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읽기(1)

 

지난 연말에 나온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을 미처 읽기도 전에 2005년의 책 가운데 한권으로 꼽기도 했으니까 나로선 이 책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기대를 부여한 것이 된다. 물론 아주 안 읽은 건 아니어서 (한국어판 서문을 비록하여) 저자의 서문 정도는 읽었고,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란 서론은 내 기억에 <윤리21>(사회평론, 2001)에서도 읽은 바 있다(정확히 겹치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윤리21>은 박스에 들어가 있어서). 그러니 생짜로 호언을 한 것은 아니었던 것.

지난 며칠간 나는 책의 제1부 '칸트'를 영역본과 함께 거의 다 읽었는데(2부 '마르크스'는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역시나 고진은 기대만큼의 힘, 비평의 힘을 보여준다. 나는 언제나 그의 비평이 좀더 긴 분량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는데, <트랜스크리틱>은 그런 바람도 상당 부분 충족시켜준다. 칸트에 관한 내용만 거의 200쪽이 되니까. 이런 것이 내가 갖는 만족감인 반면에 한편으론 책의 교정상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미 일부에서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인명의 오기에서부터 내용상의 오류에 이르기까지 국역본은 얼마간 교정되어야 할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당분간 짬짬이 고진의 칸트 읽기를 따라가면서 그런 내용들까지 지적하고자 한다. 분량상 몇 차례 나뉘어 진행될 것이다.

 

 

 

 

서론에 해당하는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를 제쳐놓으면 제1부의 제1장은 '칸트적 전회(The Kantian Turn)'이다. 칸트를 기점으로 사고의 물줄기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 '전회'는 "당시까지의 형이상학이, 주관이 외적 대상을 '모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주관이 외계에 '투입'한 형식에 의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식으로 역전된 것을 의미한다."(65쪽) 요컨대, 모사론(모방론) 대 구성론인 것. 이걸 칸트 자신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렀는데, 고진이 가장 먼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지구(주관) 중심의 사고를 부정한 코페르니쿠스와 다소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주관적' 구성주의가 어떻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값하는 것인가이다.

 

 

 

 

이에 대해서 고진은 단번에 '물자체'(와/혹은 '초월적 대상')에 대한 칸트식 사고에 그러한 전회(=혁명성)이 놓여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진에 따르면, 칸트가 주관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그래서 칸트가 세계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주관성 철학의 시조로서 '잘못' 간주되었지만) 실상 칸트는 그러한 '소박한' 관념론을 부정한다. 이에 따라 고진은 칸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자체의 의미를 먼저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토머스 쿤에 따르면(<과학혁명의 구조>가 아닌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의 인용이지만 후자는 아직 국역돼 있지 않다), 실상 자신이 죽은 해에 출간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에서조차도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따르고 있다. 다만, 당시까지의 천동설에 따라다니는 천체 회전운동에서 보이는 어긋남(불일치)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 것으로 보면 해소된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동설인가 천동설인가가 아니라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을,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것과는 별도로 어떤 관계 구조의 항으로 파악한 일이다."(68쪽)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중요한 것은 경험론(감각)이나 합리론(사유)이냐가 아니었다. 칸트가 도입한 감성의 형식이나 오성의 범주는 '초월론적인 구조'이며(이 점을 고진이 내내 강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이라고 불리는 것을 어떤 관계 안의 항으로 발견한 것과 같다." 이런 이유에서 고진은 토머스 쿤이 "프로이트 자신은, 지구는 단순한 혹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과, 무의식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제어한다는 그의 발견의 병행적인 효과를 강조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부정확하다고 교정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획기적인 것은 '무의식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제어한다'는 생각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꿈 판단>(*<꿈의 해석>이 왜 이렇게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역본은 정말 <꿈 판단>인 것인지?)이 보여준 것처럼,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어긋남을 초래하는 것을 언어적인 형식에서 보려고 한 데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무의식의 '초월론적인' 구조가 발견되었다"(69쪽)

 

 

 

 

칸트나 프로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갖는 의미에 대한 토마스 쿤의 오해, 혹은 부족한 이해는 사실 그만의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통념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이고 통념적인 칸트상에 문제가 있으며 고진은 일차적으로 그걸 교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상식/통념은 "칸트가 말하는 형식이나 범주가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물리학에 기초한다는 오해이다." 사실, 칸트 철학이 '뉴턴 역학의 철학적 해명'이라는 건 대부분의 철학사나 철학 개론서들에서 반복하고 있는 통념이다. 한데, 고진은 그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칸트가 감성의 '형식'을 생각한 것은 오히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클리드적 칸트 대 비유클리드적 칸트?(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어진다.)

"칸트는 항상 주관성의 철학을 연 사람으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칸트가 한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형이상학을 그 범주를 넘어선 '월권'행위로 보는 것이었다.(...) 칸트에게서 감성, 오성, 이성 등은 프로이트의 이드, 자아, 초자아와 마찬가지로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작용으로 존재한다. 초월론적 통각(주관)도 마찬가지여서,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이게 하는 작용으로 존재한다. 초월론적이라는 것은 무로서의 작용(존재)를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초월론적(하이데거)이다. 동시에 '의식되지 않는' 구조를 본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정신분석적 또는 구조주의적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칸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주관성 철학으로 전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물자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 전회하는 것이다."(72-3쪽)

 

 

 

 

그렇다면 '물자체' 무엇인가? 이 점에서 내가 보기에 고진의 독창성이 드러나는 것 같은데, 그는 '물자체'를 윤리적인 문제, 즉 '타자'의 문제로 본다: "'물자체'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직접적으로 말해지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문제인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의 '전회'가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회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칸트 이후 호언장담해온 그 어떤 사상적 전회보다도 근원적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칸트의 '물자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인간 이성/의식 주관적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지동설'이며, 그런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값한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고진이 자세히 드러내는 바이지만, 그러한 전회의 비밀을 고진은 <실천이상비판>이나 <판단력비판>에서 찾지 않고 <순수이성비판>에서 찾는다(이를 테면,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 비밀이란 '타자'의 발견과 그와 병행적인 윤리학적 문제의 제기에 놓여지며, 그것을 흔히 인식론에 관한 저작으로 읽히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독해해내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득의의 전략이다(요컨대, <순수이성비판>을 윤리학 책으로 읽는 것이다).

이른바 <순수이성비판> 다시 읽기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고진의 '비평가'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다. '비평가'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읽도록 만드는 이들을 가리키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틀렸습니다. 공부하세욧!"

06. 01. 09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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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철학자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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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푸줏간에서 한 여인이 좋은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끔찍한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하고 싶었습니다.'(17쪽) 마그리트의 말이다. 그의 그림들이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유가 절반은 숨어있지 않을까? 나머지 절반은 장담컨대, 저자인 수지 개블릭이 책임지고 있다.

그녀는 마치 '당신이 마그리트에게 알고 싶었던 모든 것, 하지만 차마 옆사람에게 물어보지는 못한 것'에 대해서 답해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마그리트와 그의 철학과 그의 회화에 대해서 폭넒고 깊이있게 쓰고 있다. 그래서 뒷표지에 실린 '확실히 마그리트 연구의 모범이 될 것'이라는 타임스의 서평이 허사만은 아니지 싶다.

의미심장하게도 책의 시작은 '철학과 해석'이다. 사실 재현을 거부하는 그의 그림들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개념들의 낯선 병치와 그것이 거두는 효과이다. 이런 사실은 그가 일생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걸 알게 되면 아주 자연스레 이해된다.

요컨대 '회화작품에서 그는 거의 천부적인 싫증을 보여 주었으며, 권태, 피로, 혐오감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꾸며냈다'(9쪽) 그에게 회화가 가지는 의미? '그에게 있어서 회화란 정신이 지닌 두세 가지 기본적인 문제들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으로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영원한 반란'(9쪽)이었다.

그는 일생을 두고 자신의 생각(정신)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화가의 특이한 유형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특이한 유형에 속한다. 넓은 의미에서 초현실주의 계열에 속하면서도 브르통 등과 결별했던 것도 그런 기질상의 차이가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 데 키리코와 시인 로트레아몽을 들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마그리트의 영향을 받은 팝아트와 마그리트의 관계에 대해서도 요령있게 설명한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보다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은 회화에서의 '재현의 위기'를 주제화하고 있는 마그리트 회화의 특징과 그 전략이다. 그녀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밑에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아 어깃장을 놓는 그의 심보(?)를 아주 유려하게 해설해 보이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전략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138-140쪽) (1)회화에서 단어는 이미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단어=이미지) (2)회화에서 오브제는 단어나 이미지와 동일하지 않다(오브제≠단어, 이미지) 그리하여 이제 더이상 재현적 회화란 가능하지 않으며 유효하지도 않다.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회화적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무엇을 그린다는 것이 더이상 가능하지도 의미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는 무언가를 그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으로부터 현대 회화의 희소한 가능성과 과제가 동시에 산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은 비단 마그리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현대 회화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도 아주 유익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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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글쓰기의 황홀!
국가와 황홀 - 우리시대의 지성 5-014 (구) 문지 스펙트럼 14
송상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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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한 평론가 김현의 글 어디에선가 송상일이란 이름을 본 적이 있다. 퍽 상찬했던 거 같고, 종교적이라는 얘기도 붙어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는 한 세기가 지났다! 김현이 작고한 지도 10년이 넘었고! 아주 드물게 보는 송상일의 이번 에세이집은 그런 기억들을 떠올려 주었다. 아주 황홀하게!...

<책머리에서> 저자는 '시간의 틈새들을 훔치듯 낚아채며 썼다. 그래서 천식 앓는 문장이 되었다.'고 미리 겸양조(혹은 변명조)의 문장을 쓰고 있지만, 가끔 천식을 앓는 나는 아직 그와 같은 문장, 천식 앓는 문장(!)을 쓰지 못한다. '천식 앓는 문장'이란 표현에서도 짐작되는 바이지만, 책은 산문(어떤 논변)이라기보다는 시이다. 그리고 저자가 줄곧 국가와 대응시키면서 옹호(?)하고 있는 것도 역시 시이다. 그는 시로써 시를 옹호한다. 일종의 동어반복인데, 그의 말을 빌면, 시는 동어반복의 운명으로써 모든 '있는 것들'에 저항한다. 아니 본때를 보여준다. 마치 논개의 낙법처럼...

<국가와 황홀> <존재와 무> <제유> 세 개의 장과 보탬말, 그리고 부록(<똥 이야기>)으로 돼 있는 이 책을 지난 한주 아주 아껴서 읽으며 나는 한 가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간혹 왜 시도 때도 없이 (허)무에 직면하는가, 혹은 그에 포박당하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저자에 의하면 나에겐 아무래도 '시인'될 기질이 있는 모양이다!

그에 의하면, 시는, 그리고 시인은 존재가 아닌 (허)무에 들려 있는 존재(또 존재?)이다. 시인은 미래를 가늠하지 않으며(계산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떠한 생산적 활동과도 무관하다. 에로스(생식적 섹스)와 무관한 에로틱(생식 없는 섹스)이 그러하듯이. 그리하여 생식 없는 섹스에 몰두할 때, 즉 에로틱에 몰입할 때, 그리고 시를 쓸 때, 우리는 얼빠진 존재들이다. 저자는 이 얼빠진 존재의 위엄에 대해서 아주 우아하면서도 튼튼한 문장들로 말한다. 그 점이 맘에 든다...

황홀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것이니, 이 책에서 국가/황홀이란 이분법이 결국 무얼 생산했느냐고 묻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리라. 다만, 읽고 기뻐하며 가까이 둘 일이다. 이런 문단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제값을 다하고 있으니까...

'정액을 소비하는 동물은 시를 쓰는 동물밖에 없다. 정액의 낭비는 유별나게 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금욕주의는 동물적인 데가 있다.'(34쪽) 우리 주변엔 부자 동물과 가난한 동물 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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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자기애-인류애적 분열증 환자들의 경전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바슬라프 니진스키 지음, 이덕희 옮김 / 푸른숲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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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 시인 츄체프의 시구인데, 고골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작품들 속에서 ‘황당한’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자연스레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비단 문학작품이 아니더라도 러시아란 나라의 자연적/역사적 조건에 대한 약간의 상식만 갖고 있으면 이 나라의 ‘비합리성’에 대해서는 어림짐작이 가능하다. 혁명 이전 전세계 육지의 1/6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와 한랭한 기후가 이 나라의 자연적 조건이라면, 3세기에 걸친 이민족 몽고의 강압적인 지배는 그 역사적 조건이다.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잔혹한 삶(러시아적 삶!), 그래서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덕목은 ‘인내’였다.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들이 자인한 바 있듯이 러시아적 영혼이란 달리 ‘노예적 영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의 노예적 상태란 단지 정치적 부자유나 신체적인 구속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인간 실존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폭력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류사의 역사적 조건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조건에 대한 인내의 '폭발'에서 광기의 계보학은 태어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1866)에는 어린 로쟈가 학대받는 늙은 말의 목을 껴안고 흐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유일한 심리학자’라고 일컬은 바 있는 철학자 니체는 1889년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학대받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끼다가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이후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00년에 사망한다. 1889년에 태어난, 20세기초 러시아가 낳은 전설의 발레리나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디오니소스적인 영혼의 소유자는 철학을 하는 대신에 춤을 추었을 뿐.

그는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나머지 30년은 정신병원에서 보냈는데, ‘영혼의 절규’란 이름을 새로 얻은 그의 ‘일기’는 그가 정신을 놓기 직전인 1919년초 6주간에 걸쳐 씌어진 기록에 근거한다. 한 민감한 영혼이 삶의 고통과 싸운 이 쟁투의 기록에는 도스토예프스키적, 니체적 흐느낌이 가득 배여 있다.

그는 고기를 먹으면서 울고, 사랑의 시를 적으면서 울고, 아내의 울음 때문에 또 운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전설적인 발레리나’ ‘위대한 예술가’라고 했지만, 그 자신에 의하면 그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은 단순한 사람”이며, 그는 “그리스도도 내가 평생에 걸쳐 받은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그가 받은 고통은 그 자신의 몫만이 아닌 전 인류의 고통이기 때문은 아닐까? 한 시인을 위해 울어주던 버드나무처럼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운다. 그의 일기는 이 울음의 기록이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정신의학자들에 의하면, 그의 병명은 정신분열증, 더 정확하게는 ‘자기애적 인격의 분열적 정서 혼란’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자기애적’이란 진단은 절반만 옳다. 브로일러나 프로이트 같은 당대의 대가들조차도 치유할 수 없었던 그의 병증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앓았고 또 니체가 앓았던 병, 곧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병증의 치유는 자기만의 구원이 아닌 전인류의 구원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병증의 환자들은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맨마지막에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경전과도 같은 이 책에서 니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지 짐승이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나 역시 결점들을 지녔다. 나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나는 신이 되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 이것이 내 인생의 목표이다.”(348쪽) 당신도 그런 목표를 갖고 있는가, 라고 니진스키는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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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hadrianus75 >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들
감정교육 - 골든세계문학선 13
플로베르 지음 / 중앙출판사(중앙미디어) / 1992년 4월
평점 :
절판


19세기 프랑스 문학사에서 플로베르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어떠한 사조에도 속할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관점 때문일 것이다. 흔히 낭만주의의 마지막 세대로 또는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해설되는  그의 작품은 실상 낭만주의로도 또 사실주의로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특히 '감정교육'은 삶의 현실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꿈으로 인도되는 이야기의 복잡 다단한 상호 연관관계를 개인의 이야기histoire와 역사Histoire 속에서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는 역작이다.

꿈꾸는 자아의 내면으로 침잠하여 자연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의 관점에서 보자. 이 작품에는 스스로 되돌아 볼 주인공 내면의 깊이도 없을 뿐더러 돌아가야 할 원점으로서의 자연도 없다. 주인공의 심리는 고정되지 않고 늘 이리저리 방황하며, 각자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논리를 따라간다. 그들은 낭만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며, 그들이 처한 19세기 전반기 격동의 세월은 거시적인 정치와 미시적인 정치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온갖 전략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실주의인가? 실제로 인물들이 등장하고 만나는 장면들에서 배경은 너무도 섬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배경에 대한 충분한 설명 후 시작되는 인물들의 동작, 섬세한 제스쳐들은 이 작품이 사실주의의 선구라는 모파상의 말을 그럴듯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등장인물들의 행위들을 이끄는 꿈은 어찌되는가?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졸라의 작품들에 비해 환상과 이미지, 꿈들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하게 살아 있다. 꿈은 현실과 부단히 부딪히며, 현실을 유발하지만 그것은 늘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폴레옹 3세 휘하 경찰관으로 돌변하여 옛 동지 뒤사르디에를 죽인 세네칼은 그 절정을 이룬다.  일관성이 없어 인생이 허무한 프레데릭, 일관성만 있어 인생이 허무해진 데로리에 등, 인간 삶의 불완전성은 꿈과 현실의 부단한 상호작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꿈과 현실의 만남 외에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만남은 바로 일상적 인간들의 작은 정치들과 거시적 정치사회의 만남이다. 내면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주인공이 없는 바에야, 이상적인 정치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플로베르의 관점이다. 주인공 프레데릭에게  돈을 빌려주며 내뱉는 뒤사르디에의 절망은 19세기 프랑스인의 것만은 아니리라. 정치상황에 따른 재빠른 의견의 수정, 이권에 따른 이합집산, 권력을 향한 동화와 차별의 전략들...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는 의지를 지닌 인간의 걸작이 아니라 삶의 전체적이고도 구체적인 상황을 규정하는 조건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우리는 실제 현실 역사와 작가가 구상한 가상의 이야기가 다시 맞물리는 현실과 꿈의 또 다른 만남을 목격한다.

꿈 없는 현실의 삭막함과 현실 없는 꿈의 공허함을 작가는 한 번에 뛰어넘는다. 꿈과 현실이 뒤섞인 영역에서 낭만주의적 주체는 상황의 논리 속에서 현실적인 모습으로 해소되고, 객관화된 인물들의 모습은 그들의 꿈과 욕망으로 귀착한다. 꿈을 좌절시키는 현실은 비관적이지만 다시 꿈을 생성하는 현실은 낙관적이다. 이 비관과 낙관의 리듬을 조절하는 것은 바로 인간들 간의 삶의 관계망, 즉 서로 다른 수준들이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삶들의 영역이다. 모든 삶들이 귀속되는 이 정치적 삶들의 영역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면서, 이 작품은 스스로 또 하나의 정치적 견해이고자 한다. 예술은 세네칼이 말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조각난 등장인물들 각각의 꿈으로서 그 정치적 견해를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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