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 서양과 조선의 만남
박천홍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부터 가졌던 생각이다.

19세기 초중엽에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조선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제외하면 서구 열강들이 조선을 직접 공격하지도 않았는데, 이는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비교해도(영국이 일본을 무력으로 공격하기도 했으니까) 거의 공격이 없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외부 세력의 위협이 동아시아 3국 중에서 가장 약한 나라였다는 뜻이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서양에 대해 자체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힘을 키울 여지가 가장 많은 나라는 사실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었다는 결론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그렇지만 일본과 달리 조선은 좋은 기회를 깡그리 날려버렸다.
이는 고루한 성리학적 사고에 묻혀있던 관료 및 사대부들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
상대적으로 실용적인 사고를 가졌던 일본의 관료들은, 조선보다 더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정말 안타까운 부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1. 교환형식의 구분에 대하여

 

'가라타니 고진'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히는 <트랜스크리틱> 이후로 발표한 일종의 개론서인 이 책에서, 그는 크게 4가지로 구분되는 교환 양식을 제시한다.

그 교환양식은 아래와 같다.

A - 호수(증여와 답례), B - 재분배(탈취와 재분배),
C - 상품교환(화폐와 상품), D - 교환 X(이상적 교환)

이 네 가지 교환 양식은 각각의 자본제 사회구성체와 어울리게 된다.

A - 호수(증여와 답례) - 네이션
B - 재분배(탈취와 재분배) - 국가
C - 상품교환(화폐와 상품) - 자본
D - 교환 X(이상적 교환) - 어소시에이션

가라타니 고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태는 D양식, 즉 '어소시에이션'이지만 그것의 실현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그 양식이 일어날 단초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으로서 1870년 파리 꼬뮌이나 1960년대 신좌파에서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이 100쪽까지 이 책을 읽었을 때 보이는 것이며,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보편 종교와 사회주의 간의 유사성'이다.

"사회주의는 보편종교로서 개시된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편종교가 개시한 것은 국가나 공동체에는 없는 '윤리'인데 그것은 바로 새로운 교환양식(어소시에이션)을 말합니다."(100쪽)

 

2. 왜 노예가 아니라 노동자인가?

가라타니 고진의 이 책에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인 관계가 '노-자 관계'로 정립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그것을 역시 교환양식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물론 그것은 나의 해석이긴 하지만).

"영국에서 산업자본주의가 최초로 발전한 것은 생산수단을 갖지 않아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지만, 그것은 단순히 (...) 중요한 것은 이 프롤레타리아가 노동력을 팔고 얻는 임금으로 생산물을 사는 소비자라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소비=노동력의 재생산은 자본의 증식과정의 일환으로서 있는 것입니다."(145쪽)

결국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과 그의 소비가 교환하는 양식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자 관계'가 지배적인 것이 된다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견해가 아닌가 한다.

한편, 노동자가 곧 잉여가치를 실현하게 만드는 소비자이기 때문에 자본가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갖춘다는 견해가 나타난다.

"노동자는 개개의 생산과정에서는 예속된다고 할지라도 소비자로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본은 소비자로서의 노동자에 대해 '예속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의 열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151쪽)

아마 여기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하는 '소비자 운동'이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한다.

 

3. 자본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소비자로서의 대항'을 내세운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혁명은 이미 유효성을 상실했다.

"그것들은 자본주의를 그 선진적,중핵적인 장에서 공격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 그것들은 결국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자본제의 발달과 더불어 자본과 경영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 경영자와 노동자는 더 이상 신분적 계급이 아니라 계급적인 위계제가 됩니다. (...) 개별기업에서 경영자와 노동자의 이해는 일치합니다. 때문에 생산지점(...)에서 노동자는 경영자와 같은 의식을 가지며 특수한 이해의식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 그에 반해 예를 들어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소비자,주민 쪽이 민감하며, 곧바로 세계시민적인 관점에 섭니다."(160~161쪽)

--> 이미 계급적인 위계는 그 명확성이 희미해졌으며, 산업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기존의 혁명론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상당히 큰 논란이 따를 것이다.

"노동자는 유통과정에서 소비자로서 나타납니다. 그때 그들은 자본에 대해 우월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 산업자본이 노동자가 만든 것을 스스로 소비자로서 다시 서는 시스템으로서 확립하게 되면, 바꿔 말해 소비사회가 되면 옛 계급투쟁이 무효가 되어가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 소비자란 프롤레타리아가 유통의 장에서 나타났을 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비자 운동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고, 또 그와 같은 것으로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 유통과정에서 자본은 프롤레타리아를 강제할 수 없습니다. (...) 구입하는 것을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유통과정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말하자면 보이콧입니다."(161~162쪽)

 -->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는 곧 소비자라는 상식적인 논의에서 출발하여, 자본가 측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소비자로서의 행동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투쟁이 될 수 있을 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주의할 점은, 기존의 소비자 운동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소비자 운동은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로 인식한 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이다.
이에 따른다면, 이랜드에 대한 민주노총과 시민단체 등의 불매운동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새로운 호혜의 공동체, 네이션(민족)

가라타니 고진은 네이션(민족)이 기존의 원초적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으나 잃어버린 교환양식(호수적 교환)이 회복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네이션은 시민혁명에 의해 절대적 주권자가 타도되고 개개인이 '자유와 평등'을 획득할 때에 성립합니다. (...) 프랑스 혁명에서는 자유,평등,우애라는 슬로건이 주창되었습니다. 그 경우 '우애'는 개개인 간의 공동성을 의미합니다. 네이션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애'라는 말로 제시되는 감정입니다. (...) 감정이라는 형태로밖에 의식되지 않는 '교환'을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167~168쪽)

"농업공동체 경제에서는 단지 살아가는 자들의 호수뿐만 아니라 죽은 자(선조)와 이제부터 살아갈 자(자손) 사이에도 상호적인 교환이 상정되어 있었습니다. (...) 농촌공동체의 쇠퇴와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선조와 자손 사이에 둠으로 얻을 수 있는 영속성이라는 관념도 절멸합니다. (...) 그것을 상상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네이션인 것입니다. (...) 그것은 네이션이 상품경제와는 다른 타입의 교환, 즉 호수적 교환에 기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171쪽)

--> 이에 따른다면 마르크스주의가 현실 사회에서 실패한 것은 당연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네이션(민족)과 같이 영속적이고 통시적인 감정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계급은 공시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통시적인 감정의 공동체를 만들지는 못한다.

 

5. 네이션은 인간의 어떠한 측면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가라타니 고진은 '네이션(민족)'의 개념이 감성과 결합되면서 달라졌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역시 일종의 교환(계약)에 의해 성립하는 것입니다. (...) 홉스는 계약이란 권리의 상호양도라고 말하지만, 그가 근저에서 발견하는 계약은 폭력에 의해 강제된 계약인 것입니다."(125쪽)

"홉스는 주권자에 대한 복종이 그것에 의해 안녕을 획득하는 교환이라는 것을 간파했습니다."(128쪽)

--> 근대 서양사상사에서 영국의 홉스가 주장한 사회계약론은, 국가의 안정보장과 시민의 권리양도라는 교환에 의해 국가라는 게 성립되었다고 하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설명이다. 아마 '네이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네이션'의 개념은 바뀐다고 한다.

"헤르더는 근대의 주관철학에 대항해 풍토, 언어, 그리고 언어공동체로서의 민족이라는 감정적 존재에서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 국가는 홉스나 로크와 같은 사회계약론에서 보이는 국가와는 다른, 말하자면 '감정'에 입각한 것 즉 네이션이 되는 것입니다."(180~181쪽)

--> 원래는 상상물에 지나지 않는 네이션이, 감정적인 것과 결합하면서 실체성을 갖게 된다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서 상상적인 것(네이션)은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6. '다중'은 왜 아닌가?

가라타니 고진은 네그리에 대해 비판적이다(참 반갑다~).
하긴 네그리의 주장이 가지는 허술함은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네그리와 하트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계시장'입니다. 여기서 국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역사적으로 1848년 혁명은 민족이나 국가의 무화이기는커녕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국가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불러왔던 것입니다."(215쪽)

-->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서 이제 국가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가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전혀 실증되지 않은 주장에 불과하다는 내 생각과 비슷하다. 특히 가라타니 고진은 국가와 자본은 태생이 다르다는 점에서(왜냐하면 국가와 자본주의는 교환 체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상부구조로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을 극대화시킨 이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밝히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스피노자에게서 다중이라는 개념을 끌어왔지만, 이것은 억지스러운 다시읽기입니다. 왜냐하면 다중은 원래 홉스가 사용한 말이고, 그것은 자연상태에 있는 다수의 개인을 의미합니다. 개개인이 각자의 자연권을 국가에게 양도하고 다중의 상태를 벗어남으로써 시민 또는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스피노자도 같은 의견입니다."(217~218쪽)

--> 네그리와 하트는 자신들의 '다중'론을 스피노자에게서 끌어왔지만, 실제로 스피노자는 다중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7. 세계 변혁은 어떻게 이룰 것인가?

국가의 자립성 테제는 현재 변혁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주제이다. 마치 네그리가 그런 것처럼 국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자립성을 배제한 생각이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의 강해짐을 생각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국가를 생각해야 한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제시하는 것처럼, '아래로부터의 변혁'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의 압력', 즉 각 국가의 권력 양도를 통한 세계공화국 수립이야말로 진정한 변혁으로 가는 길이라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결론이다. 왜냐하면, 네그리 등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국가는 단순히 내부 국민들만 상대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다른 국가와도 상대하는 '자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의 운동만으로 국가를 바꾸려는 시도는, 자칫하면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국가의 강해짐을 이끌 수도 있다(대혁명 직후의 프랑스,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가 그런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냉전이란 무엇인가 - 극단의 시대 1945~1991
베른트 슈퇴버 지음, 최승완 옮김 / 역사비평사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독일의 역사학자 '베른트 슈퇴브'가 2003년에 쓴 책이 번역되었다.
읽어보니 좌파와 우파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상당히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세계사 교과서에서 배울 때 냉전의 책임은 소련을 포함한 공산주의 세력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대학교 들어가서는 오히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력이 책임이 있다는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한국전쟁 및 분단과 관련된 것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사실 책임은 공동분담이 된다.
특히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지나칠 정도로 우파의 잘못만 보았던 시각(고등학교 때와는 거꾸로다)을 교정할 기회이기도 하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양국의 스파이 전쟁에 대한 것이다.
1948년 11월에 영국 외무부가 제안하여 영국과 미국이 알바니아의 정부 전복을 꾀했는데, 결국 이것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미국이 소련, 동독 등 동유럽에 보낸 '라디오 해방' 등의 방송 및 역시 동독 내에서 반공주의 세력의 부활(여기에는 '독일 청소년연맹'과 같은 극우단체 부활도 포함)을 꾀했던 이야기.
서독 내 테러리스트들이 사실은 소련의 지휘를 받았다는 것도 재미있다. 특히 동독 국가안전부 스파이 '기욤'이 1970년대 초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개인 보좌관이자 정부 실세로 활동했던 이야기.

한편 서독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반공적이라는 것도 확인된다.
'서독연방 헌법수호청'에서의 공직 지원자들에 대한 신상 조회 및 1970년대의 취업 금지 조치 모두 좌파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1978년에 '제3차 러셀 국제법정'이 열려 서독 정부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이런 현실은 1979년에 사민당이 이끄는 주에서 겨우 시정될 수 있었다나?
1956년에 '서독 공산당'이 위헌정당이라 하여 해산된 사건은 꽤 유명한 것이다. 물론 이 정당은 동독의 비밀 훈련을 받았고, 실제로 동독 정부의 간첩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해산이라고 해야겠다.
또한 서독에서 1950년대 이래 동독과의 화해 정책을 추진했던 주요 인사들은 정치적 억압을 당했다고 한다. '헌법수호청'의 초대 청장인 '욘'과 니더작센 주 초대 내무장관 '게레테'가 그렇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이후에 동독으로 망명해서 '대 서독 공작'에 참여....

그러고보면 냉전은 정말 음모로 점철된 시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국기계 비판 아우또노미아총서 6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0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정환이 2005년 1월에 쓴 <제국기계 비판>.
2003년에 <아우또노미아>를 쓴 이후, 세계 정세와 자율주의 이론
및 한국 상황 등에 대해 그 동안 쓴 글들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조정환은 원래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사람이지만,
1980년대 말에 <노동해방문학> 사건으로 수배당하면서 '이원영'이라는 가명으로 숨어다닌 경력에서 보여지듯 문학평론보다는 사회분석이나 맑스주의 이론 등에 더 강점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카이로스의 문학>보다 <제국기계 비판>이 더 괜찮은 책인 건 아마 그 때문일 게다.

사실 이 책이 아주 새로운 내용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안토니오 네그리'나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등의 이론을 잘 정리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법 잘 정리했다는 생각은 든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약간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다중'의 투쟁 때문에 그 투쟁을 피해 자본이 금융 자본으로 집중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가 등장했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 도입(물론 이것도 노동자들의 투쟁 때문이라고 설명하긴 하지만)으로 인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일어나고 다중의 삶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설명한다.
결국 모든 것의 원인은 '다중의 투쟁'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자본이 더 이상 자신이 착취할 '외부'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 다중의 투쟁이 잘 이루어진다면 '지구 제국(초국적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질서를 의미)'이 그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한다.

글쎄, 이러한 주장은 좌파들에게 희망을 주기는 한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시각은 너무 맑스주의적 입장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자본의 변환에 의해 국가가 바뀌는 식이라고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네그리의 견해를 그대로 따라한 것인데, 네그리는 지나치게 경제 환원론적 시각으로 정치 현상까지 바라본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조정환이 희망을 걸고 싶어한다는 건 알겠으나(물론 마냥 희망만 말하는 건 아니다. 결국 그 역시 각성된 주체성을 말하는 듯하다), 이런 점들이 걸리면서 신뢰에 다소 무리가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한성례 옮김 / 부엔리브로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선 이 책의 성격을 본다면, <로마인 이야기> 중에서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를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그것을 ‘실용적 성향’ 또는 ‘현실 적합성’이 가지는 중요함에 대한 강조라고 말하고 싶다.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이 교수들을 곤란하게 만든 질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고대 로마는 고대 그리스를 본뜬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국가가 어떻게 1000년이나 계속되었을까요? 게다가 대제국으로 번영했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6쪽)

  저자가 보기에 그리스는 비록 서양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오랜 번영을 이룬 국가는 아니기에, 로마에 비해 성공한 문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는 것 같다.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를 이룬 아테네의 번영도 ‘고작 2세기 동안에 이뤄진 결과’(109쪽)라고 한다. 반면에 기원전 2세기 말부터 서기 2세기 말까지 광대한 영토를 비교적 평온하게 다스린 로마는 매우 경우로운 문명으로 비쳤을 것이다.

  로마인들이 실용적인 민족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끊임없이 겪은 시행착오에서 배운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로마인들이 켈트인의 침입, 포에니 전쟁 등과 같은 외부의 위협은 또는 내부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상황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을 찾도록 만들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라틴 동맹, 호민관 제도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절대 빠른 변화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그리스와의 가장 큰 차이라고도 한다. 로마인들은 차근차근, 자신들의 전통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변화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시도 및 실패’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군 이야기>의 작가인 이태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로마는 군국주의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그러한 주장은 다소 성급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수십 년 후에 카이사르에 의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서기 2세기까지 로마인들은 시행 착오를 겪는 가운데에서도 차근차근 필요한 개혁을 해 나갔음을 보게 되는 대목이다.

  여기서 나는 현재 한국의 정치 현실을 보게 된다. 한국에서 개혁 세력을 자임한 사람들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개혁을 시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무엇보다도 개혁 의제를 한꺼번에 내놓지 말고 가장 필요한 것부터 시도했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가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이 들게 된다. 가령 처음부터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실생활과 관련있는 경제 문제부터 개혁했다면 결국 정치 개혁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이러한 개혁의 실행에는 현실 사회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개혁 세력은 집권 이후에 현실 사회 문제에 대한 진단마저 정확하게 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들 개혁 세력이 무리하게 또는 안이하게 생각하여, 정치적인 담론 또는 큰 담론과 관련된 개혁을 내세우다가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결국 로마인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지금 우리와도 큰 관련을 맺는 것이라고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