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없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트이는 감각을 공유하는 독서... 세종 기지에 두고 올 책으로 《경애의 마음》을 집어든 것에도 괜스레 안도하는 독자의 마음.













누구도 남극의 주인이 아니며 국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의 빙원은, 빙산은, 유빙은 ‘국가‘라는 제도 안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마치 우주의 행성처럼. 지구상에 그런 ‘없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숨이 좀 트였다. - P14

세계의 끝,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지구의 가장 먼 곳, 마치 흰빛처럼 아스라이 존재하는 얼음 땅에 내 책이 있다니. 나는 책장 앞에서 고민하다가 《경애의 마음》을 캐리어에 넣었다. - P32

남극에는 부리가 붉은 젠투펭귄과 눈과 부리 아래에 끈 무늬가 있는 턱끈펭귄이 사는데 턱끈펭귄이 좀 더 용감하고 호기심이 많다. 기지에 도착하고 열흘쯤 뒤 실제로 기지를 둘러보러 온 턱끈펭귄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 P51

지구를 한참 돌아 펭귄들 앞에 서 있는 나도 이 순간을 손쉽게 얻은 건 아니었다. 살아남기를 잘했다고 나는 해변에서 생각했다. 그건 반대의 순간들 또한 있었다는 얘기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위기들이었을 것이다.

펭귄과 나, 그리고 흰풀마갈매기 사이로 바람이 휘몰아쳤고 나는 그런 우리의 ‘거리‘가 평화롭게 느껴졌다. 몇몇 펭귄들은 미동도 않고 바람을 등지고 있었다. 마치 낮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느리고 작은 존재가 신비롭게 보여주는 태연함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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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걷는 모습을 보면 항상 아주 가버리는 사람, 멀어져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나타날 때마다 그녀가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는 사람의 가슴 한복판으로 와 닿는다. 그녀는 시선과 기억 속에서 거꾸로 전진한다.
그녀를 보고 누군지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녀는 벌써 사라지고 없다. - P30

인간의 영혼이 정말이지 더럽고 비에 젖은 개털처럼악취를 풍기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이 결코 아주 지나가버린 것은 아니다. 그 시절은 존재하기를 결코 그치지 않았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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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그 여자가 들어왔다. 문득. 그러나 그녀가 책의 주위를 배회한 지는 벌써 여러 해가 된다. 그녀는 책을 살짝 건드리곤 했다. 하지만 책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들을 들춰보았고 심지어 어떤 날은 낱말들을 기다리고 있는 백지상태의 페이지들을 소리나지 않게 스르륵 넘겨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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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란 무엇인가?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고통이란 크고 작은, 날것의 다면적인 모든 신음, 비명, 한숨의 근원에 붙이는 이름이라는 것은 안다. 그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그 단어는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보다는 우리의 응시를 정의한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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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숲에서 할머니는 오직 살아남아 다음번에 또 먹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 먹었다. 50년이 지난 후 미국에서 우리는 입맛 당기는대로 먹었다. 찬장에는 기분따라 산 음식들, 지나치게 비싼 식도락용음식들, 필요하지도 않은 음식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유효 일자가 지나면 냄새도 맡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버렸다.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먹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셨다. 하지만 할머니 자신은 절박함을 떨쳐 버리지 못하셨다. - P12

어쩌면 ‘고기‘란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대신 이 농장에서 기르고, 이 공장에서 도살하고, 이런 식으로 팔리고, 이 사람이 먹는 이 동물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각이 다 달라서, 모자이크처럼 하나로 짜 맞추기는 힘들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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