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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집안의 형제들 1 ㅣ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서상범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0년 11월
평점 :
힘 있고 돈 있는 사람 앞에서 자꾸만 비굴해지려는 것처럼 세계적인 고전이라고 널리 알려진 책 앞에서도 나는 주눅이 든다.
남들은 읽자마자 바로 책 속에서 보석을 건져 올리는데 나만 그 가치를 몰라 볼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을 읽고 후기를 남기는 데 망설임이 있었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이 작품에 대해 훌륭한 해석들을 해주었고 내가 딱히 더 덧붙일 말도 없거니와 설령 있다해도 고전에 문외한인 내 이야기에 귀기울여줄 이는 없을테니까.
게다가 나는 이 고전을 원문 그대로 번역한 책이 아닌 청소년용 축약본으로 읽었기에 더더욱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기에.
그럼에도 이렇게 몇 자 적어보기로 한 건 나중에 축약본이 아닌 원문의 느낌을 최대한 살린 제대로 된 책을 읽었을 때의 후기와 어떻게 다른지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의 세계 명작 시리즈는 비록 청소년용으로 제작된 책이기는 하지만 고전을 많이 접하지 못한 성인이 읽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현직 국어 교사들의 작품 해설이 덧붙여져 고전에 대한 깊이 읽기를 도와주고 있다.
나 또한 이 작품 해설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대해 앎과 배움의 기쁨을 살짝 맛보았다.
부끄럽게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집안의 형제들』이 미완성이라는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어쩐지 책의 첫 머리에 십삼 년 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서 내내 십삼 년 전의 이야기만 하다가 소설이 끝나서 내심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작품 해설을 통해 이 소설이 십삼 년 후 알렉세이가 황제를 암살하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내용을 그릴 예정이었다는 내용을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순수하고 고결한 청년 알렉세이가 어쩌다 과격한 혁명 전사가 되었을지 그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아쉽기만 하다.
작품 해설에서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러시아 사람들의 독특한 이름 체계였다.
지난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와 겨뤘던 스웨덴 선수들의 성이 하나같이 '무슨 무슨 손'으로 끝나는 걸 보면서 스웨덴의 이름 체계에 대해서 알게되었는데 러시아도 비슷한 이름 체계를 사용하고 있었다.
스웨덴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인도 이름만 알면 그 아버지의 이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러시아 이름의 특징은 '본인 이름+아버지 이름+성"으로 불린다고 한다.
표도르의 아들이라면 무조건 이름 가운데 표도로비치가 들어가고 표도르의 딸이라면 표도로브나가 들어가는 식이다.
그러니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도스토옙스키 가문의 미하일의 아들 표도르라는 뜻.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처럼 성을 제외한 '이름+부칭'으로만 부르는 것이 러시아식 존칭이라고 한다.
따라서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일 경우 반드시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불러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러시아 인의 모든 이름에는 애칭이 존재하는데 가까운 사이에서는 누구나 이름 대신 애칭을 사용하기에 원작에는 인물 간 애칭을 많이 사용하는데 청소년용 책에서는 독자의 혼선을 줄이기 위해 애칭을 생략하고 있다.
원작에서 '드미트리'의 애칭은 '미챠'인데 애칭의 애칭은 '미첸카'라고 한다.
애칭의 애칭은 가족이나 부부, 또는 연인 사이에서만 부른다고 한다.
처음부터 원작을 읽었다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이름을 구별해내느라 정작 사건의 내용이나 인물들의 다양한 심리에 대해서까지는 제대로 된 이해조차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내가『죄와 벌』 이후 두 번째로 읽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다.
다음 백과 사전에서는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 사상, 종교 등에 관한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작품으로, 그리스도교와 무신론의 대결을 담고 있다. 뛰어난 심리 묘사와 신에 대한 대담한 저항, 도덕적이고 지적인 긴장감 등으로 인해 오늘날에도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런가 보다.
'친부 살해'라는 소재를 가지고 아버지와 네 명의 형제가 돈과 애정, 무신론과 깊은 신앙심 사이에서 끝없이 다투며, 또한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지의 과정이 밝혀지기까지 주요 인물들의 다양한 내면 심리와 사건의 묘사가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재미있게 읽히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했던 마음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히 죄인이라며 유죄를 인정하는 모습과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한 채 절제된 삶을 살던 무신론자 이반이 자신의 부추김 때문에 스메르쟈코프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부분에서는 『죄와 벌』의 창녀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결국 작가는 신에 대한 깊은 믿음만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그리스도적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비록 그리스도교인은 아니지만 이반의 '대심문관'을 통해 인간이 '양심의 자유 vs 평안함'과 '자유로운 사랑(신앙) vs 복종(기적의 노예)'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시험에 들지 않고 자유와 사랑과 평안함 모두를 쟁취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너는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약속했지만, 무력하고 죄 많은 비천한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과연 하늘의 빵이 지금 땅 위에서 먹는 빵만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인간이 선악의 자유로운 선택보다 평안함을 더욱 귀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잊었느냐? 물론 인간은 양심의 자유를 가장 매혹적으로 여기지만, 또한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도 없다. 그런데 너는 인간의 양심을 영원히 평안케 할 확고한 근거를 주지 않은 채 수수께끼처럼 아리송해서 인간이 힘에 겨워하는 자유만을 주려 한다. 너는 인간의 양심을 지배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 양심에 책임을 지워 더 큰 괴로움을 주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그 결과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각자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무력한 인간들의 양심을 영원히 정복해서 행복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다. 바로 기적과 신비와 권위이다. 그런데 너는 이 세 가지 모두를 거부했다.
너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걸 믿겠다.‘라고 희롱할 때에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때도 역시 인간을 기적의 노예로 삼기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신앙을 심어 주려고 내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너는 자유로운 사랑을 원하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속에 복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외면한 것이다.
그러나 너는 인간을 너무 높이 평가했다. 기적을 부정하는 인간은 신까지도 부정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신보다 기적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의 사업을 수정해 그것을 기적과 신비와 교권의 위에 세워 놓았다. 그러자 민중은 다시 자기들을 양 떼처럼 이끌어 줄 목자가 생기고 끝없는 고통의 원인인 그 무서운 양심을 마침내 제거해 줄 거라며 기뻐했다.(264~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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