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지 않겠다 창비청소년문학 15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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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서연 아빠랑 도장 찍고 오는 거야?"
"......"
"에미가 묻잖아, 이년아!"
"이러다 서연이 깨겠다. 승애도 속 시끄럽겠지만 네 에미 생각해서 얘기 좀 하자꾸나."
"네, 할머니."
엄마가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안주도 없이 한 잔을 따라 마신다.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가 말 없이 밑반찬 몇 가지를 차려 놓으신 후 서연이 방으로 들어가신다. 나도 대충 옷을 갈아 입고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하루 종일 어찌나 후덥지근하던지, 이제야 가슴 속으로 시원한 바람 한 줄기 불어온다.
"그러게 엄마가 말릴 때, 내 말 들었으면 됐잖아. 꽃 같은 네가 풀 같이 살까 봐, 나처럼은 안 살았으면 했는데..."
엄마의 소주 잔 위로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열아홉 살짜리 애가 애를 낳았으니, 남들 다 가는 대학도 못 가고 고등학교 중퇴하고 십 년을 건용이만 바라보며 서연이 낳아 여태 키웠는데..."
엄마가 소주 잔을 연거푸 들이킨다.
"건용이 그 놈이 서울에서 대학 다니면서 여자 문제로 너 속 썩일 때, 그 때, 알아봤어야 해. 군대 갔다 와서 취업 준비한다고 요 몇 년 속 안 썩이나 했더니, 이제 취업해서 자리 잡고 너랑 서연이 데리고 잘 살 줄 알았는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꽃 같은 내 딸 데려다 잡초를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딴살림을 차려?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승애 너 낳고 열심히 키운 죄 밖에 없는데,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아이고."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감정이 격해져 흐느끼기 시작한다.
"엄마 나 아직 꽃이야. 나 이제 겨우 스물 여덟이라고. 서연이도 이제 열 살이면 세상 물정 다 알 나이고. 우리 모녀 이제부터 시작하면 돼. 그 동안 엄마가 할머니 모시고 우리까지 건사하느라 고생한 거 다 알아. 이제 내가 할게. 나 할 수 있어. 엄마처럼 살진 않을 거야. 그러려고 이혼한 거야. 엄마는 평생 돌아오지 않을 아빠 바라보며 살았지만 난 아냐. 맘 떠난 서연 아빠 붙잡고 평생 못 살아. 누가 알아? 살다 보면 나 좋다는 사람 만날 지..."
"퍽이나! 혹 딸린 네 년 누가 좋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엄마는 내 말에 적이 안심이 되나 보다. 눈물을 훔치며 엄마가 소주 한 잔을 비우고 김치 한 쪽을 먹는다.
"검정 고시 끝나고 공무원 시험 본다고 엄마가 서연이에 내 뒷바라지까지 해 준 거 이제 다 갚을게. 이제 혼자 깡 소주도 그만 마시고, 술 마시고 싶으면 나랑 좋은 데 가서 같이 마셔요. 내가 돈 벌면 제일 먼저 우리 엄마 시집부터 보내 줄게."
"미친 년."
엄마는 눈을 흘기면서도 입꼬리에 미소가 번진다.
이제 더는 외롭지 않을 거다. 이제 더는 외로움에 치를 떨며 텅 빈 가슴 부여 잡고 새하얗게 밤을 지새우지도,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술잔을 비우지도 않을 거다. 한창 활짝 펴야 할 꽃 송이를 박제 삼아 벽에 걸어 두고 먼지만 쌓인 채 놓아 두는 짓은 이제 더는 하지 않겠다. 시들어도 꽃은 꽃이다. 시들 때 시들더라도 가시 바짝 세우고 향기 잃지 않으며 살리라.
어느 새 엄마가 할미꽃 마냥 내 어깨에 기댄 채 고개 숙여 졸고 있다. 어디서 습한 바람에 꽃냄새가 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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