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갈 틈새로 작약이 자라고 있어요. 헐거운 회색 자갈을 뚫고 올라온 그들은 뱀의 눈처럼 봉오리로 공기를 탐색하다 부풀어 공단처럼 반짝반짝하고 반들반들한, 짙은 빨간색의 큼지막한 꽃을 터뜨리죠. 그러다 산산이 땅으로 떨어져요. - P15
나는 잔인한 악마이고,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 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동물을 좋아하고, 안색이 밝은 미녀이고, 눈은 파란색인데 어디서 말하기로는 초록색이고, 머리는 적갈색인 동시에 갈색이고, 키는 크거나 작은 편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일에 관한 한 싹싹하며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 P38
넓고 깊고 복잡하고 미묘하면서 언제나 조금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을 주로 침묵의 세계 속에 품고 있었을 그런 그녀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작가와 작가의 인물에게 동시에 빠져들게 되는 글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기쁨과 비로소 해소되는 갈증.
늙은 딸기코는 모험을 찾아다니는 기사야. 그 사람 같은 부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게 안타까워. 그 늙은이들은 세상사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거든. 나는 그들이 좋아. 그들은 늘 최악이 가능하다고 믿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지. - P48
그녀는 점점 루스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10년 전에 그녀는 앞으로 여린 감정에서 자유로워지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었다. 그런 감정은 가치 있다기보단 오히려 골칫거리였고, 허영은 그녀의 약점이었다. 그녀는 존경받기 위해 몹시 노력했고, 주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 결심을 접고 루스를 좋아하게 되었고,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지만 이쯤에서 멈춰야 했다. - P153
이제 그녀는 리딩 씨를 불필요하게 지켜낸 것에 대한 그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악순환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리딩 씨가 그렇게 내버려진 채로 죽었다면, 리딩 부인은 모든 가능성 중에서 프린시스 로드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가장 컸고, 만약 머물렀다면 블렌킨솝 씨는 그녀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 더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터였다. - P215
로버트 코더를 응시하며, 해나는 블렌킨솝 씨를 잊었다. 그의 진지한 자기기만(그녀는 그게 진지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에 깜짝 놀랐고, 그녀가 자신에 대해 만들어낸 생각도 꼭 그만큼 호의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자신을 위해 만든 세상(그 안에서 그녀는 현명하고, 위트 있고, 연민의 폭이 넓고, 가슴으로 이해하는 사람이었다)은 그 세상을 지탱할 만큼 필사적인 힘이 없었다면 와르르 무너져 폐허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그녀의 놀란 마음은 두려움으로 변했다. 그 세상이 서 있지 못하면, 그녀는 그것과 함께 무너질 것이다. - P228
하워드가 그림자처럼 소리도 없이, 혹은 경고의 뜻으로 잔가지 하나 부러뜨리지 않고 슬그머니 숲으로 들어가버린 야생동물처럼사라진 것이 그날이었고, 뒤따른 흥분과 분노, 당혹감, 설명에 대한 요구, 슬픔과 눈물 속에서 엉클 짐은 그 동물을 달아나게 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고 확신하며 침착하고 무덤덤하게 서 있었다.아버지가 짜놓은 그물에서 달아나려면 한순간에 갑자기 툭 끊어내야 한다고, 은혜를 모른다는 질책과 너무 많이 겪어온 부드러운 폭력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을 거라고 말했다.짐은 자신의 감정이 질문의 대상이 되면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 때문에 바다로 나간 것이고, 누이가 닭장 안의 닭처럼 느낀 거라고 중얼거렸다. - P334
밤 인사를 하는 새 친구의 목소리가 정원길을 걸어가는 미스 해나 몰을 쫓아왔고그녀가 스쳐 지나갈 때 월계수들은 소곤소곤 하지만 묘하게 뚜렷한 소리로 곧 또 오라고 다짐을 받는 깁슨 부인의 초대를 반복했다. - P7
밤이 오자, 밤꾀꼬리는 잠들지 않으려 노래를 불렀다.포도 덩굴이 자라고, 자라고, 자라는 동안...나는 잠들지 않겠어!포도 덩굴이 자라고, 자라고, 자라는 동안... - P18
밤이 지나 새벽으로 접어들 때면 언제나 사려 깊고 서늘한 새벽의 손이 내 입술 위에 놓이고, 격렬했던 내 외침은 소심한 혼잣말이 되거나,자신을 안심시키고 두려움을 떨치려 큰 소리로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는 아이의 수다로 변해…….나는 비록 행복한 잠은 잊었어도, 이제는 포도 덩굴손이 두렵지 않아. - P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