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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평점 :
본 리뷰는 네이버 카페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 받은 후 솔직하게 작성한 것입니다.

조정래 작가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삶과 죽음, 그리고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짚어볼 수 있을 것 같아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작가님께서 직접 유럽 취재를 다녀오셔서 그것을 주인공들의 여행으로 묘사해냈다는 점 또한 취향 저격이라 기대되었습니다.
여전히 창작 활동을 하시는 작가님께 응원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의미있게 읽어 보았습니다.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감정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고 환경은 달라지기 때문에 한때 간절했던 기억도 결국에는 사그라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정래 작가님의 이 책을 읽으며 오히려 반대의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견디는 동안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는지가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이재이는 대학 시절 시 동아리 글밭에 가입해 시를 쓴 철학도입니다.
윤소인은 글밭의 시화전에 참여해 이재이의 시에 그림을 그린 여학생입니다.
이 둘은 한 편의 시와 한 장의 그림으로 이어진 인연입니다.
여기에 작가님께서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꺼내 놓습니다.
한 편의 시와 한 장의 그림으로 시작된 사랑을 소설에 담기 위해 작가님께서는 고흐의 자취를 따라 프랑스 파리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취재 여행까지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팔순을 넘긴 작가님께서 소설가로서의 직업병을 지독하게 겪으면서도 굳이 먼 길을 택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고흐 화집이나 관련서들의 간접 취재 못지않게 현장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던 지점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부분이 소설 쓰는 일에 대한 작가님의 태도를 보여주는 지점이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답사가 책 속의 주인공들의 여행으로 잘 표현되어 책 전체를 보다 풍성하게 채워내게 됩니다.

이 작품 속의 사랑은 흔히 로맨스 소설에서 만나는 사랑과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재이가 다시 마주한 윤소인은 과거의 청초한 모습 그대로가 아닙니다.
가족의 몰락과 막대한 빚, 생계를 위해 밤낮없이 일했던 시간 속에서 지쳐버린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났는데 기뻐하기보다 먼저 안타까움과 걱정이 밀려오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 지점에서 사랑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사람의 고통을 내가 함께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 때문에 이 작품 속 사랑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랑을 아름다운 감정으로만 그리지 않고 책임과 선택의 문제로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재이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삶을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윤소인의 빚을 해결하고 가족의 생계를 돕는 문제, 치료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문제에까지 자신의 미래를 걸고 나섭니다.
이 과정에서 형과의 밀약이라는 장치가 등장하면서 사랑은 개인적인 감정에서 현실적인 선택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립 가운데 하나는 사랑과 돈입니다.
윤소인을 바라보는 이재이 가족의 태도에는 돈이 사람의 가치까지 결정할 수 있다는 사고가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경제적 능력을 인간의 가치와 동일시하는 태도입니다.
반면 이재이는 그 질서에 순순히 편입되지 않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던 인물답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가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사랑을 통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에 대해 묻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을 평가하는 데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습니다.
직업, 연봉, 집, 학벌, 자산, 사회적 지위 같은 숫자와 조건들이 사람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처럼 사용됩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런 계산법을 거부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조건을 합산한 뒤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사람 자체를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재이의 선택은 단순히 가난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의 순서에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돈이 많으면 좋은 사람이고 돈이 없으면 부족한 사람이라는 단순한 세계관에 맞서 한 사람의 존엄은 결코 숫자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랑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작가님 특유의 장점도 바로 이런 부분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작품은 개인의 삶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남겨두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선택 뒤에 있는 가족과 사회는 물론이고 경제적 현실, 나아가 시대의 가치관을 함께 바라보게 합니다.
이 작품 역시 사랑 이야기라는 껍질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보면 인간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과 돈의 위력이 보입니다.
더불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마주하게도 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로맨스 소설과는 결이 다릅니다.
일반적인 로맨스가 두 사람의 감정 변화에 집중한다면 이 작품은 두 사람이 사랑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세계 전체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만 행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욕망과 경제적 조건, 과거의 상처와 현실적인 책임까지 함께 넘어야 합니다.
사랑이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하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랑의 무게가 더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사랑은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늘 좋은 일만 생기지는 않습니다.
병이 찾아오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현실이 삶을 흔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행복보다 오히려 고통 속에서 더 정확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감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잠시 피어나는 서리꽃은 따뜻한 계절의 꽃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 피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차가운 환경에서도 피어나기 때문에 더욱 눈길을 끕니다.
이재이와 윤소인의 사랑 역시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상황에서 시작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가장 차갑고 힘겨운 순간에 다시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랑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라는 것보다 그 사람이 힘겨울 때도 그 사람의 삶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가에 보다 집중하게 됩니다.
어쩌면 사랑의 깊이는 함께 웃었던 시간보다 함께 견뎌낸 시간으로 판단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은 오래전 마음에 남겨두었던 사랑이 다시 찾아오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이 사랑을 위해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느껴졌습니다.
특히 화려한 사랑의 장면보다 상대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는 이재이의 태도가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오랜 연애의 끝에서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분, 조건과 현실 때문에 사랑을 망설여본 분, 돈과 성공이 인간의 행복을 정말 보장하는지 의문을 품어본 분께 추천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단순한 설렘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끝까지 바라보는 마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이 작품에서 깊은 울림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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