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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ㅣ 소설로 그린 자화상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9월
평점 :
판매중지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오늘 아침에서야 다 읽었다.
요즘 도서관에 가는 것도 귀찮고, 무거운 책을 가방 가득 들고 다니는 것도 힘들던 차에 전자책을 빌려 읽는 재미에 빠져 읽게 된 책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다.
모든 전자책이 다 그러한 건 아니지만 이 책은 페이지 표시 단위가 '쪽'이 아닌 '%'였는데, 책의 92%가 소설의 내용이라면 나머지 8%가 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이었다.
"기억과 묘사"라는 제목의 작품 해설을 쓴 평론가는 김윤식 서울대 교수였다.
문학평론가도 문학 비평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는지라 '김윤식 교수' 역시 생소했다.
그냥 그런 교수려니 별 생각 없이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습관적으로 인터넷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방금 읽은 문학평론을 쓴 교수가 어제 별세했다는 기사를 접해서다.
수 많은 평론가 중 한 명이려니 했는데 그가 '한국 문학의 산증인'이요, '문학평론계의 거목'이며, 1세대 문학평론가로서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남긴 저서만 200권이라는 기사를 접하고 다시 한 번 작품 해설을 읽어내려갔다.
문학 평론에 문외한인 내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웠으나 소설의 본질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박완서 문학을 제대로 읽는 지도를 만난 기분이었다.
서사시에서의 기억이란 소설에서는 회상으로 강화되는 것. 서사시에서의 기억이 순간적 기억이라면 소설에서의 그것은 지속적이자 절대적이라는 것. 외부와 내부,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의 통일(서사시적 세계)이란 근대 시민 사회 속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는 것. 그럼에도 그것을 찾아 헤매는 문제아가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곳이란 오직 자기의 '기억' 속에서인 것. 그것이 소설이라는 것입니다.(중략)
여기까지 이르면 작가 박완서가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그 많던 싱아……》를 쓰겠다고 새삼 공언한 것이 무엇을 가리킴인가라는 물음에 한 가지 해답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소설의 가장 본질적인 영역에 접근하겠다는 결의가 아니고 새삼 무엇이겠는가. 기억의 도움을 받는 회상의 형식, 이것만이 소설의 순수 혈통이라는 것. 주관·객관의 자기 속에서의 통일이 가능한 영역이야말로 소설이 서고 머물 수 있는 장소라는 것. 무슨 손재주라든가 꾸며서 만들기를 떠나 본질적인 소설의 장소에 들어가겠다는 결의로 쓴 것이 《그 많던 싱아……》이기에 이는 소설 중에서도 진짜 소설이라는 작가 박씨의 확고한 의지 표명이라 할 수 없을까. 이 의지 표명이 어찌 자화상이라는 속된 표현을 용납하랴. 소설과 기억, 이것만큼 본질적인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중략)
남에게 받아쓰게 할 수 없는 기억, 그러한 회상의 형식이야말로 소설의 적자이자 순종이라는 사실이 이로써 조금 드러나지 않았을까.(중략)
저자의 기억에 의해 타인의 발언을 기록할 경우, 작가라면 필연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 그것. 기억에 의한 회상이란 그러니까 묘사를 가리킴인 것. 문학, 특히 소설의 육체란 무엇인가. 철학과도 시(단편)와 다른 소설의 특질이란 묘사에 있지 않았던가. 그 대단한 묘사라는 것의 정체를 묻는다면 누가 뭐라 대답해야 적당할까. 《그 많던 싱아……》는 아무나 쓸 수 있는 '문학 앨범'과는 나란히 가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안고 있는데, '남에게 받아쓰게 할 수 없음'이 그것. 기억에 의한 것만이 묘사의 대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기억력에만' '순전히' 의존한 글쓰기로 《그 많던 싱아……》가 씌어졌던 것. 중요한 것은 이 '기억'만의 것, 묘사의 것을 아무나 베껴 쓰게 할 수 있는 '문학 앨범'과 동시에 제시해 놓은 점입니다.(중략)
《그 많던 싱아……》는 감동적입니다. 그 첫 번째가 그러니까 저에게는 《엄마의 말뚝》(4)에 해당된다는 것. 작가 박씨는 결코 (4)라는 번호의 작품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4)의 번호를 헌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주의하게도 《꿈꾸는 인큐베이터》(현대문학상 수상작, 1993. 2.)를 두고 저는 《엄마의 말뚝》(4)가 아닐까라고 했지만, 정말은 이는 제(5)에 해당되는 것이겠지요. 요약하겠습니다. 작가 박완서의 문학이란, 그러니까 《그 많던 싱아……》로 요약되는 그의 대표작이란 엄마인 기숙 여사와의 대결이라는 것, 말을 바꾸면 《그 많던 싱아……》란 《엄마의 말뚝》(4)니까 이 시리즈와 분리시키면 '전혀' 무의미한 것. 모녀 대결 의식이야말로 이 작품의 긴장력이자 박완서 문학의 긴장력의 근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중략)
고인이 그려준 지도를 보며 박완서 문학을 다시 한 번 제대로 읽어 봐야겠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311~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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