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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들 - 클래식 무대 뒤, 오케스트라 악보를 둘러싼 세계
김보람 지음 / 사농공상 / 2026년 7월
평점 :
본 리뷰는 네이버 카페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 받은 후 솔직하게 작성한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성공적인 연주를 위해 뒤에서 묵묵히 악보를 준비하는 악보위원이 쓴 책이라는 것 자체가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관련 지식의 깊이가 얉은 분야이지만 그것에 대한 나름의 애정이 있어 더 깊이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때에는 모르는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끓어 오르게 됩니다.
이 책 또한 바로 저에게는 바로 그런 지점에 있는 책이었습니다.
악보위원이라는 일반인들에게는 결코 익숙하지 않은 직업을 가진 저자가 수천 회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준비하며 느낀 점은 물론이고, 악보 선택과 수정 과정에 있어 흥미로운 점들을 짚어내 줄 것을 기대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우선 악보위원이라는 직업부터 명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라는 것이 정말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그속에는 악보라는 나름의 신호등에 의한 시스템에 의해 운영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악보위원은 단순히 악보를 정리하거나 나누어주는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케스트라처럼 대규모 연주에 필요한 모든 악보를 수집, 고증, 수정, 편집, 관리하는 총괄 전문가입니다.
지휘자 및 연주자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공연의 음악적 완성도와 학술적 정확성을 책임지는 무대 뒤의 마스터라는 느낌을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악보에 적힌 음표는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아주 철학적인 문장을 남깁니다.
지휘자 나름의 해석과 탁월한 기량을 지닌 연주자의 손과 숨으로 음표를 깨우고 무대 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정성이 닿아야 비로소 아름다운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지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 과정에 있어 저자는 악보위원으로 관객에게 전하는 음악을 준비하는 첫 단추, 공연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거대한 책임감과 팽팽한 긴장감으로 살아갑니다.
셰프가 좋은 재료를 고르듯 어떤 악보를 선택할지부터가 악보위원의 판단과 능력을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결국 오케스트라를 통해 전해지는 음악 역시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를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 악보위원은 마치 생명의 첫 창조자처럼 느껴졌습니다.
악보는 가만히 있을 때에는 그저 종의 위의 기호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휘자와 연주자 이전에 그 모든 바탕을 단단히 받치는 악보위원의 손길이 닿아야만 침묵을 깨고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보위원 자체가 생소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그 뿌리를 찾아가 보는 지점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전문적으로 악보를 관리하는 악보위원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부분 작곡가나 연주자가 직접 악보를 챙겼다고 합니다.
그러다 19세기부터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고 연주자 수가 늘고 악기가 복잡해지면서 악보와 연주의 질서를 잡는 악보 전문 담당자가 필요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탄생한 악보위원은 오케스트라의 필수 인력이 되었습니다.
악보위원은 작곡가의 원본 악보를 함께 연구하고 판본 해석까지 고민하는 협력자가 되었고 음악 학자나 출판사 에디터와의 교류도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악보위원들의 국제협회도 있다고 합니다.
클래식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저에게도 같은 곡을 연주하는 것을 듣더라도 오케스트라나 지휘자의 특성에 따라 전체 음악의 길이나 특정 음을 연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단순히 지휘자나 특정 연주자 독단적인 해석이 그런 상황을 연출시키거나 미스 노트나 실수는 아닌가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수십 수백 명이 함께하는 오케스트라 연주이고, 나름의 전통과 자부심이 있는 집단이기 때문에 악보의 작은 것 하나까지 음악감독과 지휘자, 주요 연주자와 악보위원이 함께 오래도록 고민한 결과일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를 아주 흥미롭게 보여주는 지점이 있습니다.
서울시향과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한 지휘자 여섯명의 보사인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악보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현악기에서 활을 아래로 켜 소리를 내는 다운 보는 자연스럽게 무게감 있는 소리가 나고, 활을 위로 올리면서 켜는 업 보는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서정적인 소리를 내게 합니다.
활을 한번 그어 여러 음을 연주하는 슬러 표기도 함께 있는데 이는 활을 언제 바꿔야 하고 어떤 방향으로 연주해야 하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시켜 줍니다.
이 책에 실린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오스모 벤스케, 티에리 피셔, 마르쿠스 슈텐츠, 정명훈, 얍판 츠베덴의 악보를 보면 그들의 특징이 고스란히 보여집니다.
단순히 악보만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QR 코드가 첨부되어 있어 해당 음악을 들어보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들리고, 아는 만큼 더 깊이 보이는 것이 예술이고 음악이기에 위의 작곡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나 클래식에 더 많은 애정이 있으신 분들은 이 부분이 훨씬 가치있게 느껴지실 것 같습니다.
에센바흐는 피아니스트 출신 특유의 섬세함과 감성이 느껴지고, 벤스케는 북유럽 특유의 절제미가 느껴집니다.
특히 정명훈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유도하고 기교보다는 큰 흐름과 호흡을 강조하는 것이 자연스레 느껴집니다.
이런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 저자의 배려는 클래식 초보인 저에게도 압도적인 만족감을 선사했습니다.
이 책은 악보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며 우리가 악보위원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볼 때 놓치고 있지만 중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보이지 않는 과정과 완성된 순간보다 그 순간을 위해 흘려보낸 긴 시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평소 클래식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음악과 악보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의미를 전해줄 것이고, 클래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호기심과 신선함이 가득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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