서의 자기 위치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을까.
하지만 그런 스테파니에게도 좋은 사람 혹은 좋은 것들이 있었다. 스테파니에겐,
내 개인적으로는 결국엔 남자친구가 될것이라고 생각했던 파콜로가 아닌, 그의 동생 '다른애'가 있었고
또 지독한 현실에서 아예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그녀를 미치도록 흥분시키게 한, 베토벤의 '음악'이 있었고
또 그런 음악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 그녀에게 있어서는 위선적이지 않은. 다른 어른같지 않은
유일한 어른이었던 니콜 선생님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대화를 유일하게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무엇이든 똑같이 따라하던 애완고양이 '가펑클'.
이러한 것들이 있었기에 결국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노트를 접으며 조금은 달라질 것 같은 자신에 대한 기대 속에 이야기를 끝맺게 된다.
물론 달라지겠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생리를 시작하게 되서 달라진다기 보다는
'진짜'비밀을 털어놓아 준 다른애로 인해, 죽었다기보다는 흉칙하게 제거된 가펑클로 인해,
자신을 향해 두 팔 벌려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 준 엄마로 인해,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를 위해 지금의 위기를 이겨내고 참아보기로 한 부모님들로 인해,
새롭게 친구가 된 작고 귀여운 고양이 시몽으로 인해,
스테파니는 한층 더 성숙되고, 그녀가 말하는 '진짜' 여성이 되고, 지금보다 더 멋진 아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