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신기루만 빼고는 광활하게 펼쳐진 황량한 언덕들이 신기루의 무게에 눌린 채 소리없이 몸을 떨며 하늘을 향해 겹겹이 솟아올랐고, 이글거리는 오후의 햇살이 창백한 황색 능선의 윤곽을 흐릿하게 지우고 있었다. 유일하게 분간해낼 수 있는 것은 그 능선들을 가로지르며 구불구불 제멋대로 이어지는 희미한 경계선, 그리고 대지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메마른 가시덤불과 돌멩이들의 가느다란 그림자들 뿐이었다. 이런 것들 이외에는 도대체 아무것도 없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건조한 네게브 사막 위로 극심한 팔월의 더위가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물들 사이에 많은 경계선이 강요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잘 헤쳐나가야 하고, 그래야만 위험한 결과를 피할 수 있고,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경계선을 훌륭하게 헤아리며 다니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 나도 그런 사람은 못된다. 난 경계선이 보이기만 하면 그것을 향해 곧장 달려가서 한달음에 뛰어넘거나, 아니면 슬쩍 넘어버린다. 둘중 어느 행동도 의식적인 결정의 결과나 경계선에 저항하고 싶어 벼르던 욕망의 결과가 아니라 순수한 서투름의 귀결이다. 그리고 난 일단 경계선을 넘고 난 뒤에는 깊은 불안감의 늪에 빠져든다. 간단히 말해, 진짜로 그건 서투름의 문제인 것이다. 난 마침내 내가 경계선을 다루는 일에 실패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가능한 한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 P80

글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 경우는 단지 내게 삶을 합리적으로 평가할 능력이 없으며,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난 개인으로서의 내 삶도 일반적인 삶도 사랑하지도 않으며 현재로선 내가 기울이는 어떤 노력도 오로지 생존을 위한 것이다. - P87

그리고 아랍인들이 그 소녀의 행실에 대해 의심을 품고 죽여서 우물에 던져버렸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참 안된 일이라고 덧붙인다. 그런 관습이 있다는 게. - P130

침착하자. 과민반응을 하지 말자. 평소처럼.  내 껌. 어디 있지? 침착해야 돼.  난 껌 한통을 찾기 위해 손을 주머니에 찌른다.
갑자기 타는 듯한 뭔가가 날카롭게 내 손을 꿰뚫고, 이어 내 가슴을 꿰뚫는다. 그리고 아득히 총성이 이어진다. - P1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돌다 보면 너무 함께이고 또 너무 혼자여서 생각과 내면의 신화조차 이따금 한데로 모인다. 가끔은 똑같은 꿈도 꾼다. 

가끔은 좀 새로운 생각을 하자고 스스로 되뇐다. 궤도에서는 너무 거창하고 오래된 생각만 붙들게 된다. 새로운 생각,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참신한 생각을 하자.
하지만 새로운 생각이란 없다. 그저 새로운 순간에 태어난 오래된 생각일 뿐이다. - P19

어쩌면 모든 존재의 본질이란 위태로이 핀 끝에서 동요하는 것, 살아가면서 조금씩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 아닐까. 그러면서 우리의 어마어마한 하찮음이 속수무책으로 격동하고 들썩이는 평화의 제물임을 깨닫는 것 아닐까. - P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때늦게》의 서문 중에서

우리의 무지나 무책임을 알려주지 못하는 ‘정보‘만 끝없이 쌓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과학의 언어와 시의 언어 둘 다 필요하다. - P66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 어디에 사는지, 더 찾아가야 할 집이 있다면 어떤 곳인지를 아는 게 아주 중요해요. 나를 지구상의 특정한 맥락 속에서 나의 동족 사이에 위치시키는 거죠.  - P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말 다른 뭔가.
틀림없이 인간이고 감정적으로 대단히 이해할 만하지만 정말 다른 뭔가와 접촉했다는 감각이야말로 소설이 해주는 위대한 일 중 하나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렇게 그들은 서로 첫 번째 비밀을 공유했고, 자신들이 바라는 것,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사실은 어디로부터 오는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모든 생각과 기호 안에 산 자뿐 아니라 죽은 자들이 살고 있고,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말이다. 서독에서 온 소포에 들어 있는 펠리컨 만년필로 쓰든, 네 가지 색을 번갈아 쓸 수 있는 체코제 볼펜으로 쓰든 상관없이 산 자와 죽은 자들이 그들의 글과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 P105

그는 그것을 안다. 카타리나는 아직 그것을 모른다. 그녀 안에서 새로운 시대는 이룩한 것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것이다. 그녀는 그의 열정을 공유하지만, 그 열정의 어두운 토대와 그가 유년의 폐허로부터 인간으로 서기까지 필요했던 노력은 알지 못한다. 이것이 그녀의 장점일까, 아니면 이것이 그녀가 그와 객관적으로 구별되는 지점일까? - P171

하나가 다른 하나를 교대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물결이 한 사람을어디론가 실어가면, 다른 사람은 밀려나는 것이 아니었던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었던가? 자신과 어떤다른 사람이 함께 개개인의 삶에서만 그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먼지가 처음 모양을 띠는지, 마지막 모양을 띠는지를 측정할 수 있었다.
힘러가 포즈난에서 연설하는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 믿으면 실제 일어나는 일의배후로는 가지 못한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합적으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관점에서 튕겨져 나와야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감정은 굉장히 조심하지 않으면, 사람의 눈과 모든생각을 서로 달라붙게 하는 접착제였다. 감정을 스스로에게서 분리해 현미경 아래에 놓는 것, 빌어먹을 20세기에 예술의 본질은 진정거기에 있었다. 이 모든 난리가 끝난 뒤에 말이다. - P1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