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얼 CEREAL Vol.7 - 영국 감성 매거진 시리얼 CEREAL 7
시리얼 매거진 엮음, 이선혜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에 도서관에 들렀다가 킨포크가 잡지 코너에 비치되어 있길래 읽어보았는데, 킨포크를 읽고 난 뒤 나는 새삼스럽게도 시리얼이 더 내 취향에 맞는 잡지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물론 시리얼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마음에 쏙 들었던 잡지였다. 론리 플래닛이나 ABROAD 등 대부분의 여행 잡지가 가이드북처럼 관광객이 몰리는 여행지의 랜드마크, 유명 맛집 위주로 글을 쓰고 편집하는 것과 달리, 시리얼은 펼치자마자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풍경 사진과 널찍한 여백부터 보인다. 그 옆으로(혹은 뒤로) 사진 속 장소에서 펼쳐졌을 에디터의 소소한 여정, 또는 에디터가 사진 속 장소를 보며 떠올렸던 느낌과 생각들이 나열되어 있다. 장소를 그리듯이 묘사하고 일상생활을 차분히 목소리로 읊는 듯한 글, 그리고 전체적으로 차분한 색으로 이루어진 모던한 톤앤매너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여행을 떠나서 빡빡하게 일정 세워 움직이기보다는 카페에 앉아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기분이 든다. 시리얼은 내게 있어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잡지다.


영국 잡지 시리얼의 편집자는 로사 파크, 놀랍게도 한국인이다. 시리얼을 한국에 런칭하면서 그녀가 인터뷰했던 내용을 살펴보니, 이 책 7권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호라고 한다. 그녀가 7권을 좋아하는 이유는 영국으로 이사오기 전 6년 간 살았던 뉴욕에 대한 이야기를 크게 다뤘고, 회사가 위치한 브리스톨에 대해서 콘텐츠를 작성한 만큼 개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커서라고 한다. (하지만 가장 잘 팔리고 빨리 팔린 것은 9권였다고.) 아직 나는 미주 쪽을 여행해본 적이 없어 미국의 각 주별 분위기를 잘 알지 못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탓인지 뉴욕하면 항상 바쁘고 부산하고 정신없는 도시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러나 이번 호에서 시리얼은 뉴욕 속에서 활동성과 차분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공간들, 링컨센터와 노구치 미술관을 찾아 소개하고 있다.



미국에는 일찍이 공연예술센터라는 것이 존재한 적이 없었기에 링컨센터가 뉴욕에 어떤 혜택을 줄 것인지 그리고 공연예술센터의 개념과 홍보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뉴욕의 권위 있는 문화 단체들은 당시 범죄가 빈발하던 어퍼 웨스트 사이드로 옮기는 것을 두고 말이 많았지만 도시 재개발은 마침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1962년과 1966년 사이에 완공된 링컨 센터는 뉴욕을 진정한 문화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하면서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변화를 가져왔다. (링컨센터, p.12)


노구치 미술관의 중심은 석조 작품이 전시된 옥외 정원이다. 3층 관람을 마친 뒤 계단을 통해 곧바로 정원으로 내려갈 수 있다. 일본 소나무의 굽은 가지 아래에 서있거나, 조각품과 나무 그리고 교토에서 가까운 에사이 강에서 채취한 회색 돌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뉴욕이 아련한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 (…) 우물을 닮은 워터스톤에서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물은 작품의 옆면을 타고 흘러내린다. 노구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수를 제작했지만, 노구치 미술관 정원에 놓인 워터스톤처럼 명상에 젖어들게 하는 소박한 작품들이야말로 걸작이다. 그윽하게 일렁이는 검은 수면은 몇 시간이고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다. (노구치 미술관, p.19)



이번 호에서 마음에 들었던 사진들은 <프라이 초콜렛>과 <포트메리온>.


읽으면서 포스트잇을 붙였던 부분은 <의자 - 자리가 지닌 영향력>의 첫 문단과 <에버레인>, 그리고 <마조렐 정원 - 특별한 파랑색>.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의자에는 '9B'라고 번호가 매겨져 있다. 나는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 의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영역을 표시하고 지위를 부여하며 항공기로 여행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 의자는 유행과 은유의 수단으로서 우리의 사랑을 받는다. 군주는 왕좌에 올라 통치자가 되며, 재계의 거물은 기업 이사회에 등재되어 힘을 얻고 의장이 되어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로사 파크스는 버스 의자에 앉는 것으로 민권 혁명을 일으켰다. (p.81)


제품 생산 과정에 대한 투명한 공개는 에버레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여러 가지 일부분일 뿐이다. 에버레인은 구매자에게 그들이 무엇에 돈을 지불하고 있는지 알리고자 한다. 기존 소매시장이 이에 대해 정확한 답변을 하지 않는 것과 달리 에버레인은 판매하는 제품 하나하나에 이해하기 쉬운 인포그래픽을 곁들여 가격 책정 과정을 보여준다. 프레이스먼은 자사의 브이넥 헤더 면 셔츠 생산 원가가 원단 4.28달러, 공임 4.65달러, 물류 0.20달러는 더한 9.13달러임을 거리낌 없이 공개한다. 또한 그는 에버레인이 완제품을 생산 원가의 두 배가 조금 안 되는 18달러에 판매할 때 기존 의류 생산업체들은 동일한 제품의 소비가격을 훨씬 더 비싼 50달러로 책정한다고 밝힌다. "소비자는 흔히 비싼 물건은 그만큼 질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이스먼이 설명한다.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아요." (p.98)


초록빛 나뭇잎, 짙은 그림자, 흐드러지게 피어 물결치는 화려한 꽃. 온갖 색을 입은 이 정원에서 홀로 돋보이는 것은 바로 37.6% 빨강, 31.4% 초록, 86.3% 파랑으로 이루어진 마조렐 블루다. 이 색은 팬톤 #2726과 91% 같다. 마조렐 블루는 자크 마조렐이 남긴 거의 모든 그림 속 어딘가에 남아있다. 이브 생 로랑의 N 18 블뢰 마조렐을 칠한 속눈썹과 손토 그리고 그가 디자인한 하이힐에도 같은 색이 있다. 자크 마조렐과 이브 생 로랑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두 아티스트의 작품은 마조렐 정원에서 빛난다. (p.1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그 온 랄프 로렌 보그 온 시리즈
캐틀린 베어드 머레이 지음, 이상미 옮김 / 51BOOKS(오일북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세계 유명 패션 브랜드 창립자(혹은 디자이너)의 커리어를 다루고 있는 보그 온 시리즈가 한국에서 번역 · 출판되었다. 사실 한국에는 패션 디자이너의 경력 또는 패션 브랜드의 변천사를 다루는 책 자체가 많지 않고 그 중에서 수작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데, 이번에 출간된 보그 온 시리즈는 패션 업계에 종사하거나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있어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첫 직장이 패션 관련 업계였기 때문에 부족한 배경지식을 얻으려 적지 않은 수의 패션 브랜드 도서를 읽었지만 내가 알고 싶은 디자이너의 업적보다는 사적인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들어있거나 그림 없이 글자만 빼곡하여 가독성이 떨어지고 지루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회사 측에서도 필독서 리스트에 별점이 3개에 불과한 책들을 많이 올려놓았는데, 그만큼 패션을 다룬 책이 한국 출판계에서 찾기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책은 시대별로 디자이너의 경력을 나열하고 있으며, 그의 오리지널 스케치와 다양한 브랜드 화보 사진, 어록 등이 연관성 있게 수록되어 있어 매우 읽기 쉽다. (마치 잡지를 읽는 느낌이 든다.) 특히 해외 보그 온 시리즈는 현재 한국에 출간된 코코 샤넬, 위베르 드 지방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랄프 로렌 외에도 알렉산더 맥퀸, 엘자 스키아파벨리, 크리스챤 디올, 비비안 웨스트우드처럼 한국에서는 아직 책으로 다룬 적 없는 디자이너들도 다루고 있어서 현재 출간된 시리즈보다 앞으로 출간될 한국 보그 온 시리즈에 대한 기대심이 더욱 크다.


러시아 출신의 넥타이 생산자였던 랄프 로렌은 자신이 좋아하던 것─테일러링 슈트, 서부스타일 옷─에서 출발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인테리어 생활용품, 스포츠웨어 등─을 찾아 이를 디자인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계속했고, 이를 통해 미국인 누구나 사랑하는 '미국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그는 스스로를  옷을 만드는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이라고 여겼고, 소수의 상류층이 입는 옷이 아니라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대중화시킴으로써, 그의 브랜드 옷을 걸치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특권층의 일부가 되는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었다. 랄프 로렌은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명백한 의도가 없는 한 어떤 일도 시도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특성이야말로 위대한 브랜드를 만들고, 그 브랜드를 유지하며, 모두가 기억하는 존재로 만든 원동력(p.176)이었다. 나는 랄프 로렌의 이야기는 패션 디자이너보다는 의류 관련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비전과 영감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


보다 상세한 랄프 로렌 스토리를 알고 싶다면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35&contents_id=11375

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1636&rid=&contents_id=62787


나는 책을 구입할 때 책 표지 디자인도 많이 고려하는데, 이 책은 정말 시리즈로 구입해서 책장에 꽂아놓고 싶더라. 하드 커버에 보그 자료실에서 엄선한 패션 화보와 일러스트레이션이 책의 1/4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 잡지처럼 촬영 소품으로 써도 좋을 만한 책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9-23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눈으로 보는 셰익스피어 - 번뜩이는 지성과 반짝이는 감성으로 나를 포장하자 눈으로 보는 시리즈
히라마쓰 히로시 지음, 박유미 옮김 / 인서트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그려진 영국 회화를 소개하는 책이다. 일본인들은 기본기가 없는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좋은 기본서를 잘 쓰는 것 같다. 넓은 내용을 얕지만 간단하게 잘 정리하는 기술이 있다. 만약 몇 개의 작품을 깊이 있게 다루는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다소 아쉬울 수 있겠지만, 나는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은 책이므로 별 점수 네개를 매긴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작품 대다수가 개인소장이어서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그 중에 내가 좋아하는 워터하우스의 그림이 네 점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이 그림들을 실제로 볼 방법은 없겠지 ㅠㅠ), 책 속에서 유일하게 직접 본 그림이 테이트 브리튼의 밀레이의 <오필리아>다. 만약 내가 영국 여행을 하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테이트 브리튼에 있는 작품들을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관람했을 것이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훑어보고 갔겠지. 그랬더라면 좀더 풍부한 영국 여행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괜시리 아쉬운 맘이 생긴다.


이 책은 셰익스피어 회화의 역사를 서론에 다루고, 본문은 크게 셰익스피어의 비극(1막), 희극(2막), 문제극과 낭만극(3막), 역사극(4막)과 시편으로 나눈 뒤, 속하는 작품의 간단한 줄거리와 함께 작품을 테마로 그려진 화가들의 회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끝 부분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기한 명배우들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미녀 캐릭터들 소개, 그리고 진품 여부로 논란이 일고 있는 여러 점의 셰익스피어 초상화를 소개한다. 본문에서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작품을 다루는 데다 포커스가 명화에 맞춰져 있다보니 줄거리 소개가 간략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덕분에(?) 뒷내용이 궁금해져 읽고 싶어진 셰익스피어 작품이 많았다:<베로나의 두신사><말괄량이 길들이기><사랑의 헛수고><뜻대로 하세요><템페스트>. 보고 싶다고 손 꼽은 작품 대부분이 희극이다. 대작에는 비극이 많다는데, 그래도 나는 가볍고, 발랄하고, 재치있고, 유쾌한 글들을 더 선호한다.


책을 바탕으로 드라마가 나오고, 영화가 나오고, 그림이 나오고, 노래도 나온다. 나는 삽화가 실린 책들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책 이해도를 높여주는 글의 이미지화를 선호한다.) 이 책에 실린 셰익스피어 명화들도 정말 즐겁게 감상했다.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여행기☞ http://jaera1990.blog.me/220308010151

영국 런던의 미술관 · 박물관 여행기 (1) :: 테이트 브리튼, 영국박물관, VA박물관
영국의 물가는 살인적이지만 저렴하게 여행하실 수 있는 세 가지 팁 ​ 1. 마트(세인즈버리, 테스코, 막스앤스펜서)를 애용한다. ...
blog.naver.com
본문으로 이동



- - - - - - - - - - -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2014년), 사망 400주년(2016년) (……) 셰익스피어가 활약한 시대는 예수회가 주축이 된 반종교개혁에 따라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회부하는 등 가톨릭이 반격을 가하던 시대였다. 동시에 대항해 시대의 중심 세력이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바뀌고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대두되던 시대다. 문화사적으로는 미켈란젤로의 사망으로 르네상스가 막을 내리고 매너리즘 시대를 거쳐 바로크로 옮겨가는 시기였고, 영국에서는 뒤늦게나마 16세기 후반에 르네상스 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때가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1558-1693년)로 셰익스피어의 생애(1564-1616년)와 일치한다. 뒤늦게 꽃피운 영국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이 된 것은 문학과 연극이었지 결코 회화는 아니었다. (…) 즉 회화에서 후진국이었던 영국은 오랜 기간 외국 화가들의 영향 하에 머물면서 자국 출신의 국민 화가가 등장하는 18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pp.8-9)


미술 후진국이었던 영국에서는 18세기 후반을 넘어서도 여전히 정식 아카데미 탄생은커녕 화가들이 정기적으로 발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이를 우려한 사람이 호가스다. 호가스는 (…) 활발하게 자선사업을 펼치면서 고아원에 그림을 기증하고 동료들에게도 기부를 독려함으로써 고아원이 그림을 모으는 장이 되게 했고, 이곳에서 예술가들의 만찬회도 매년 개최했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예술가 단체인 '대영제국예술가협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훗날 이 조직을 탈퇴한 예쑬가들이 중심이 되어 국왕 조지 3세의 후원을 받아 1768년 로열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로열 아카데미 초대 회장직에 조슈아 레이놀즈가 선출되었다. 20대 후반에 이탈리아에서 유학했던 그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고전주의적 회화 양식인 그랜드 매너를 추구하며 초상화 중심의 전통적인 영국 회화와 역사화를 최고로 인정하는 국제적 회화 기준을 영국에 뿌리내리고자 했다. 단적으로 말하면 역사화를 최고 가치로 인정하는 시대에 주목받은 것이 셰익스피어를 주제로 한 회화였던 것이다. (p.11)


낭만주의는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하고 고전주의에 대립하는 사조이며 중세 취미와 이국정서를 동경하는 정신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적으로는 과거에 대한 동경이며 공간적으로는 먼 이국에 대한 동경이다. 먼 곳에 대한 동경이 강하면 강할수록 가까이 있는 것을 부정하게 되고, 종국에는 가까운 것에 대한 분노를 감출 수 없게 된다. 즉 당시로서는 가까운 것이 되어버린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적 질서에 반기를 들고 먼 중세를 동경하며, 가까운 세계를 혐오하고 이국을 동경한 것이 바로 낭만주의 정신의 표현이다. 그렇기에 당시의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먼 이국을 무대로 격정적인 감성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낭만주의자들을 열광시킬 수 밖에 없었다. (p.14)


영국에서는 1848년 9월 로열 아카데미 학생들을 중심으로 7명의 젊은이들이 '라파엘 전파 형제단'을 결성하는데 그 중심인물이 밀레이, 헌트, 로제티다. 그들은 조슈아 레이놀즈 이후 교육받은 회화의 기본에 반기를 들었다. 미술 후진국인 영국에 '그랜드 매너'의 전통을 가르치고자 한 레이놀즈의 교육방침이 시대를 넘어 비판받는 쪽으로 몰린 것이다. 라파엘 전파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뜻이 그들은 아카데미가 이상으로 여기는 라파엘의 미술을 비판하고, 라파엘 이전처럼 자연적이고 진실한 표현 양식인 중세 회화를 중요시했다. (p.15)


독일 바에에른의 극작가 제너펠더가 석판화(리소그래프)를 발명한 것은 공교롭게도 들라크루아의 탄생 연도인 1798년이다. 들라크루아는 일찍이 이 기술을 습득해서 17세에 최초의 석판화를 신문에 실었고, (…) 1834년부터 1843년까지 약 10년에 걸쳐 작업한 것이 41쪽 <햄릿> 석판화 연작이다. (pp.36-42)


"최선을 다했음에도 최악의 사태를 맞은 것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에요." (코델리아-리어왕, p.63)


"사랑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그래서 그림에서 날개 달린 큐피드가 소경으로 묘사되는 거지. 사랑하는 마음에는 분별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한 여름밤의 꿈, p.105)


(월터 하웰 데버럴 - 십이야 제2막 제4장) 중앙에 앉아 있는 올시노 공작은 데버럴 자신을 모델로 해서 그렸고, 하인 페스테는 그의 친구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가 모델이다. 또 왼쪽에 앉은 몸종 세자리오로 분장한 바이올라는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아의 모델이자 훗날 로제티의 아내가 된 리지 시달이다. 이 그림은 그녀가 라파엘 전파 화가의 모델이 된 최초의 작품이다. (p.130)


셰익스피어를 주제로 한 회화를 보급하는 데 최고의 공헌을 한 기획은 18세기에 존 보이델이 기획한 '셰익스피어 갤러리'다. (p.133)


요정화의 대표적인 주제 중 하나는 <한 여름밤의 꿈>이나 <템페스트>에 등장하는 요정들의 모습이다. 이 분야의 효시라고 하면 역시 퓌슬리를 빼놓을 수 없다. (…) 다만 요정화가 퓌슬리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그를 화가의 세계로 끌어들인 레이놀즈의 <퍼크>를 비롯해서 많은 화가가 요정화를 주제로 삼았따. 이 책에도 실려 있는 프랜시스 단비와 단니엘 매클라이즈, 조셉 노엘 페이튼 등이 그들이다. (p.177)


리처드 대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초기부터 <잠든 티타니아>와 <퍼크> 등을 그려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유럽과 중동을 여행하던 중 심각한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켜 여행을 포기하고 돌아오게 된다. 그는 결국 아버지를 살해하고 해외로 도망가서 파리에서 여행객을 살해하려다가 체포되어 런던의 베들램 로열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그 후에도 정신병원에서 요정화를 그려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다툼> 등 세밀하고 섬세한 터치의 걸작이 나왔지만 당시에는 정신병원 안에서 그린 작품은 인정해주지 않아 요정 화가로서의 명성은 페이튼을 비롯한 다른 화가들에게로 옮겨간다. (pp.178-180)


셜록 홈스로 유명한 코난 도일의 숙부 리처드 도일은 삽화가로도 유명하지만 요정화의 제1인자 (p.180)


"겨우 머리밖에 들어가지 않는 폐하의 왕관 속에는 숱한 아첨꾼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비록 그 작은 곳에 앉아 있을 뿐이지만 그들이 끼치는 해독은 이 나라 전체에 미치고 있습니다." (곤트-리처드 2세, p.2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럽을 만든 사람들
현경병 지음 / 무한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장점

1. 책 겉표지가 예쁘다.

2. 책 내지 디자인 역시 예쁘고, 도표, 지도 등이 적재적소에 배치 되어 글 이해도 및 가독성을 높인다.

3. 추가로 넣어준 부록이 알차다.

4. 시대의 주요 인물을 설명하며 해당 시대 설명을 곁들여주는 형식이라 유럽사에 문외한이던 나 같은 독자가 유럽사의 큰 얼개를 잡기에 좋은 책이다.

5. 유럽의 획을 그은 전쟁, 유명한 건축물, 미술 등을 담고 있어서 유럽 배낭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적합한 책.


이 책의 단점

1. 저자의 글솜씨 및 글의 구성 자체가 썩 훌륭한 편은 아니라 책에 대한 집중도가 자꾸 흐트러진다.

2. 1째, 2째, 3째… 같이 저자가 구사하는 특이한 맞춤법(?)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3. 2권 세트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책에 1권을 나타내는 표기가 없다. [고대 유럽~근대 유럽의 서막]이라는 부제라도 큰 제목 밑에 달았더라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역사와 인물전이 결합된 통유럽사책이다.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보고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쉽게 구분 못하듯, 우리 역시 서양인을 보면서 그들이 어느 민족인지, 어느 국가 사람인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유럽은 크게 3대 민족권(라틴, 게르만, 슬라브)으로, 4대 지역권(동유럽, 서유럽, 남유럽, 북유럽)으로 나뉜다. 한국사를 배울 때는 국가의 변천사 위주로 공부하면 되지만, 유럽사는 반드시 민족의 이동을 고려해야 한다. 나 역시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에 유럽 4대 지역권은 익혀 갔지만(여행 루트를 짜야 했기 때문에 유럽 지도를 자주 들여다보니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유럽 각 국가가 어느 민족권에 속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작년 영국의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 현장에 있었으면서도 그 투표가 왜 일어나는지, 얼마나 중요한지, 유럽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몰라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체코에 가서도 무하의 슬라브 민족 대서사시를 그린 그림을 보면서 그 그림에 서린 역사와 한을 몰랐기 때문에 그림의 아름다움에 감탄만 했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을 받지는 못한 것이 매우 아쉬웠다. 유럽여행 오기 전에 유럽사 관련 책을 미리 읽고 오지 않았던 것을 굉장히 많이 후회했고, 그래서 늦게나마 한국에 돌아가면 유럽사 책을 읽으리라, 고 결심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읽은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책 때문일까. 유럽하면 로마가 떠오르고, 로마하면 그리스가 떠오른다. 그렇지만 민족적으로 보면 그리스는 그리스인이, 로마는 라틴족이 성립하고 발전시켜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게르만족과는 전혀 다르다.(p.130) 이 책에서 저자는 프랑크 국가를 앞세워 유럽 내 범게르만주의도 과대포장된 것이고, 기독교의 전통도 과장되었다고 말한다. 지금 현대의 유럽 국가의 모습이 형성된 것은 불과 몇 백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유럽사를 읽다 보면 머리가 많이 혼란스러워진다. 이 책에는 내가 모르던 내용들이 많아서 한 번 읽은 것으로는 유럽사의 큰 줄기를 잡기가 어려우니 여러 번 반복해 읽어야만 할 것 같다.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편 고대 유럽

1. 유럽인의 정신세계를 형성하다

소크라테스: 문답법(특히 산파술)이란 철학적 접근방식에 치중, 너 자신을 알라, 앎을 추구, 서양 최초의 철학자, 사람을 최초로 철학의 주제로 선정, 자신을 우주의 시민으로 여긴 인물

플라톤: 관념적 철학 확립(이데아, 변증법), 아카데미아 설립, 이상국가: 철인정치가 실현되는 귀족정 국가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 논리학 창안, 실천 철학 제시(vs플라톤), 사람을 정치적·이성적 동물로 파악, 이상국가: 과두정+민주정 혼합 정체 또는 탁월한 소수가 통치하는 귀족정, 시를 철학의 진정한 방법으로 지향, 자연과학 정립(오류多)


2. 유럽의 첫 영웅으로 헬레니즘을 꽃피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정복사업, 동서융합정책/관용정책(다수 그리스인 소아시아로 이주, 페르시아인 관리 기용, 결혼 정책을 통한 그리스화 추진, 알렉산드리아 신도시 건설), 고르디우스 매듭, 후대에 대한 준비는 치세만큼 중요하다, 왕 사후 4개 나라로 분립: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트라키아, 프롤레마이오스


3. 유럽 대륙을 문명권에 편입하다

카이사르: 3두정치, 갈리아 전투(갈리아 전기), 율리우스력


4. 유럽을 기독교의 대륙으로 만들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밀라노 칙령-기독교 공인(313), 수도 이전(330, 로마→콘스탄티노플) 니케아 공회(325, 아타나시우스vs트리니티)-성삼위일체, 교회에 지나친 특권 부여, 소작농을 농노로 바꾸는 법령 제정


5. 유럽의 지리적 판도를 형성하다

아틸라 대왕: 로마 약탈(4차), 니벨룽의 노래, 반지의 제왕


제2편 중세 유럽

1. 로마가톨릭이 서유럽을 지배하게 만들다
레오 1세: 교황권 확립(절대화, 무오류의 존재), 아틸라와의 담판

2. 서유럽을 게르만족의 세계로 정립하다
클로비스 1세: 프랑크 왕국 건국, 게르만족의 기독교 문명권 확립, 살리카 법전 편찬→확립된 원칙에 근거해 영토를 4명의 아들에게 분할 상속(왕국 분열 및 국세의 약화 초래), 프랑스와 독일의 공동 조상으로 여겨짐(프랑스는 국호부터 프랑크의 계승자임을 표방한 명칭)

3.  동로마 제국의 번영을 이끌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로마법대전 편찬, 수도 콘스탄티노플 정비, 소피아 성당 재건, 광범위한 토목 사업, 중국에서 누에 알을 가져와 양잠을 하고 견직물을 유통시킴, 기독교와 교회의 통합, 테오도라, 벨리사리우스

4. 프랑스와 독일 건국의 시초를 이루다
카를 대제: 서로마 황제, 카롤링거 르네상스

5. 신성로마 제국을 세워 진정한 독일의 시초가 되다
오토 대제: 오토 르네상스

6. 영국의 진정한 역사를 열다
윌리엄 1세: 진정한 영국 역사의 시작, 정복왕, 중앙집권적 봉건제, 둠즈데이 북(영국 최초 전국적 토지대장)

제3편 근대 유럽의 서막 
1. 러시아와 동유럽 일대를 정복하여 지배하다
바투 칸: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주치의 둘째아들, 러시아 및 유럽 정복

2.  르네상스로 유럽의 근대화를 촉발하다
코시모: 국부, 코시모 효과
피에로
로렌초: 일 마니피코(위대한 사람)

3. 유럽의 문화를 꽃피우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록에서 찾아낸 조선의 민낯 - 인물과 사료로 풀어낸 조선 역사의 진짜 주인공들
이성주 지음 / 애플북스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서문에는 미시사로 쓰인 역사책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책의 부제('실록에서 찾아낸, 인물과 사료로 풀어낸 조선 역사의 진짜 주인공들')대로 저자가 실록에서 찾아낸 24개의 에피소드에 집중 조명하여 교과서에서 배웠던 한국사의 큰 줄기 속에서 활약한 주인공의 조력자, 사건 발단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물건, 그동안 몰랐던 사건의 전후 상황을 알려준다. 워낙 야사나 미시사를 다룬 역사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 닥치는 대로 읽어서 책 목차만 읽었을 때는 별로 새로울 내용이 없겠다 싶었는데, 몰랐던 사실들이 제법 많이 있어서 지루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게 읽었다. 아, 역시 내 역사 지식에는 부족함이 많다. 특히, <역신이 된 조선을 사랑한 스파이, 강홍립>과 <북벌의 꿈에 숨겨진 명분은 무엇인가, 효종> 편을 읽으며 인조하면 시대의 흐름을 모르던 무지한 왕, 효종하면 북벌론만 떠올리던 나의 편협한 한국사 지식을 반성하게 되었다. 시간을 내어 호란과 청나라 관련 된 책을 찾아서 읽고, 인조와 소현세자, 효종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수한 왕, 영조의 장수비결을 알아보는 <위대한 군주, 그러나 슬픈 아버지> 편도 재미있었다. 사실 나는 이미 예전에 TVN에서 방영했던 렛츠고 시간탐험대에서 왕과 내시편을 보고 조선 왕들의 스케줄과 업무 스트레스가 이토록 살인적인데, 어째서 영조는 그렇게 장수할 수 있었을까 궁금증을 가졌던 적이 있다. 영조 관련된 글을 읽다보면 검소라는 키워드가 유독 많이 도드라지던데, 아마 식습관마저도 검소해서(?) 그랬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영조 본인은 아버지인 숙종과 형 경종을 간호하는 과정에서 의학적 지식을 많이 쌓아 음식과 약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더라. 다만 이 책을 통해 영조가 자주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처음 접하고,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나한테는 영조하면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는 이미지가 강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차마 상상할 수 없어선가보다.


역사 책에 붙는 민낯이라는 단어는 연예인 쌩얼 공개라는 제목이 붙은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는 기분을 떠올리게 만든다. 백퍼센트 민낯일리 없어라고 생각하면서도 호기심이 샘솟는달까. 책 표지에 불타버린 구멍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만원권의 세종대왕 얼굴로 보인다. 그러나 만원권 화폐의 세종대왕 모습은 창작된 것이다. 책 제목은 [조선의 민낯]이라고 적혀 있는데, 책 표지의 그림은 누구를 보고 그린지도 잘 모르겠는 현행 화폐의 상상화라는 사실은 다소 안타깝게 느껴진다.



- - - - - - - - - - -


원래  화성 축성 공역 기간을 10년으로 예상했으나, 정약용은 이를 34개월 만에 끝낸다. 중간에 흉년 때문에 6개월간 공사가 중단한 걸 뺀다면 실제 기간은 28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때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거중기란 기계가 등장한다. 테렌즈가 쓴 <기기도설>에 등장하는 거중기를 개량한 것인데,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구리로 만든 기어장치를 만들 수 없어서 정약용은 대신 도르래의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이 거중기는 40근의 힘으로 625배나 되는 2만 5천 근의 돌을 들어 올릴 수 있었는데 이는 중국의 기중기보다 네 배 더 성능이 좋았다. (p.27)


일단 공신으로 책봉되면 왕과 공신들은 피의 결속을 다지며 서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다. '삽혈'이라고 해서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피를 입 옆에 바르며 다짐하는데 이는 회맹제의 핵심이다. 왕조국가에서 왕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인데 이런 왕이 입가에 피를 묻혀가며 맹세를 할 정도로 챙긴다면 이 신하들이 세운 공이 만만치 않음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p.31)


임진왜란 7년의 기간 동안 기록으로 채집된 단위 전투 105회 가운데 조선 관군 단독 또는 의병이 참여한 전투가 87회, 의병 단독 또는 관군이 참여한 전투가 18회였고, 명군의 전투는 고작 8회뿐이었는데 그나마도 모두 조선 관군과의 연합작전이었다. 그것도 평양성 탈환작전과 정유재란 최후의 공격전을 제외하고는 매우 소극적인 전투였다. 105회의 전황을 분석해보면 조선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투가 68회였다. 이것만 봐도 조선군이 매우 공격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승패 또한 조선군 측 승리가 65회, 패배 40회로 전쟁 기간 동안 개전 초 1년을 제외하고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압박하던 상황이었다. (p.35)


원균을 2등에 녹공해놓았다마는, 적변이 발생했떤 초기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해주기를 청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을 토벌할 적에 원균이 죽기로 결심하고서 매양 선봉이 되어 먼저 올라가 용맹을 떨쳤다. 승전하고 노회한 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그 노획한 적괴와 누선을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중략) 나는 원균이 지혜와 용기를 구비한 사람이라고 여겨왔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운명이 시기와 어긋나서 공도 이루지 못하고 일도 실패하여 그의 역량이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1603년 6월 26일 기록 중 발췌 (p.48)


인조~현종)20여 년 동안 다섯 차례나 영의정 자리에 올랐고, 이 기간 동안 무려 37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렸던 정태화. 능력도 능력이지만 관리로서의 처세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점이다. 사직 상소로 자신의 결백과 무욕을 증명하려 한 점은 이해가 가지만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그 진퇴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처신을 잘한다 말하고, 사관이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행동하고 국사를 제대로 담당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라고 기록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p.58)


"무슨 죄인가? (중략) 벼슬을 꼭 해야겠는데 스스로 이룰 능력이 없어 권신을 가까이하다가 (중략) 여러 사람들이 성을 내어 하루아침에 형세가 가버려서 결국 이렇게 죄를 얻게 된 것인가?" 정도전이 자기 죄는 아니라 말하자, "자기 몸만 온전히 하고 처자나 보호하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중략) 그만 간사한 것이 드러나고 죄가 발각되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인가?" 이후에도 문답은 이어지는데 이 문답의 주인공 등에는 진흙이 묻어있고 손에는 호미를 들고 김을 매고 있는 농부였던 것이다. (p.69)


처음에 유배됐을 때만 하더라도 정도전은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겼지만 곧 자기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확인한다. 백성들은 지배자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멍청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우둔함을 넘어서 유학자들 이상의 탁견을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충격적인 건 백성들의 삶이었는데, 많이 배우고 또 그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던 정도전은 자신이 배운 성리학으로 세상을 바라봤고 관료적인 생각으로만 백성들을 대했다. (p.69)


유배지에서 정도전은 고민을 한다. (…) 왜 정의로운 자는 곤궁하고 불의한 자는 부귀한가. (…) 정도전은 이 '정의'에 대해 고민하다 <심문천답>이라는 철학책을 쓴다. 핵심은 선악의 인과응보는 하늘의 뜻이 아니라 인간 각자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정의로운 자가 곤궁하고 선한 자가 화를 입는 건 시대나 사회의 탓이 아니라 사람들의 지혜와 성심이 부족해서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마음을 정리한 정도전은 본격적인 유랑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함주 막사 회동을 실행한다. (p.70)


실리주의 노선을 택한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명나라와 연합작전을 해야 한다. 말 안 통하는 용맹한 장수보다는 중국어를 잘하는 똑똑한 문신이 낫다"란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때 광해군 눈에 들어온 인물이 강홍립이었다. 강홍립은 예전에 어전통사로 맹활약했는데 어전통사는 지금으로 치자면 대통령 통역관이라고 보면 된다. 광해군은 왕 직속 통역관으로 원어민 수준의 중국어를 구사하던 강홍립의 실력을 높이 샀다. 결국 도원수 한준겸 밑에서 종사관을 했고 순검사로 있었던 게 군대 경력의 전부였던 강홍립에게 1만 3천 파병군의 총사령관 자리인 오도 원수 자리를 제수한다. (p.75)


역사 교과서에는 인조반정 이후 겪는 두 번의 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은 국제정세를 파악 못해 인조 행정부가 자초한 외교적 실패라고 나와있는데 실상은 다르다. 인조반정 후 명나라와 후금은 너나 할 거 없이 인조를 비난했다. 후금은 그렇다 치고 명나라조차 인조를 비난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명나라로서는 광해군은 꽤 괜찮은 왕이었다. 핑계를 많이 대긴 했지만 군대도 파병해준 말이 통하는 군주였다. 불만이 없었단 소리다. 그런데 난데없이 인조가 등장한 것이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한때 심각하게 조선을 쳐 다시 광해군을 왕으로 앉힐까 고민할 정도였다. 덕분에 인조는 2년 넘게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지 못했다. 후금의 경우 한 수 더 떴는데 정묘호란을 광해군에 대한 복수로 내세울 정도였다. (p.82) 


인조가 비록 범상한 군주이긴 하지만 광해군에게 넘겨받은 강홍립을 끝까지 지켜준 것은 군주가 어떤 자리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당대에는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쓴 배신자였지만, 긴 역사로 본다면 강홍립은 조선을 사랑하고 군주에게 충성을 다한 충신이었다. (p.96)


효종이 세자 시절 감기에 걸렸는데 인조가 자신이 총애하던 이형익에게 침을 맞으라고 (…) 당황한 효종은 침을 맞지 않겠다며 끝까지 버텼고, 결국 효종은 자신의 병이 감기임을 증명해낸다. (…) 이형익은 소현세자 독살설의 핵심인물로 지목된 사람이다. (p.94)


효종은 산림의 거두인 양송 송시열과 송준길의 마음을 잡고 지지를 얻어내야지만 왕권을 지킬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조정 내에서 자신의 정통성과 왕위 승계를 거의 유일하게 지지했던 김자점을 버려야 했다. 김자점은 친청파였다. 명분과 의리, 예의를 중시하던 산림세력들은 곧 죽어도 반청이었다. (…) "복수설치."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하겠다는 선언! 바로 북벌을 정권의 기치로 내걸었다. (p.97)


효종은 다방면으로 엄청나게 노력했다. 북벌을 제외한 일반적인 군주로서 평가한다면 효종은 평균 이상의 성적을 냈다. (…) 경연에도 열심히 임했고, 옷차림 하나에도 검소함이 묻어났으며, 세자 때 끊은 술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입에 대지 않았다. 여색을 밝힌 것도 아니었고, 유흥을 즐기지도 않았다. 무인의 기질이 강해서 욱하는 성격이 있었지만 신하들과 종친들에게는 관용으로 대했다. 자신의 정통성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석견에게도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줬으며, 김자점이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던 이징조차도 죽이지 않았다. (…) 정치적으로도 평균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대동법을 확대시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노력했고, 부임하는 지방관들은 꼭 접견해 지방에서 해야 할 임무를 주지시켰고, 이도 못 미더웠는지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해 지방관들의 횡포를 제어하려 애썼다. (p.98)


송시열은 북벌을 에둘러 표현하는 효종 앞에서 수기치인을 말했다. 유교의 핵심 사상이 바로 수기치인이다.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이를 바탕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유교다. 옳은 말이지만 관념적이다. 효종의 입장에서는 답답했을 것이다. 실제로 북벌을 준비했든지 간에 기껏 고개를 숙이고 데려온 이가 한가롭게 수신하라는 말만 하고 있으니 앞이 막막했다. 송시열이 출사하기 직전 효종에게 보낸 상소와 십여 권의 별첨 시무책을 보면 현실정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 그러나 그는 송시열이었다. 그가 효종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효종의 행보에 힘이 실릴 수 밖에 없었다. (p.100)


(예송논쟁-체이부언) 효종이 그렇게나 송시열을 아꼈는데 결국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파렴치한으로 매도되자 송시열은 기해독대의 내용을 공개한 것이다. 효종에게 충성을 다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p.102)


1894년 일본 시마네 현의 지방지인 <산인 신문>의 울릉도 탐방기 제목이 <조선 죽도 탐방기>였다. 1894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죽도라고 불렀다. 그럼 독도는 뭐라고 불렀을까? 바로 송도다. 그런데 1905년 2월 22일 생뚱맞은 짓을 한다. (…) 울릉도를 죽도라 부르더니 이제 와선 독도를 죽도라 고 하는 것이다. 더 웃긴 건 이때부터 울릉도를 송도라 했다는 점이다. (p.107)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라고 생각한다. 미천한 군졸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강적과 겨뤄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해복했으니, 영특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포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서는 형벅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을 보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는 척박하다. 그러나 대마도는 한 조각의 농토도 없고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우환이 되어왔는데, 울릉도를 한번 빼앗기면 이것은 대마도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이니 앞으로의 앙화를 이루 말하겠는가. (p.112)


한반도의 성, 그중에서도 산성을 보면 충차를 움직이고 활용할 만한 지형이 없다. (…) 한반도는 기본적으로 화강암 토질이어서 땅을 파다 보면 돌이 나온다. 결국 한반도에서 성을 공격하기 위해선 대부분 성벽을 넘는 공격법을 택해야 했다. 이러다 보니 활만 잘 쏘면 외부의 침입을 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이는 한민족의 기본 방어 전략인 청야입보와 맞물리는데 평시엔 성을 중심으로 생활하다가 전시가 되면 적들이 사용할 물자를 싹 없애고 모든 인원과 전략 물자들을 성으로 집결시켜 방어하는 것이다. (p.127)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면 주인공 박해일이 애깃살, 즉 편전을 날리는 모습이 보인다. 국궁보다 훨씬 빠르고 파괴력도 대단한 편전은 조선군에게는 비밀병기 같은 존재였다. 설사 맞지 않았다 하더라도 보통 화살의 절반 크기인 편전은 통아가 없이는 다시 쏠 수 없기에 적들이 재활용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 보니 조선은 이 편전 기술 연마와 기밀보호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p.129)


정권을 잡은 이의방은 같은 혁명동지였던 이고와 채원 등을 제거한 뒤 완벽한 일인 독제체제를 갖춘다. 그러나 독단적이고 오만방자하게 정권을 운영하던 이의방은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살해되고 (…) 문제는 이때부터인데 정중부는 이의방의 형제였던 이준의와 이린을 포함한 백여 명의 가솔을 저자에서 참수한다. 남은 이린의 일족은 정중부의 칼날을 피해 낙향하는데 이 이린의 손자 중에 이안사가 있다. 이안사는 목조, 즉 이성계의 고조부다. 이성계는 이의방의 혈족인 것이다. (p.151)


이성계의 가별초는 최소 1천 명 이상의 병력을 자랑했고, 수많은 전장을 함께 누빈 실전 경험이 있었다. 아울러 평시에는 같은 촌락에서 농사를 짓고, 누대에 걸쳐 이성계 일족의 휘하에서 생활했기에 그 충성도 역시 여타 장군의 사병과는 차원이 달랐다. 물론 개별적 충성도는 높았겠지만 다른 장군의 사병은 소수였다. 소수일 수 밖에 없었던 건 경제력과 토지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고려 말의 활약으로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이 됐고, 그에 따른 포상금도 어마어마했다. 아울러 누대에 걸쳐 관리했던 함경도 지역에 꽤 많은 재산이 있었다. 조선이 개국할 당시 함경도 지역 토지의 1/3이 이성계의 소유였다. (p.155)


사극이나 각종 역사 사료에 등장하는 아전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먹는 부패관료의 전형처럼 그려지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의 성품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였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다. 재정상태가 극도록 허약했기에 중국에서 사신이 방문할 경우 접대비를 염출하기 위해 일반 관료의 녹봉을 깎아야 할 정도였다(1년 중 제대로 봉급을 받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을 정도였다). (…) 결국 이들은 권력을 활용해 알아서 수익을 보전해야 했다. (p.162)


고려의 사헌대와 어사대는 중서문하성 낭사로 구성돼 있었는데 오늘날로 치자면 행정부 관료 중 젊고 패기 있는 인물들만을 모아 감사원으로 파견하는 형태였다. 쉽게 말해서 독립적인 기관이 아니라 행정부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형식상으로는 재상이나 고급관료들의 부하 직원인 셈이다. (…) 아무리 사명감이 투철하다 해도 자신의 상관을 탄핵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 나오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사간원은 의정부나 6조에 속해 있지 않은 독리 기간이었다. 정승이나 판서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p.184)


<효경>에 "천자는 쟁신 7인만 있으면 비록 무도하더라도 그 천하를 잃지 않고, 제후가 쟁신 5인만 있으면 비록 무도하더라도 그 나라를 잃지 않으며, 대부가 쟁신 3인만 있으면 비록 무도하더라도 그 집을 잃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조선은 이 말뜻을 잘 알고 몸소 실천한 나라다. (p.186)


성종이 세종이나 정조에 비해 그렇게 뛰어난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닌데 꽤 괜찮은 왕으로 기억되는 이유 중 상당수는 바로 신하들의 평가 덕분이다. 성종은 신하들의 입맛에 맞는 왕이었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얼떨결에, 그러니까 한명회가 장인이란 이유만으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받는다. 즉 실권은 대비였던 정희왕후와 훈구대신들에게 있었다. 그사이 성종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유교적 덕목에 충실한 왕으로 키워진다. (…) 신하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유교적 소양을 기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최상의 가치라고 배운다. 물론 성종도 친정체제에 들어가서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왕다운 카리스마를 보여주려 하지만 번번이 신하들의 의견에 굴복하고 혼자 화를 삭이기를 반복해야 했다. 어린 시절 받았던 교육이 늘 발목을 잡은 것이다. (pp.190-191)


임금은 기본적으로 하루 다섯 끼를 먹었지만, 영조는 세 끼면 족해했다. 그마저도 육류가 아니라 채소 위주였다. 단백질은 주로 어류를 통해 섭취하였다. 영조가 현미나 잡곡을 섞은 밥을 먹었다는 것도 주목해서 봐야 한다. (…) 제일 중요한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끼니를 챙겼다는 점이다. 신하들과 회의나 토론을 하던 중이라도 식사시간만 되면 잠시 중단할 정도로 영조는 규칙적으로 식사를 했다. 이 부분은 주목해서 살펴봐야 한다. 이렇게 회의나 토론 중간에 밥을 먹는 경우 영조는 혼자 식사를 했고, 신하들은 영조가 수저를 내려놓을 때까지 그냥 기다렸다 다시 회의를 시작했다. 당연히 신하들은 배가 고픈 상화잉어서 영조의 페이스에 말려들 수 밖에 없었고, 영조는 이를 십분 활용해 자기 뜻대로 회의를 진행했다. (p.251)


영조는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 무서운 건 눈물을 타인에게까지 강요했다는 점이다. 타인의 진심은 믿지 않아도 타인의 눈물은 믿었떤 듯싶다. 사도세자에게 눈물을 흘리도록 강요했고, (…) 아이러니하게도 이 눈물이 영조의 장수를 도와줬던 것 같다. (…) 눈물을 흘리면 망간이 배출되면서 스트레스가 완화된다. (pp.254-255)


1666년 9월, 13년간의 억류 생활에서 탈출한 하멜은 네덜란드로 돌아가 조선에서의 생활을 한 권의 책으로 풀어낸다. 바로 <하멜표류기>다. 여기에 나와 있는 조선은 말 그대로 골초 국가였다. "현재 조선인들 사이에는 담배가 매우 성행하여 어린이들까지도 4, 5세 때에 이미 이를 배우기 시작하며, 그래서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p.258)


정조는 조선 시대 역대 왕 중 최고의 골초였다. 심지어는 흡연을 장려해야겠다며 신하들에게 담배 정책안 제출을 지시한 책문을 낼 정도였다. 겉으로는 쌀농사를 지어야 할 땅에 담배농사를 짓는다며 막을 방법을 찾았지만, 이를 정책으로 밀고 나가야 할 시점이 되면 흐지부지 일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 정약용도 소문난 골초였다. 오죽하면 <담배>라는 시를 지어서 귀양살이하는 사람에게는 차와 술보다 더 좋은 것이 담배라며 극찬을 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