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품격 - 박종인의 땅의 역사
박종인 글.사진 / 상상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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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면 시설 좋은 리조트에 틀어박혀 먹고 자고 쉬는 걸 최고로 아는 여행 문외한이다.
여행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읽었다.
25년차 여행기자 박종인은 단순히 여행지의 볼거리나 먹을거리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해당 여행지의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왜곡된 역사를 소개하고 바로잡으며, 그 땅을 살았던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 그 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서른 다섯 군데의 국내 여행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지역은 서울의 북촌 한옥 마을이었다.

서울 종로구가 펴낸 유인물에는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였던 곳으로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에서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고 돼있다. 서울시 자료 '북촌 산책'에는 '조선 시대 양반들이 터를 잡으면서 시작된 이곳은 당시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길과 물길들의 흔적, 그리고 한옥들을 만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사람들은 북촌 초입 관광 안내소에서 나눠주는 이 두 자료와 지도를 따라 골목길을 걷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살던 집들"이라고. 거짓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짓말이다. 21세기 눈앞에 보이는 북촌은 조선 시대와 관계가 없는 1930년대 개량 한옥 마을이다. 그 한옥 마을 전부를 한 사람이 만들었다. 이름은 정세권이다.(188~189쪽)

당시 가회동 일대는 친일파들이 일제로부터 하사받은 땅으로, 경성에 인구가 폭발하면서 친일파들은 그 땅을 주택 건설업자에게 불하했고, 여러 업체 가운데 정세권이 운영하던 건양사가 2등 없는 1등이었다고 한다. 정세권은 조선인들을 위한 주택 개발에 힘을 쏟아 "서울 전체에 집을 물산 장려한 사람"이었으며,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의 대부분은 조선 독립의 군자금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북촌 그 어디에도 정세권 혹은 건양사에 대해 안내하는 표석과 안내판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봄, 가을 산책하기 좋은 날씨가 되면 1년에 꼭 한 두번은 찾게 되는 북촌 한옥 마을의 숨겨진 역사와 보석 같은 민족의 위대한 스승에 대해 알고 나니 북촌 한옥 마을이 다시 보인다.
정세권 덕분에 우리는 북촌에 일본식 적산 주택 단지가 아닌 한옥 집단 지구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우리의 거주 문화를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여행지를 소개받으려다 민족의 큰 어르신을 소개 받고 그 분의 고매한 인품의 향기를 시대를 초월해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 외에도 홍천 은행나무숲과 원대리 자작나무숲, 태백 매봉산의 배추밭, 신성리 갈대밭과 고창 보리밭 등 그 땅을 일구고 가꿔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땅의 숨결을 꼭 한 번 느껴보고 더불어 내 발자취도 함께 남겨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때마침 가을 바람 불어오는 데 한 번 떠나 볼까?
조상들이 물려준 소중한 이 땅을 한 걸음 한 걸음 마음에 새기며 걸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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