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wasulemono > 영화의 욕망을 욕망하는 책
영화가 욕망하는 것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0
김영진 지음 / 책세상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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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개인적으로 영화비평을 하는 사람들 중에 지식과 수사 사이의 긴장을 가장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는 이를 김영진이라고 생각한다. 한 때 <씨네21>을 구독할 때 가장 눈에 띠는 글을 쓰는 이가 김영진이었는데, 그의 글은 세련된 수사와 이론적 바탕이 조화된, 문장력과 사유가 조화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일간지 영화기사의 수사와 <키노>의 현학이라는 편향을 벗어난 중도파적 글이라고 할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글을 좋아하게 된 것같다. 지금은 <필름2.0>을 적을 걸어두고 이런저런 곳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육중한 몸매와 훤한 이마가 다소 의외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가 욕망하는 것들>은 <할리우드의 꿈>, <미지의 명감독>에 이은 그의 세 번째 책이다. <할리우드의 꿈>은 생소한 책이고, <미지의 명감독>은 예전에 <씨네21>에서 연재한 기사들을 묶은 책인데, 마침 <씨네21>을 구독하고 있을 즈음 연재된 기사들이어서 책으로 묶이기 이전에 다 읽었고 책으로도 다시 한번 훑어본 책이다. 한창 외국 영화 감독들에 대한 궁금증이 풍만했던 터여서 광범위한 정보로 가득한 그의 기사는 유용한 참고서가 되었다. 물론 그 책에서 언급된 영화들의 태반은 접할 수 없는 영화들이어서 아쉬움만 남겨주기도 했다.

<영화가 욕망하는 것들>은 날렵한 책이다. 150쪽 분량, 원고지 매수로 따져도 800매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저널리즘적 수사가 적절히 가미되어 읽기에 부담이 없다. 영화 전문 서적들의 경우 우리의 언어로 채 순화되지 않는 말들의 전시장처럼 생소한데 비해 이 책은 외국 서적을 인용하는 경우에도 잘 걸러져 있다.

이 책은 2001년 2월에 출간되었다. <JSA>로 한창 떠들썩하던 시점인데, 이 책이 토픽으로 삼는 것들은 90년대 이후 우리가 미디어와 비평을 통해 가장 많이 들었고, 한국영화로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것들이다. 에로티시즘, 포르노, 예술영화, B급영화, 블록버스터 등. 오해와 시비로 점철된 최근 몇 년 간 한국영화를 둘러싸고 너무나 많은 것들이 쏟아졌다. 이 책은 이것들을 한층 가다듬어진 호흡으로 바라보기 위해 각 토픽과 연관된 서구 영화 역사를 정리하고 논란이 된 한국영화를 이런 문맥에서 읽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김영진은 특별히 한쪽에 무게를 싣지 않고 논란이 되는 양 지점을 균형감각을 갖고 제시하고 있다. 그는 미쳐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거나 생략하고 넘어선 지점으로 되돌아가 영화 보기가 생각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난 이런 방식에 대해 긍정적이고 그의 논점에도 대체로 동감하는 편이다. 영화는 사회의 여러 가지 요소가 응축된 현대의 상징적 문화 형식이다. 영화를 단지 일회적 유희거리로 여기고 무비판적으로 소비하는 태도 자체도 그리 생산적이지 않지만, 영화를 그 자체로 고립된 장르로 특화시켜 바라보거나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관짓는 태도도 그리 생산적이지 못
하다.

일회적 유희거리도 아니지만 현실에 대한 단순한 재현도 아닌 영화, 그 영화를 현대의 가장 역동적인 문화 생산물로 바라보고 거기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주입시키는 태도는 항상 요청되지만, 영화가 놓여 있는 그 경계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대부분의 영화 서적은 지나치게 이론적이거나 실용적이어서 그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책이 많지 않다. 김영진의 <영화가 욕망하는 것들>은 한국 영화를 진지하게 읽어내고자 하는 관심에서 비롯된 결과물로 이만큼 정보와 사실, 의견이 조화를 이루며
한국영화에 대한 이해와 비판을 진작시키는 책도 드물 것같다.(단숨에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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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wasulemono > 기억을 넘어서
한국 현대정치의 악몽 - 국가폭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1
조현연 지음 / 책세상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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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추석 쇠러 가는 기차 간에서 서서 읽었다. 추석 분위기에 맞지 않는 내용이긴 하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독서체험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올해 들어 유난히 내 관심을 사로잡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올 초 모 시사주간지에 실린 최종길 교수 의문사, 주한미군 탱크에 깔려 죽은 여중생들, 허원근 일병 의문사. 이것들은 하나같은 국가권력을 매개로 한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의 오점들이다.

최교수의 선홍색 피를 흘리며 엎드려 있는 사진, 복숭아 뼈가 선명히 드러난 부검 사진, 탱크에 압사한 채 널브러진 주검, 구식 카키색 군복을 입은 총상 선명한 주검들을 주기적으로 마주 하며 너무도 잔혹한 세월을 넘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지나가는 장갑차의 캐터필러 소리만으로도 가슴을 떨었던 기억에 그 여중생들에게 닥친 압사의 고통이 몸서리치도록 생생하게 다가온다.

폭력과 살인을 통하지 않고는 권력 유지가 불가능했던 부도덕하고 불의한 권력의 한 쪽에 등 기대고 버틴 이 땅에서의 삶을 마주하며 칠레 같은 중남미 국가를 어줍잖게 동정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휘두르는 것만 폭력이고 살인일까. 노점상 단속 때문에 분신 자살한 박봉규 씨를 보며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국가권력이 힘없는 서민의 생존권을 차압하고 국민을 내동댕이친 것도 엄연한 간접 살인이다.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며 그냥 과거지사라고 가볍게 넘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사건들 중에 기억의 저편으로 넘겨버릴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사실이 오히려 두렵다.

요즘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긴또깡'으로 알려진 정치깡패 김두한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 사람의 인생에 극적인 모멘트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한국현대사의 얼룩을 밀가루로 덮어버리는 영웅적 미화일 뿐이다.

이 책을 대하는 지금 난 마치 대학 신입생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같은 느낌이다. 무수한 죽음들과 마주치며 두려워했고, 하루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 시절. 그렇지만 다행인 것은 지금이 2002년이라는 사실이고, 두려운 것은 삶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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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wasulemono > 징후적으로 읽어내는 할리우드, 드러나는 심연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한나래 시네마 10
슬라보예 지젝 / 한나래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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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할리우드의 정신분석]으로 되어 있다. 제목 자체에 이미 정신 분석의 중요한 용어 중 하나인 징후가 등장한데 이어 부제는 이 책의 목적을 간결하고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영화 서적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멋 모르고 이 책을 집어든 사람들이 꽤 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할리우드 그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할리우드는 정신분석 강의를 효과적으로, 그러니까 선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참고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할리우드 영화를 가장 비할리우드적으로 읽어 내는 영화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 중에는 영화와는 전혀 무관한 장도 있을 뿐 아니라 그 내용 자체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난해하다. 칸트의 형이상학, 인식론, 도덕론의 기본 바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자, 그리고 프로이트와 라깡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자는 아예 읽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이 책이 여러 모로 기만적이고 일탈적이긴 하지만 전혀 쓸모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지젝은 영화를 자신의 정신분석적 가르침의 효과적인 예시 정도로 이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채플린의 <시티라이트>나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삼부작에 대한 분석, 그리고 필름느와르에 대한 설명은 그만의 독보적인 경지를 잘 보여주는 탁견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창적이다.

라깡과 더불어 지젝은 현실을 구성하는 위치로서의 주체에 관심을 가지고 실재라는 무시무시한 공백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의미화된 메시지로서 징후를 상징적인 질서내로의 인입을 강조하지만 지젝은 이와는 반대로 징후 그 자체를 즐기는 비타협적인 태도로서의 윤리, 그러니까 칸트가 말하는 근본적인 악을 실천하는 행위야말로 실재의 심연을 건너 이데올로기의 존재태를 직시할 수 있는 태도라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라는 지젝의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는 할리우드 고전 필름느와르의 위상을 새삼 확증한다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의 표지는 히치콕의 <이창>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이 건너편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근심과 불안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는 장면인데, 이 장면이야말로 징후를 즐기는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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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wasulemono > 자네티 책 이후의 명저
영화란 무엇인가
토마스 소벅 외 / 거름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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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 관련 서적을 일견해보면 몇 가지의 유형 분류가 가능하다. 저자의 국적별 분류도 그 중 한 가지 방법이겠는데, 영화의 본질론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개론서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 종류가 의외로 적고, 그것도 대부분 외국 저자의 번역서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때 영화 개론서로 가장 유명한 책은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라는 책이었다. 영화 열풍이 불어닥쳤던 90년대 초반 너나 할 것 없이 한번쯤을 넘겨봤을 책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광풍이었다. 20세기부터 영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극장에 걸리고 주말이나 휴일이면 사람들은 영화 보기로 감동과 재미를 한 묶음으로 간편하게 챙기곤 했다. 그 흐름은 역사의 격변기라고 해서 달랐던 것은 아니다. 정국이 어수선할 시절 가투의 주무대였던 종로거리에는 영화를 보러 나온 사람들과 가투 참가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광풍의 내적 동력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세계사적 격변과 산업적 발전이 결합하며 생겨난 우연같은 필연이 아니었을까? VCR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인해 영화는 극장이라는 공간적 제약, 특정한 시간이라는 제약을 벗어나 마음만 먹으면 비디오 테이프로 알뜰하게 몇 번이고 챙겨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몇 번이고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영화에 대한 비평적 욕망을 증폭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진보적 운동의 정당성과 활동성이 쇠퇴되면서, 그동안 인간의 의식을 자본주의적 공세로 세뇌시키는 저급한 오락물이라는, 영화에 씌워진 오명이 벗겨졌다. 이념과 영화를 마치 상반된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그 의식은 지금으로 봐선 우스운 것이었으나 그 당시는 그것이 무시 못할 금제의 하나였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는 대학생들로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얻게 되었는데, 지금의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의 상당 부분은 적어도 그 시절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때로는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영화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 그 자체뿐만 아니라 관객의 감수성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를 겪게 된다. 소벅 부처의 <영화란 무엇인가>는 자네티의 책 이후 번역된 가장 훌륭한 영화 개론서이다. 자네티의 책이 영화사와 영화 기술에 대한 치밀하고 분석적인 해설에 치중하고 있다면, 소벅 부처의 이 책은 영화를 하나의 미학적 구성체로 보고, 영화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미학적 틀 내에서 영화를 조망하고 있다. 그리고 논의의 설득력이 더해져 영화 서적 특유의 지루함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영화 입문을 위한 스터디 교재로 사용한 바 있는데, 참가자들도 대체로 좋은 평가를 보였다. 영화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권쯤 책장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 꺼내보면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영웅>을 둘러싸고 이데올로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논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겠지만, 그 한편에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에게 영화는 현란한 스펙터클과 적당한 이야기가 골고루 반죽된 일회적인 볼거리이다. 영화는 영화 이외의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 그것은 또 하나의 편견이며, 관객들에게 만연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열렬한 옹호자가 다름 아닌 영화 관련 업자들이라는 사실을 한번쯤 상기해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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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wasulemono >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해...
한계전의 명시 읽기
한계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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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포스티노>는 이태리 망명 당시 파블로 네루다가 만나게 된 우체부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세계적인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아니라 그의 평범한 이웃에 불과한 시골 우체부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새롭게 시를 전유하는 기쁨을 안겨준다. 어느 날 사랑에 빠진 우체부는 네루다와의 대화를 통해서 짝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바치는 그의 진솔한 마음을 담은 편지가 바로 시에 다름 아니라는 네루다의 얘기를 듣고 놀란다. 그 순간 관객 역시 주인공의 내면에 이는 감정의 결을 따라 전해져 오는 진한 울림에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무릇 시란 그 무엇을 진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연서의 일종이라는 이 영화의 전언은 제도적 문학 교육에 익숙한 관객에게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한 편의 시에 부여되는 해석을 넘어 시 그 자체를 바라보는 가치관조차도 주체의 입장과 관심, 욕망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형식에 난해한 언어를 구사하는 시를 시의 본령에 올려놓고, 특정한 해석을 경유한 대표시만을 향수하기를 강요하는 문학 교육 풍토는 예전과 비교해 그리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그 풍토가 제도적 문학 교육의 현장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특정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의 표준적 생산 공정으로 존재한 학교의 역사적 특수성을 일단 고려해야겠지만, 이와 더불어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인은 교육 주체의 안일과 고답적 태도이다. 국어 교사의 강의안은 십년이 지나도 쉽게 바뀌지 않으며 십년 전의 김소월은 오늘의 김소월과 달라지지 않는다. 텍스트 바라보기가 열린 세계로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항상 닫힌 세계 속의 쳇바퀴돌기로 귀결되는 이와 같은 현상은 궁극적으로 학생들의 감수성을 특정한 테두리내로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이후 제한된 취향과 가치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문학 작품은 고립무원의 땅에서 생성되는 고결한 언어로 이해되며, 자본주의의 대량 문화 생산물에 대한 소비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와 몰취향적 선입견으로 인해 그의 감수성은 분열되고 파괴된다.

최근 들어 문학 교과서 상의 작품 선정 폭이 넓어진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학생들의 심미안, 감수성 계발에 대한 의지는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심미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학교를 벗어나 접하는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몰취향적인 억견에 사로잡힌 붕괴된 감수성의 소유자가 된다. 따라서 이제 시 읽기는 단순히 고상한 취미의 개인적인 만족이라는 차원을 넘어 대중문화가 넘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이 자율성을 지닌 비판적 자아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교양이 된다.

<한계전의 명시 읽기>는 제도권 문학 교육의 공허함과 기계성, 고답성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앤솔러지다. 진정 좋은 시는 읽는 이의 몫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만의 시를 갖기 위해서는 시를 바라보는 심미안의 계발이 필수적이며, 이런 욕구에 따라 우리는 명시 앤솔로지들을 접하게 된다. 이때 앤솔로지는 자기가 일굴 밭을 위한 분묘집합장으로서 기능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감수성에 개안을 가져올 꽃을 선별하여 자신만의 공간으로 모셔오는 것이다.

이번 앤솔로지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들과 그렇지 않은 시들이 함께 한다. 그리고 한 편 한 편의 시들에 대해 저자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깔고 그 시들에 대해 말한다. 그 말들은 대체로 시가 뿌려놓는 의미와 감성을 향해 다가가지만, 때로는 그 시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저자 자신, 그리고 그 말의 향연에 초대받은 청자인 독자를 함께 아우르는 삶의 지평을 향해 있기도 하다. 독자는 저자의 말에 자신의 말을 섞음으로써 말의 향연에 당당한 주체로 참여할 수 있다. 노신의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를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이 앤솔로지에 담긴 한 편 한 편의 시들을 매일 매일 읽는다면 하루 하루가 충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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