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있잖아. 누가 그러는데...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정송희 지음 / 새만화책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정송희의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리뷰를 쓸까말까 하는 생각에 내내 사로잡혔음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우선 작가는 나와 동년배다. 어설픈 세대공감론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동년배라는 것은 불운한 시대라면 불운한대로 손쉽다면 손쉬운 대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이 공감이 단순한 공감의 차원을 넘어선다는데 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을 종종 남의 이야기하듯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류처럼 그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를 빌린 나의 이야기, 그의 이야기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있잖아. 누가 그러는데"로 시작하지만 실은 자신의 이야기였던 뼈아픈, 지극히 개인적이라 더이상 개인적인 이야기로만 묻어둘 수 없는 사회적 이야기, 그것이 성(sex)의 이야기이다.

정송희의 때늦은 첫 작품집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모두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막 "가로막힘(blocked)", 2막 "이야기하기(telling)", 3막 "봄(seeing)"이 그것이다. 1막 가운데 첫 번째 단편이자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한 젊은 연인의 사랑과 접촉을 차단하게 만드는 과거의 경험에 대한 반추로 시작한다. 이제 막 몽우리지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들의 젖가슴을 더듬는 담임을 아무도, 그야말로 아무도 가로막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으나 어머니도 촌지를 가져다 건넬 뿐이었다. 내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을까. 믿음을, 구원의 순간을 외면당한 어린이에게 세상은 더이상 믿을 수  없는 것이 되며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존재들은 공모자가 된다.

그 순간 남자가 와락 껴안으며 말한다. "미안해." "왜 자기가 미안해? 자기가 남자 대표야?"라고 여자는 말하고, 이번엔 남자의  회상이 시작된다. 고3 무렵 놀러온 옆집 여자 아이의 여린 성기를 만지면서 그는 스스로에게 나는 '단지 만지기만 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가을이 오고, 남자 네는 이사하게 되고 그는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서울로 이사한다. 그때도 그는 끝내 어린 소녀에게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남기지 못했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여자 친구에게도 그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리고 늦게라도 그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하라고 교과서에서라면 그렇게 충고할 것이다.

내가 알기로 전세계적으로 근현대 들어 국가나 국가기구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 '진실과화해위원회' 형태의 기구를 만들어 과거사 진상규명을 시도한 나라들은 대략 30여 개국 미만으로 알고 있다. 물론, 학살의 경험이 있는 나라들에 비하자면 이 숫자도 적은 것은 아니고, 진상규명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측면에선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 가운데 정식 보고서를 채택할 수 있었던 나라는 다시 그 절반 정도로 떨어진다. 단지 진실을 고백할 뿐 그것만으로 더이상 처벌은 없을 것을 다짐하지만 실제로 묻힌 진실과 진실이 서로 화해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 숫자는 잘 보여준다. 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하도록 반대 세력들은 집요한 공작을 가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존재 기반을 뒤흔드는 일이므로, 앞서 고백한 자는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물적, 정신적 린치를 당하기 마련이다. 침묵의 공조... 민간인 학살에 대한 가해자들의 공모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여성을 상대로 한 남성 사회의 불문율이다.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 이 사내에게 돌을 던져라!" 어쩌면 성적으로 전복된 여성 예수가 출현한다면 선량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는 숱한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가련한(?) 한 명의 성폭력 사내에게 그리 말할 지도 모르겠다.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의 사내는 그 여자 친구에게는 상대의 고통을 이해한, 꽤 괜찮은 사내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짐승 같은 사내로 기억될 수도 있다. 정송희의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이 내 마음을 이리도 무겁게 내리누르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내 안에 너 있기에... 진실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말이다.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이나 제법 긴 3부작 "그땐 그게 뭔지 몰랐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한 여대생이 동아리 친구들이랑 MT를 갔다가 술에 취했고, 딱히 강간이라 말하기에도, 아니라고 말하기에도 어색한 정도의 섹스, 아니면 그땐 사랑했으나 하고나서 보니 사랑하지 않았더라는 식의 사랑을 볼모로 한 아름답거나 그렇지 않은 섹스, 그렇다고 명확한 강간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니, 혹여 그 점에 대해 오해는 말길 바란다. 어찌 되었든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봤고, 남의 이야기하듯 했으나 실제 피해자였거나 가해자였으며 혹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던, 어쩌면 그조차도 초월한 경험으로 승화시켜버린 이야기들이다. 그만큼 흔하게 들었고, 체험했던 이야기들이라 도리어 진부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제 이런 류의 이야기는 TV단막극들을 통해 접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가 문명 개화된 것이란 뜻인가? 모두가 남의 이야기하듯 하여 도리어 배제시켜 버린 우리들의 체험이 아니었던가.

위의 작품들이 지닌 문제의식에 무거움에 비해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 혹은 이야기 구조는 다소 수동적이고, 식물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 묘한 느낌들을 받게 되는 이유는 작가 자신이 이야기를 결말 짓는 형태로 이야기의 막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이 작품들의 느낌과 리얼리티를 살리기도 한다. 그것이 미학적으로는 아쉽지 않은 데도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기에 오래도록 곱씹게 만든다. 1막과 3막의 이야기들이 무겁다면, 2막 이야기하기에 수록된 일련의 짤막한 꽁트들은 작가가 생각하는 "신체적 접촉"에 대한 일종의 해법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경쾌한 수다의 성격을 띤다. 아마도 2막에 있어 작가의 문제의식을 드러내주는 인용이라 생각해 옮겨 본다.

"인간에게는 어두운 면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낙관론만을 어린이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문화적인 관습이 되었다" - 브루노 베텔하임

"유년의 틈"의 첫 대목은 아이가 길에서 그만 쉬야를 한 대목에서 시작한다. 두 명의 여성이 창 밖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며 과거로 틈입해 들어간다. "애엄마한테 빨래감이 또 생겼네"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다른 한 친구가 말한다. "얘가 더 창피하지." 전학와 서로 친구가 된 두 사람은 과거 오줌을 지린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로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가 풀리고,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2막에 실린 두 번째 단편인 "풍선"의 구조 역시 "유년의 틈"과 흡사한데, 한 남자가 어린 시절 아버지 옷장에서 콘돔을 풍선인 줄 알고 불려다가 어머니에게 호된 꾸지람을 경험한다. 그때 고모는 긍정적으로 아이에게 콘돔이라고 알려주고, 아이가 불어달라고 하자 불어주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이를 야단칠 뿐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이제 그 아이가 성장해 공중화장실에서 콘돔을 사려다가 어린이가 들어오자 놀라서 그만 자판기에서 나온 콘돔을 자기것이 아닌 양 모르는 척 빠져 나온다. 그런데 아이는 친절하게도 콘돔을 주워 아저씨에게 전해주려고 밖까지 쫓아나온다. 아이 덕분에 남자는 창피해 한다. 그 이외에도 작품 "인절미"에서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여성에 대해 과감하게 "맛있다"라고 말하기도 하며, "누드모델"에서는 살찐 외모를 긍정하는 것이 뭐 어때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 작품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어린 시절 일찍 생리를 시작한 소녀가 성장하여 어른이 된 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팬티 빠는 아침"에서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당당하고, 건강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긍정이 지닌 힘에 대해 작가는 섣부른 낙관도, 비관도 하지 말자고 하는 듯 보인다. 물론 성과 관련한 이야기들은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간단하지 않으며 간단하지 않은 만큼 소박하게 긍정하라고 말하는 것은 손쉬운 결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무거움과 진지함 혹은 신성한 차원으로까지 숭상하려는 바로 그 태도,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적 구분 때문에 우리들에게 성은 언제나 짙은 어둠 속에 가려진 채 더욱 힘든 해법을 강요받고 있는지 모른다. 좀 더 쉽고, 가볍게 긍정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성은 다른 얼굴로 다가오지 않을까.

* 그나저나 작가 정송희 첫 데뷔(1999년) 이래 작품 발표 연도들을 보니 대개는 1999년에서 2000년 사이에 집중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첫 작품집이 2004년에야 나온 것으로 보아 그동안 작품 활동을 거의 안한 듯 하여 최근 작품의 경향이나 그림체의 변화를 짐작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근에 접한 소식에 따르면 장편작품집을 준비한다고 하는데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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