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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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모님은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최종 학력이 중졸과 국졸이셨지만 자수성가하셔서 자식들 고생 안 시키고 삼남매를 대학까지 보내셨다. 덕분에 나는 편안한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고 가끔 TV 뉴스에 나오는, 화염병 들고 데모하는 언니, 오빠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대학생이 되어서도 나는 데모는 물론이고 사회와 관련된 그 어떤 이슈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나의 관심사는 입시에 억눌렸던 그간의 자유를 만끽하고자 열심히 술 마시고 연애하기 바빴다. 그렇게 4년이란 시간을 허송세월하고 졸업을 앞둔 그 해 겨울, IMF가 터졌다.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내게는 악몽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장 나는 백수가 되었고 1년 만에 어렵게 얻은 첫 직장은 6개월, 계약직이었다. 그렇게 나의 사회생활이 시작되었고 IMF의 조기 졸업처럼 나의 계약직도 2년 내에 마무리되었다. 그 후 나는 안정된 직장생활을 기반으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육아를 이유로 퇴직을 하고 전업 주부로 생활한 지 7년이 지났다. 어느덧 초등학생 자녀를 둔 40대의 아줌마가 바로 내 모습이다.


우리나라가 IMF를 조기 졸업했을 때 외신들은 IMF의 모범생이라고 추켜올려줬고 국민들은 더 이상의 어려움은 없을 거라 안심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한 이후 우리나라도 예외 없이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청년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 세대에 이어 인간관계와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오포 세대를 넘어 꿈과 희망마저 포기한 칠포 세대에 이르고 있다. 사회의 돌아가는 모습과는 무관하게 열심히 살아온 나의 현실만은 밝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있기를 바라지만 나 역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에 자꾸만 돈, 돈, 돈……. 이러다 돈의 노예가 되는 건 아닐까?


여기 돈의 욕망에 사로잡혀 돈의 화신, 돈의 노예가 된 로얄 패밀리와 골든 패밀리들이 있다. 로얄 패밀리가 대기업 회장과 그의 가족들이라면 그들이 더 많은 부를 축적하도록 도우면서 그들의 밥그릇에서 떨어진 밥알을 탐욕스럽게 주워 먹는 이들이 골든 패밀리들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배울 만큼 배웠고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소수의 엘리트 그룹이다. 그런 그들이 로얄 패밀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탈세를 하고 비자금을 조성하며 조성된 비자금으로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길들이고 불법적인 상속을 자행한다. 그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국민의 몫이다.


작가는 책 속에서 ‘국민은 나라의 주인인가. 아니다. 노예다. 국가 권력의 노예고, 재벌들의 노예다. 당신들은 이중 노예다. 그런데 정작 당신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것이 당신들의 비극이고, 절망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식인으로서 현실의 부당함과 역사의 처절함에 대해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를 가슴에 품고 있지 않다면 그건 지식인일 수 없다.’며 우리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피 흘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계속 신장시켜 나갈 수 있는 정치혁명으로서의 투표와, 경제 범죄를 저지른 기업들의 상품을 사지 않는 경제혁명으로서의 불매운동, 시민 사회 단체들의 철저한 감시와 감독 활동을 위한 국민의 자발적 후원 또는 자원 봉사’를 말하고 있다. 또한 ‘긴 인류의 역사는 증언한다.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은 노예에게 자유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노예 중에 가장 바보 같고 한심스런 노예가 있다. 자기가 노예인 줄을 모르는 노예와, 짓밟히고 무시당하면서도 그 고통과 비참함을 모르는 노예들이다. 그 노예들이 바로 지난 40년 동안의 우리들 자신이었다.’고 경고하고 있다.


투표일은 놀고, 먹고, 마시는 날이라 생각하고, 입으로는 부도덕한 기업을 욕하면서도 막상 마트에 가면 덤으로 주는 상품에 손을 뻗고, 최저가 검색에만 열을 올리는 나, 각종 시민사회단체가 우리를 위해 활발히 활동해주길 바라면서도 그 어떤 실질적 도움도 주지 못하는 현실 앞에 나는 결국 돈 앞에서 자발적 복종을 하는 노예다. 돈 앞에서 효도하고, 돈 앞에서 우애 있고, 돈 앞에서 굽실거리는 노예!


우리의 부모 세대가 전후의 폐허 속에서 피땀 흘려 이룩한 경제 성장의 토대 위에서 열심히 공부한 언니, 오빠들이 화염병을 앞세운 가두투쟁의 결과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정치민주화를 가져왔다. 그 덕에 나와 내 가족이 오늘도 무사히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내가 보답해야 할 차례다. 부모님과 나의 편안한 노후를 위해, 내 자식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이제는 경제민주화를 정착시켜야 할 때다. 다행인 것은 경제민주화를 위해 우리가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눈과 귀를 열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실천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비록 힘없고 약하지만 우리 하나하나가 모여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보여주면 된다는 것이다.


소설은 골든 패밀리 강기준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또 다른 기업으로 반복되는 탈세와, 비자금 조성, 그리고 불법 상속을 하러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번만은 어림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나라의 진정한 주인으로,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를 가슴에 품고 기업의 진정한 고객으로 우뚝 서서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요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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