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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피 -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장편소설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지음, 최혜정 옮김 / 슬로우리드 / 2026년 8월
평점 :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류학 박사 출신의 멕시코인으로 6년간의 한국 사회 관찰 끝에 완성해낸 소설입니다.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은밀한 우리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21세기형 섹슈얼리티 소설이라는 장르가 주는 흥미로움과 의미가 공존하는 책이라 흥미롭게 읽어 보았습니다.

주인공 지호는 타인과의 상처받는 관계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모든 욕망을 투사한 AI 리얼돌 ‘성미’를 연성해냅니다.
상처받지 않는 일방적인 통제, 나만을 바라보는 완벽하게 가공된 대상이 바로 성미입니다.
그가 성미라는 기계 안에 갇혀 들어갈수록, 우리에게는 기묘한 안타까움과 서늘함으로 느껴집니다.
거절당할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격리하고 진짜 사람이 아닌 기계로 구현된 환상에 매몰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비춰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 소설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첨단 기술이 가득한 리얼돌과 우리의 무속 신앙이 함께 소재로 쓰인다는 점이었습니다.
위중한 아버지의 목숨을 둘러싸고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는 자를 지목하는 무당의 경고는 저자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더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읽다보면 이 소설은 단순히 심리 스릴러를 넘어 한 편의 비극적인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읽혔습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오랫동안 인간이 고민해 왔던 질문을 다시 한번 하게 만듭니다.
지호는 성미에게 '내 모든 영혼을 걸고 사랑해'라고 고백하지만, 성미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지호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되풀이하는 기계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관계와 소통, 더 나아가 사랑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호가 선택한 성미는 자신의 욕망이 반사된 거울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이는 사랑이 아니라 완벽하게 가공된 자아의 한 조각일지도 모릅니다.
통제할 수 있는 대상과의 관계는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사랑을 한다는 것은 거절과 상처의 가능성까지 감내해야 한다는 점 또한 깨닫게 됩니다.

제목인 박피는 성형외과적 시술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완벽함이라는 이름 아래 피부 위에 덧칠해온 껍데기들을 하나씩 벗겨내는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형 산업이 팽창하고, AI와 기계가 인간의 외로움까지 치유하게 해주는 날이 오겠지만,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박피처럼 진짜로 매끄러운 피부를 만들어 줄 것인가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특히 멕시코 출신 인류학자인 저자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서늘한 통찰과 함께 연민이 깔려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완벽한 겉모습을 요구받고, 그 과도한 압박 속에서 정작 타인과 온전히 연결되지 못한 채 고립되어 가는 우리의 단면이 이 책에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외부인의 눈으로 보았기에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 이 결핍의 풍경은 이 책을 읽는 우리들에게 더 깊은 울림과 메시지를 남겨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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