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총을 든 채 심장엔 살의를 품고 
남의 땅을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웨스트뱅크 정착민이 하는 소리처럼
들리기 일쑤니까. 
그 소리 배후엔 
절로 몸을 옹송그리게 하는 
폭력배가 도사리고 있다.
이스라엘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몇 년에 걸쳐 예호슈아의 소설에 
감응해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 P131

곧 글쓰기는 내 인생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뭐랄까, 글을 쓰려고 앉으면, 
무수한 불안과 초조에 안달복달하는 ‘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느낌이었다. 
책상에 앉아 종이 한 장을 앞에 놓고
손가락을 키보드에 올려둔 채 
생각을 정리하려 애쓰는데 골몰할 때면 
안전하고 단단히 중심이 잡혀 있으며
아무것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흥분되면서도 평화로웠고, 
산만해지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지지도 않았으며, 
내게 없는 것들에 굶주려 
허덕일 일도 없었다. 
내가 그 방 안에 나와 함께 있었다. 
뭐가 됐건 내 삶의 다른 것들은-사랑도, 
부나 명예의 약속도 심지어 건강조차-
글쓰기가 내게 준 것,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 
내가 나 자신에게 
생생한 현실로 존재한다는
그 느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P152

얼핏 보면 부부가
결혼생활에서 겪게 되는 성격 차이를 
빨랫감 목록처럼
재미있게 열거한 듯 보이지만, 
핵심을 잘 들여다보면
대충 상황에 맞춰 내린 결정들에 
제멋대로 휘둘리는 우리네 인생사를 
현실로 살아낸다는 게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작가가 필력을 쏟아부어 그려낸 
걸작이 보인다. - P158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자아의 형태를 일그러뜨리고, 
말도 안 되는 별별 타협을 합리화하고,
쾌락과 고통이 뒤섞인 일평생을 
견뎌내게 만드는 이 강박적 욕구, 
혼자이고 싶지 않다는 강박적 욕구란 
얼마나 기이한가. 
이 이중 족쇄를 적나라하게 실감하노라면
독자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 P159

나는 살아오면서 
그 피에 굶주린 일념에서 분리되어
이론과 실천의 괴리로 인해 
고통과 혼란으로 얼룩진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음에, 
그런 삶을 허락받았음에 감사한다. 
그런 삶을 살았기에 어쩔 수 없이 
이데올로기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예외적 인간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풀이 죽을지언정 완전히 꺾이지는 않는 
재생성 영혼을 계속 장착하고 
살아올 수 있었던 건, 
내 인생에 그렇게 심한 대참사가 
닥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그러나 빌리와 톰의 영혼은 
전쟁으로 완전히 망가져 버렸고, 
심하게 병들어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 - P195

이제야 떠오른 생각이지만, 
레싱이 세계의 사정을
조금쯤 봐줄 수 있었더라면, 
사건에서 한발 물러나 
조금은 희극적인 분통을 터뜨리거나 
따뜻한 속앓이를 할 수있었더라면, 
동물의 관계성을 바라보는 시각도
-남자나 짐승이나-조금은 확장되어 
소정의 뉘앙스를 품을
여유가 생겼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분명, 그의 문장들도 
더 큰 즐거움을 주었으리라. - P213

그건 수의 수동성 한가운데 자리한 어둠이었다. 내가 너무나 잘 아는 고의적 맹목. 아, 물론,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계급으로 태어났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하디가 수의 내면에서 빛나게 만든 
그것은, 자기 경험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두려워하는 태고의 공포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 공포가 얼마나 부지불식간에 난장을 벌이는지, 그 저항은 또 얼마나 조롱에 차 있는지.
가장 최근에 "이름 없는 주드"를 다시 읽고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땐, 이 책이 마침내 내게 해야만 했던 말을 다 한걸까 궁금해졌다. - P228

책장들을 순서대로 다시 정리하고 앉은 나는 그 책을새로 읽기 시작했고, 지금 보니 표시할 만하다고 느껴지는 문장과 대목에 다른 색 펜으로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책을 두꺼운 고무밴드로 묶어 고정한 다음 오랜 세월 그 책이 차지하고 있던 책장 한 자리에 도로 꽂았다. 오래오래 살다가 언젠가 손에 또 다른 색 펜을 들고 그 책을 다시 읽을 날이 오기를 바라며.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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