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남자 시코쿠 문학과지성 시인선 R 3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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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는 서사의 형태를 띠는 시가 많이 수록되어 시의 등장인물이나 설정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시 간의 관계성을 찾거나 공통점을 발견하며 읽는 것이 이 시집을 감상하는데 적절한 접근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읽다보면 이 시집에서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되다 만 것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두드러져 보인다.

되다 만 것’, 어딘가 불완전하고 엉성하게 유지되는 상태가 이 시에서는 그 내용과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우선 시의 내용 측면에서 시의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주변 상황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인물은 통념상 일반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여장남자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을 보여주거나(여장남자 시코쿠, 대야미의 소녀-황야의 트랜스젠더),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고(그 여자의 장례식, 리타의 습관), 과도하게 자기중심적인 인물(Cheshire Cat’s Psycho Boots_8th sauce-앨리스 부인의 증세,) 등 어딘가 과장되거나 결여된 인물들이 많다. 특히 제목에서도 사용된 여장남자트랜스젠더라고 지칭되는 인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들의 노력이 과연 그러한 정체성 형성으로 이어졌는지는 속단할 수 없다. 그 노력의 예로 쓰기를 꼽을 수 있다. ‘쓰기는 시집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는 행위지만 시의 등장인물은 쓰기에 성공하지 못한다. 찢고 다시 쓸 정도로 쓰기에 대한 의지는 강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쓰기의 유의미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공책에 쓰고 엽서에 쓰지만 그 글은 어딘가로 전해지거나 다른 이에 의해 읽히는 모습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쓰기의 실패는 원 볼 나싱3한 소년이 철로 변에 누워 기역 자로 죽어간다에서 암시되고 있다. 원고지를 연상시키는 철로 변에서 소년은 기역 자, 즉 문자를 의미하는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정체성을 향한 노력으로서의 쓰기가 좌절됨이 나타나고 있고, 결국 등장인물들은 원하는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되다 만 것은 또한 시의 형태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행이나 연 구분에 관계없이 의미가 형성되기도 하고 의미가 끊어지기도 한다. 의미 단위라고 예상한 것이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구절은 의미 파악이 어렵다. 심지어는 해당 서술이 무엇 혹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각각의 구절이 아니라 이웃 구절, 이웃 시와 함께 읽을 때는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온전한 의미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구절과의 관계나 다른 시와의 관계 속에 그 의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101쪽에 있는 메리제인 요코하마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 시는 한 행으로 이루어진 연을 앞뒤의 연과 연결지어 해석할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 ‘메리제인, 너는 걸었지메리제인, 말했지와 같은 하나의 행을 전후에 위치한 연의 서술어구로 보았을 때 각 연의 의미를 이해할 여지가 생겨난다. 행과 연이 의미구분에 의해 나눠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주변 구절에게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각 시의 내용뿐만 아니라 시의 구조에 이르는 영역에서 작가는 되다 만 것’, 불완전함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완전함이 결국 다른 시구와 혹은 다른 시와 얽혀 읽어질 때 하나의 주제로 나타난다는 점은 불완전함의 수용(극복이 아닌)은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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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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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은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이 왜 그렇게 맘에 들었고 기분 좋게 읽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를 읽는 즐거움에 대해 먼저 서술해야 할 것 같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의 경우에는, 시에 공감하는 순간과 시를 음미하는 순간에 시를 읽는 즐거움을 느낀다. 전자는 시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을 때 찾아오는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이 나타나는 상황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다. 익숙한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과 인지하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하는 것. 어느 쪽이든 시인의 예리한 관찰력과 표현력에 감탄하게 되며 아 맞다 그랬지.’ 혹은 아 정말 그러네.’하고 시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상투적인 표현에 닳아버린 감정이나 상황도 새삼스럽게 느껴지고 그냥 지나치던 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순간을 표현하는 방식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루뭉술하던 상황이 분명해지고 나의 감각과 경험의 지평이 한 걸음씩 늘어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 세상을 더 풍부하게 피부로 느끼며 살게 되는 것만 같다. 우리는 매일매일에는 그런 시가 많았던 것이 이 시집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이다. 나의 할머니를 보면 바람의 대패질로 모든 것이 얇아졌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 구절을 읽으면 나의 할머니가 떠오르고, 세월이 흘러 주름이 지고 가늘어진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이 들어 살이 찐다고도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세월이 가져다주는 쇠함이 있다는 것을 갑자기, 새롭게 깨닫는 것이다. 사실 알고 있던 것인데 알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을 인지하게 하는 것이요, 그것이 시를 읽는 하나의 즐거움인 셈이다.

그리고 이 시집이 읽는 데 부담이 없다는 것이 또한 마음에 드는 이유였다. 시를 읽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답답하고 스트레스로 느껴질 때가 있는데 희한하게도 우리는 매일매일은 읽고도 모르겠다는 사실이 그리 답답한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시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 말고도 이 시집에 담긴 시를 읽어내는 방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각과 후각 등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시어들은 시의 내용과 관련 없이 그냥 읽는 동안 시어와 시구 자체에서 즐거움을 준다. 시를 소리 내어 읽든 혹은 가만히 속으로 읽든 입안에서 맴도는 말의 느낌 자체가 놀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를 읽으며 어떠한 의미를 형성하지 않고 시의 언어가 주는 이미지를 상상하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비록 낯선 언어로 나타나 있을 때도 있고, 보통의 맥락과 다르게 쓰인 말도 있다. 하지만 생경함은 소리와 이미지의 유희를 체험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맘에 들었던 물속에서를 예로 들자면, 어떠한 상황을 물속에 있는 것으로 비유하며 묘사하는데 결국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이라는 시구를 통해 마치 내가 물속에서 시에 나타난 순서대로 생각하고 감각하는 것처럼 만든다. 이것이 어떤 상황을 나타내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물속에서 내가 물속에 있는 것을 잊을 정도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 생각도 마치 물처럼 흘러 들어와 퍼지고 흘러 나가는 이미지를 느끼는 것으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매일매일에는 연과 행의 배치를 통해 특정한 형태를 만드는 시도가 여럿 나타나는데, 이 형태가 시어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고 의미를 어떻게 강화하는지를 고민해보는 것도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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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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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는 모든 것이 파괴된 이후의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 계속 길을 걷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 속에는 종말이 다가온 세상의 많은 인간 군상의 모습이 드러난다. 먹을 것이 없어 아기를 잡아 먹고, 사람을 가둬 둔 채 팔다리를  잘라 먹는 인간들, 소년들을 노리개로 사용하는 사람들처럼 인간성과 도덕을 잃어버린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에 비해 약하고 힘이 없는 주인공 부자(父子)는 다른 사람들을 피하려 무던히 애를 쓴다. 버섯조차도 자라기 힘든 환경 속에서 인간들은 거의 종말에 다다른 모습을 보이고 남자도 죽음을 맞이하지만, ‘소년은 새로운 일행을 만나며 책이 끝난다

일반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작품과는 달리 왜 세상이 멸망했는지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루는 이야기들은 대개 그 원인이 존재하고 그걸 해결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 원인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핵전쟁, 질병 혹은 좀비 등 여러가지가 세상이 멸망하는 원인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불길에 대한 묘사만 나타날 뿐 더 자세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 이유는 멸망의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속에서 중요한 것은 멸망 이후, 세상이 끝난 후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 한 부자의 여정을 쫓아가며 모든 것이 재로 변한 후 보여주는 각기 다른 인간 군상들을 목격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위에 서술했듯, 우리가 보기에 끔찍한 것이 많다. 납치, 식인, 살인, 자살 등 처참하다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남자와 소년은 살아남고자 갖은 애를 쓰며 길을 걷는다.

작품 속에서 소년의 엄마는 남자의 회상 속에서만 등장한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부터 멸망한 세상에 절망한 모습까지 회상을 통해 보여준다. 남자와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 여자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한 아이 엄마로서 그녀는 앞으로 고통만이 닥쳐올 세상에 아이가 살게 되었다는 것에 괴로워하며, 한 인간으로서 그 예정된 고통을 견디기 보다는 피하고자 한다. 그녀의 최후가 분명히 묘사된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아이의 곁을 떠나 생을 끝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처절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부자(父子)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누군가는 그녀의 정신력이 약하다고, 삶을 그렇게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비난 내지는 비판하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그녀를 비롯한 생존자들이 겪을 고통은 굶주림, 질병과 같은 물리적 고통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무언가, ‘내일에 대한 극도의 불안 등 다양한 종류의, 상당한 정도의 고통을 포함할 것이다. 그런데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고서 겨우 그 정도의 고통도 견디지 못하느냐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자신이 그와 유사한 일을 겪었을지라도 상대방이 느끼는 고통과 아픔을 자신의 입장에서 재단하고 그것을 근거로 고통의 강도를 판단하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무리 정신적으로 구석에 몰린 상황이라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생각될지라도, 그녀를 그 상황까지 몰고 간 환경과 이유를 한번쯤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는, 그녀가 생을 포기한 것이 포기가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작품 속에도 그녀뿐만 아니라 꽤 여러 사람들이 자살한 모습이 보인다. 그녀처럼 다가올 고통에 생을 끝냈을 수도 있고, 견디다 못해 삶을 끝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왜 살아 남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산다는 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기에, 그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여자와 달리 남자와 소년은 삶을 이어간다. 때로는 그들도 삶을 포기하자는 유혹에 넘어가고 싶지만 유혹을 뿌리치고 살아간다. 고된 삶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름의 도덕과 규범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아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좋은 사람인지 묻고, 아버지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네가 모든 일을 걱정하는 존재인 것처럼 군다는 남자의 말에 소년이 그렇다고요, 제가 그런 존재라고요.’[1]라는 부분에서 마치 자신의 존재 이유가 거기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마땅히 보이지 않고, 그러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의심된다. 그러한 의심은 삶에 대한 회의로 이어져 삶을 멈추고자 하는 맘이 들게 할 것이다. 처음에는 소년의 이러한 발언이 구원이나 희망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이 삶의 희망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자체를 묘사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했고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삶에서 중요한 이유는 정체성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덕과 금기가 무너진 세상에서 좋음이라는 것은 희미한 가치가 되었다. 소년은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확인 받고 싶어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좋음자체의 의미가 달라지는 세상에서 그의 정체성은 위태로워 보인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사라진 세상의 도덕과 규범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과거 기준의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가치로운 것일까? 기존 도덕과 규범에 대한 의심은 옛 문명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장소였던 피난처에서 강하게 생겨났다. 전에 이미 코카콜라를 두고 반가워 하는 남자와 처음에는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아들이 대조되는 장면에서도 드러났다. 옛 세상을 경험하고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남자는 옛 세상은 이야기로만 전해 들은 아들에게 외계인과 같다는 것이다. 이 모습이 피난처에서 변주된다. 깨끗하게 씻고, 식탁을 정갈하게 차려서, 아들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한다. 크래커에 버터를 바르고, 커피에 찍어 먹는다. 아버지에게는 당연하고 돌아가고 싶은 일상이지만, 아들에게는 낯설고 어리둥절한 과정이다. 소년에게는 잿더미가 된 숲에서 말라 비틀어진 낟알이 익숙하다. 이런 소년에게 아버지가 전해준 옛 세상의 이야기와 윤리는 의아하지만 자신의 전부다. 자신이 아는 것은 재투성이 세상과 아버지의 이야기 밖에 없기 때문이다. 책 속의 세상에서 우리의 윤리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물리적으로 도덕이 가져다 주는 이익은 규범을 버리는 것이 주는 이익보다 적기 때문이다. 소년에게도 그리 쓸모있는 지식은 아닐 수 있다. 사실 소년도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좋은 사람은 소년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책의 끝에 이르러 소년의 아버지는 죽고, 소년은 새로운 일행을 쫓아가는 것은 희망차 보인다. 혼자가 된 아이가 따듯한 이웃의 도움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 설명하자면 힘이 약한 아이를 먹거나 유린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세상에서, 새로운 일행에게 소년 또래의 아이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이 그 일행이 안전한 일행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일행의 말이 모두 사실인지 알 수 없다. 책에는 일행 중 한 여자만이 등장하고 소년이 다른 아이들이 봤다는 묘사는 분명치 않다. 과장해서 아이를 먹기 위해 데리고 다니는 것일 수도 있다. 희망차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많은 결말이다. 그러나 소년이 처한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죽은 아버지 곁에 머물며 죽어가는 것과, 확신할 수는 없지만 희망이 어른거리는 길 사이에서 소년은 흐릿한 희망을 선택한 것이다. 잘 모르고 알 수도 없지만, 흐릿한 희망에 자신을 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독자들의 공감을 일으킬 만하며, 어찌 보면 사람들이 일상에서 하는 많은 선택의 성격과도 일치한다. 그렇기에 작은 희망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소년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모든 소설은 허구이다. 그러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허구이다.[2]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의 종말이라는 허구를 사용했을까? 사실 세상의 종말을 하나의 은유처럼 본다면 이 책은 우리 삶이 이미 세상의 종말과 같이 우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 어느 정도 책을 읽는 관점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우화라고 보자. 그 관점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기에,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하자면, 알 수 없다는 것이 답이다. 책 속에 명시되어 있지도 않고 누가 알려줄 수도 없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그런 의미를 모른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큰 상처를 입어도 삶을 이어지고 늘 선택의 순간은 찾아온다. 하지만 여러 선택지를 놓고 우위를 차지하기는 어렵다. 대게 선택지를 주는 이는 세상이거나 나보다 어느 면에서는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는 어쨌든 최선을 다해 좀 더 나아 보이는 것을 선택한다. 그 다음에 다가올 일을 모르는 채로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기도 한다. 책의 결말이 희망 차 보이는 것은 우리가 소년의 선택의 결과가 희망이길 바라기 때문인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뒤에 이어질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자신과 닮은 소년이 행복하길 바라며 자신 역시 행복하길 바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좋은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에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은 소년과 다르지 않다. 세상이 좋다고 하기에 좋은 것을 추구하고, 그 기준을 안으로 들여와 마치 내 것인 양 사용한다. 외부에서 주입된 생각은 쉽게 자신의 가치관이나 정체성이 된다. 하지만 이를 의심하기란 쉽지 않다. 이를 대체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끝은 쉽게 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의심과 불안을 낳는다. 그렇기에 생각조차 하려 않지만, 이 책은 소년을 보여주며 언젠가는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넌지시 유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작가는 책 속에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지도 않고 떠오르게 해서 독자가 고민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다시, 작가가 세상이 멸망한 원인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이유를 살펴보자면, 특수한 환경 설정이 만들어 내는 거리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책 속의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고 독자는 이들을 목격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들이 독자들이나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멸망의 원인을 지움으로써, 어떤 특수한 재난 상황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상황은 특별하지 않게 되고 보다 쉽게 우리의 일상과 비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살아가는 것은 마치 세상이 멸망하고 난 다음처럼 고되지만, 삶을 어떻게 하든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에게 묻게 만든다, 이렇게 고된 세상에 왜 살아가려 애쓰는지. 사실 아직 그 답을 모르겠지만 그 의문을 만들어 준 것이 이 책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1] 코맥 매카시, 로드, 2008, 문학 동네, p. 293

[2] 이승우, 생의 이면, 2016, 문이당, 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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