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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필사 노트
박경리 지음, 유선경 엮음 / 다산초당 / 2026년 7월
평점 :

박경리의 토지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수많은 인물들이 모두 입체적일 뿐 아니라, 풍부한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과 비유를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삶을 계속 이어나가는 힘을 보여주기에 현대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런 책의 좋은 구절을 다시 읽고 필사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 또한 그런 의미있는 시간을 기대하며 이 책을 읽으며 필사해 보았습니다.

이 글을 엮은이는 토지를 '제아무리 천재적인 작가라 할지라도 영원히 다시 나올 수 없는 대하소설'이라고 극찬합니다.
그런 토지 필사 노트를 펴내면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 필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위로와 지침을 건내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필사에 편하게끔 완전히 펼쳐지는 제본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보다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 또한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디서든 마음으로 지켜주는 눈이 있다는 것은 삶에의 의지가 된다. 시장이란 언제나 풍성한 곳이지만 겨울을 겪고 무르익어가는 봄날의 장거리란 태양빛과 더불어 신선한 생명영에의 향기다. 언제나 다름없는 소음이 장거리에 가득차 있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앞뒤 맥락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평생 서로를 가슴에 묻은 채 떨어져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용이와 월선의 깊고 숭고한 정신적 유대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분과 현실의 벽 때문에 함께할 수는 없지만, 멀리서나마 묵묵히 응원하고 염려해 주는 마음의 눈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두 사람은 혹독한 시련을 버텨낼 삶의 동력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독은 곧이어 활기 넘치는 봄날의 시장 풍경으로 연결됩니다.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시장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음과 따스한 햇살은 개인의 슬픔과 한을 품어 안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거대한 민중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다 보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면서 단단하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혹독한 운명의 겨울을 지나더라도 왜 삶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갈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철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디서든 마음으로 지켜주는 눈은 타인이 나에게 보내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긍정이자 존재론적 지지일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홀로 서는 독립적인 존재를 완벽하다고 믿지만, 사실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채워주는 것은 나를 가만히 바라봐 주는 누군가의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곁에 둘 수 없고 소유할 수 없을지라도 내가 누군가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거친 세상에서 나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는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실존적 고독 속에서도 그 따스한 시선이 있기에 우리는 비로소 삶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게 됩니다.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우리에게 삶의 의지를 불러 일으키는 이 구절이 저에게는 유난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겨울 햇볕과도 같이, 쏟아지는 폭설과도 같이, 쩡! 하고 굉음을 지르며 스스로 몸을 가르는 빙하와도 같이, 그리고 동천에 얼어붙은 달과도 같이, 물론 봄의 환희와 여름의 정열도 있지만, 어디 사람의 삶만이 그러했겠는가, 삼라만상, 억조창생 생명 있는 것은 그 모두가 시간과 자리, 혹은 공간이라는 엄연한 십자가 밑에서 만나고 이별하며 환희와 비애를 밟고 지나가는 것이다. 욕망의 완성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불행인 동시에 축복이다. 종말이 없는 염원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토지 완결이 되는 20권의 마지막 즈음에 등장합니다.
해방 직전의 시간을 다루는데,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지만 아직 해방은 오지 않은 시점입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과 관계를 붙잡고 살아가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시간이 흘러주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남은 것은 욕망의 완성은 없다는 문장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면 비로소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원하는 사람을 만나면, 원하는 것을 얻으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원하는 하나를 이루고나면 또 다른 하나가 다시 생기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원하고, 욕망하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애써도 욕망에는 끝이 없으니 인간이 마치 불행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를 동시에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욕망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마음속에 내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기다릴 것도, 꿈꿀 것도 없습니다.
반대로 무엇인가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아직 앞으로 나아갈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절이 저에게 주는 울림과 깨달음은 강력했습니다.
사실 토지에서 어느 문장 하나, 어느 구절 하나만 가져와도 무수히 많은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토지가 대단한 작품입니다.
그런 토지를 이렇게 다시 돌이켜 보며, 또 해당되는 책의 페이지를 펼쳐보며 의미있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책과 함께 토지를 더 깊이 이해하고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 리뷰는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 이벤트를 통해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 받은 후 솔직하게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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