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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공화국으로 ㅣ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1. 교환형식의 구분에 대하여
'가라타니 고진'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히는 <트랜스크리틱> 이후로 발표한 일종의 개론서인 이 책에서, 그는 크게 4가지로 구분되는 교환 양식을 제시한다.
그 교환양식은 아래와 같다.
A - 호수(증여와 답례), B - 재분배(탈취와 재분배),
C - 상품교환(화폐와 상품), D - 교환 X(이상적 교환)
이 네 가지 교환 양식은 각각의 자본제 사회구성체와 어울리게 된다.
A - 호수(증여와 답례) - 네이션
B - 재분배(탈취와 재분배) - 국가
C - 상품교환(화폐와 상품) - 자본
D - 교환 X(이상적 교환) - 어소시에이션
가라타니 고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태는 D양식, 즉 '어소시에이션'이지만 그것의 실현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그 양식이 일어날 단초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으로서 1870년 파리 꼬뮌이나 1960년대 신좌파에서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이 100쪽까지 이 책을 읽었을 때 보이는 것이며,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보편 종교와 사회주의 간의 유사성'이다.
"사회주의는 보편종교로서 개시된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편종교가 개시한 것은 국가나 공동체에는 없는 '윤리'인데 그것은 바로 새로운 교환양식(어소시에이션)을 말합니다."(100쪽)
2. 왜 노예가 아니라 노동자인가?
가라타니 고진의 이 책에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인 관계가 '노-자 관계'로 정립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그것을 역시 교환양식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물론 그것은 나의 해석이긴 하지만).
"영국에서 산업자본주의가 최초로 발전한 것은 생산수단을 갖지 않아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지만, 그것은 단순히 (...) 중요한 것은 이 프롤레타리아가 노동력을 팔고 얻는 임금으로 생산물을 사는 소비자라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소비=노동력의 재생산은 자본의 증식과정의 일환으로서 있는 것입니다."(145쪽)
결국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과 그의 소비가 교환하는 양식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자 관계'가 지배적인 것이 된다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견해가 아닌가 한다.
한편, 노동자가 곧 잉여가치를 실현하게 만드는 소비자이기 때문에 자본가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갖춘다는 견해가 나타난다.
"노동자는 개개의 생산과정에서는 예속된다고 할지라도 소비자로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본은 소비자로서의 노동자에 대해 '예속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의 열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151쪽)
아마 여기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하는 '소비자 운동'이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한다.
3. 자본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소비자로서의 대항'을 내세운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혁명은 이미 유효성을 상실했다.
"그것들은 자본주의를 그 선진적,중핵적인 장에서 공격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 그것들은 결국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자본제의 발달과 더불어 자본과 경영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 경영자와 노동자는 더 이상 신분적 계급이 아니라 계급적인 위계제가 됩니다. (...) 개별기업에서 경영자와 노동자의 이해는 일치합니다. 때문에 생산지점(...)에서 노동자는 경영자와 같은 의식을 가지며 특수한 이해의식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 그에 반해 예를 들어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소비자,주민 쪽이 민감하며, 곧바로 세계시민적인 관점에 섭니다."(160~161쪽)
--> 이미 계급적인 위계는 그 명확성이 희미해졌으며, 산업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기존의 혁명론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상당히 큰 논란이 따를 것이다.
"노동자는 유통과정에서 소비자로서 나타납니다. 그때 그들은 자본에 대해 우월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 산업자본이 노동자가 만든 것을 스스로 소비자로서 다시 서는 시스템으로서 확립하게 되면, 바꿔 말해 소비사회가 되면 옛 계급투쟁이 무효가 되어가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 소비자란 프롤레타리아가 유통의 장에서 나타났을 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비자 운동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고, 또 그와 같은 것으로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 유통과정에서 자본은 프롤레타리아를 강제할 수 없습니다. (...) 구입하는 것을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유통과정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말하자면 보이콧입니다."(161~162쪽)
-->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는 곧 소비자라는 상식적인 논의에서 출발하여, 자본가 측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소비자로서의 행동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투쟁이 될 수 있을 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주의할 점은, 기존의 소비자 운동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소비자 운동은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로 인식한 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이다.
이에 따른다면, 이랜드에 대한 민주노총과 시민단체 등의 불매운동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새로운 호혜의 공동체, 네이션(민족)
가라타니 고진은 네이션(민족)이 기존의 원초적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으나 잃어버린 교환양식(호수적 교환)이 회복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네이션은 시민혁명에 의해 절대적 주권자가 타도되고 개개인이 '자유와 평등'을 획득할 때에 성립합니다. (...) 프랑스 혁명에서는 자유,평등,우애라는 슬로건이 주창되었습니다. 그 경우 '우애'는 개개인 간의 공동성을 의미합니다. 네이션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애'라는 말로 제시되는 감정입니다. (...) 감정이라는 형태로밖에 의식되지 않는 '교환'을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167~168쪽)
"농업공동체 경제에서는 단지 살아가는 자들의 호수뿐만 아니라 죽은 자(선조)와 이제부터 살아갈 자(자손) 사이에도 상호적인 교환이 상정되어 있었습니다. (...) 농촌공동체의 쇠퇴와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선조와 자손 사이에 둠으로 얻을 수 있는 영속성이라는 관념도 절멸합니다. (...) 그것을 상상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네이션인 것입니다. (...) 그것은 네이션이 상품경제와는 다른 타입의 교환, 즉 호수적 교환에 기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171쪽)
--> 이에 따른다면 마르크스주의가 현실 사회에서 실패한 것은 당연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네이션(민족)과 같이 영속적이고 통시적인 감정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계급은 공시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통시적인 감정의 공동체를 만들지는 못한다.
5. 네이션은 인간의 어떠한 측면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가라타니 고진은 '네이션(민족)'의 개념이 감성과 결합되면서 달라졌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역시 일종의 교환(계약)에 의해 성립하는 것입니다. (...) 홉스는 계약이란 권리의 상호양도라고 말하지만, 그가 근저에서 발견하는 계약은 폭력에 의해 강제된 계약인 것입니다."(125쪽)
"홉스는 주권자에 대한 복종이 그것에 의해 안녕을 획득하는 교환이라는 것을 간파했습니다."(128쪽)
--> 근대 서양사상사에서 영국의 홉스가 주장한 사회계약론은, 국가의 안정보장과 시민의 권리양도라는 교환에 의해 국가라는 게 성립되었다고 하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설명이다. 아마 '네이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네이션'의 개념은 바뀐다고 한다.
"헤르더는 근대의 주관철학에 대항해 풍토, 언어, 그리고 언어공동체로서의 민족이라는 감정적 존재에서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 국가는 홉스나 로크와 같은 사회계약론에서 보이는 국가와는 다른, 말하자면 '감정'에 입각한 것 즉 네이션이 되는 것입니다."(180~181쪽)
--> 원래는 상상물에 지나지 않는 네이션이, 감정적인 것과 결합하면서 실체성을 갖게 된다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서 상상적인 것(네이션)은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6. '다중'은 왜 아닌가?
가라타니 고진은 네그리에 대해 비판적이다(참 반갑다~).
하긴 네그리의 주장이 가지는 허술함은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네그리와 하트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계시장'입니다. 여기서 국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역사적으로 1848년 혁명은 민족이나 국가의 무화이기는커녕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국가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불러왔던 것입니다."(215쪽)
-->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서 이제 국가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가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전혀 실증되지 않은 주장에 불과하다는 내 생각과 비슷하다. 특히 가라타니 고진은 국가와 자본은 태생이 다르다는 점에서(왜냐하면 국가와 자본주의는 교환 체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상부구조로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을 극대화시킨 이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밝히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스피노자에게서 다중이라는 개념을 끌어왔지만, 이것은 억지스러운 다시읽기입니다. 왜냐하면 다중은 원래 홉스가 사용한 말이고, 그것은 자연상태에 있는 다수의 개인을 의미합니다. 개개인이 각자의 자연권을 국가에게 양도하고 다중의 상태를 벗어남으로써 시민 또는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스피노자도 같은 의견입니다."(217~218쪽)
--> 네그리와 하트는 자신들의 '다중'론을 스피노자에게서 끌어왔지만, 실제로 스피노자는 다중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7. 세계 변혁은 어떻게 이룰 것인가?
국가의 자립성 테제는 현재 변혁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주제이다. 마치 네그리가 그런 것처럼 국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자립성을 배제한 생각이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의 강해짐을 생각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국가를 생각해야 한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제시하는 것처럼, '아래로부터의 변혁'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의 압력', 즉 각 국가의 권력 양도를 통한 세계공화국 수립이야말로 진정한 변혁으로 가는 길이라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결론이다. 왜냐하면, 네그리 등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국가는 단순히 내부 국민들만 상대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다른 국가와도 상대하는 '자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의 운동만으로 국가를 바꾸려는 시도는, 자칫하면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국가의 강해짐을 이끌 수도 있다(대혁명 직후의 프랑스,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가 그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