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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서 찾아낸 조선의 민낯 - 인물과 사료로 풀어낸 조선 역사의 진짜 주인공들
이성주 지음 / 애플북스 / 2015년 6월
평점 :
이 책 서문에는 미시사로 쓰인 역사책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책의 부제('실록에서 찾아낸, 인물과 사료로 풀어낸 조선 역사의 진짜 주인공들')대로 저자가 실록에서 찾아낸 24개의 에피소드에 집중 조명하여 교과서에서 배웠던 한국사의 큰 줄기 속에서 활약한 주인공의 조력자, 사건 발단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물건, 그동안 몰랐던 사건의 전후 상황을 알려준다. 워낙 야사나 미시사를 다룬 역사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 닥치는 대로 읽어서 책 목차만 읽었을 때는 별로 새로울 내용이 없겠다 싶었는데, 몰랐던 사실들이 제법 많이 있어서 지루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게 읽었다. 아, 역시 내 역사 지식에는 부족함이 많다. 특히, <역신이 된 조선을 사랑한 스파이, 강홍립>과 <북벌의 꿈에 숨겨진 명분은 무엇인가, 효종> 편을 읽으며 인조하면 시대의 흐름을 모르던 무지한 왕, 효종하면 북벌론만 떠올리던 나의 편협한 한국사 지식을 반성하게 되었다. 시간을 내어 호란과 청나라 관련 된 책을 찾아서 읽고, 인조와 소현세자, 효종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수한 왕, 영조의 장수비결을 알아보는 <위대한 군주, 그러나 슬픈 아버지> 편도 재미있었다. 사실 나는 이미 예전에 TVN에서 방영했던 렛츠고 시간탐험대에서 왕과 내시편을 보고 조선 왕들의 스케줄과 업무 스트레스가 이토록 살인적인데, 어째서 영조는 그렇게 장수할 수 있었을까 궁금증을 가졌던 적이 있다. 영조 관련된 글을 읽다보면 검소라는 키워드가 유독 많이 도드라지던데, 아마 식습관마저도 검소해서(?) 그랬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영조 본인은 아버지인 숙종과 형 경종을 간호하는 과정에서 의학적 지식을 많이 쌓아 음식과 약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더라. 다만 이 책을 통해 영조가 자주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처음 접하고,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나한테는 영조하면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는 이미지가 강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차마 상상할 수 없어선가보다.
역사 책에 붙는 민낯이라는 단어는 연예인 쌩얼 공개라는 제목이 붙은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는 기분을 떠올리게 만든다. 백퍼센트 민낯일리 없어라고 생각하면서도 호기심이 샘솟는달까. 책 표지에 불타버린 구멍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만원권의 세종대왕 얼굴로 보인다. 그러나 만원권 화폐의 세종대왕 모습은 창작된 것이다. 책 제목은 [조선의 민낯]이라고 적혀 있는데, 책 표지의 그림은 누구를 보고 그린지도 잘 모르겠는 현행 화폐의 상상화라는 사실은 다소 안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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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화성 축성 공역 기간을 10년으로 예상했으나, 정약용은 이를 34개월 만에 끝낸다. 중간에 흉년 때문에 6개월간 공사가 중단한 걸 뺀다면 실제 기간은 28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때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거중기란 기계가 등장한다. 테렌즈가 쓴 <기기도설>에 등장하는 거중기를 개량한 것인데,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구리로 만든 기어장치를 만들 수 없어서 정약용은 대신 도르래의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이 거중기는 40근의 힘으로 625배나 되는 2만 5천 근의 돌을 들어 올릴 수 있었는데 이는 중국의 기중기보다 네 배 더 성능이 좋았다. (p.27)
일단 공신으로 책봉되면 왕과 공신들은 피의 결속을 다지며 서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다. '삽혈'이라고 해서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피를 입 옆에 바르며 다짐하는데 이는 회맹제의 핵심이다. 왕조국가에서 왕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인데 이런 왕이 입가에 피를 묻혀가며 맹세를 할 정도로 챙긴다면 이 신하들이 세운 공이 만만치 않음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p.31)
임진왜란 7년의 기간 동안 기록으로 채집된 단위 전투 105회 가운데 조선 관군 단독 또는 의병이 참여한 전투가 87회, 의병 단독 또는 관군이 참여한 전투가 18회였고, 명군의 전투는 고작 8회뿐이었는데 그나마도 모두 조선 관군과의 연합작전이었다. 그것도 평양성 탈환작전과 정유재란 최후의 공격전을 제외하고는 매우 소극적인 전투였다. 105회의 전황을 분석해보면 조선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투가 68회였다. 이것만 봐도 조선군이 매우 공격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승패 또한 조선군 측 승리가 65회, 패배 40회로 전쟁 기간 동안 개전 초 1년을 제외하고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압박하던 상황이었다. (p.35)
원균을 2등에 녹공해놓았다마는, 적변이 발생했떤 초기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해주기를 청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을 토벌할 적에 원균이 죽기로 결심하고서 매양 선봉이 되어 먼저 올라가 용맹을 떨쳤다. 승전하고 노회한 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그 노획한 적괴와 누선을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중략) 나는 원균이 지혜와 용기를 구비한 사람이라고 여겨왔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운명이 시기와 어긋나서 공도 이루지 못하고 일도 실패하여 그의 역량이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1603년 6월 26일 기록 중 발췌 (p.48)
인조~현종)20여 년 동안 다섯 차례나 영의정 자리에 올랐고, 이 기간 동안 무려 37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렸던 정태화. 능력도 능력이지만 관리로서의 처세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점이다. 사직 상소로 자신의 결백과 무욕을 증명하려 한 점은 이해가 가지만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그 진퇴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처신을 잘한다 말하고, 사관이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행동하고 국사를 제대로 담당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라고 기록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p.58)
"무슨 죄인가? (중략) 벼슬을 꼭 해야겠는데 스스로 이룰 능력이 없어 권신을 가까이하다가 (중략) 여러 사람들이 성을 내어 하루아침에 형세가 가버려서 결국 이렇게 죄를 얻게 된 것인가?" 정도전이 자기 죄는 아니라 말하자, "자기 몸만 온전히 하고 처자나 보호하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중략) 그만 간사한 것이 드러나고 죄가 발각되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인가?" 이후에도 문답은 이어지는데 이 문답의 주인공 등에는 진흙이 묻어있고 손에는 호미를 들고 김을 매고 있는 농부였던 것이다. (p.69)
처음에 유배됐을 때만 하더라도 정도전은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겼지만 곧 자기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확인한다. 백성들은 지배자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멍청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우둔함을 넘어서 유학자들 이상의 탁견을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충격적인 건 백성들의 삶이었는데, 많이 배우고 또 그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던 정도전은 자신이 배운 성리학으로 세상을 바라봤고 관료적인 생각으로만 백성들을 대했다. (p.69)
유배지에서 정도전은 고민을 한다. (…) 왜 정의로운 자는 곤궁하고 불의한 자는 부귀한가. (…) 정도전은 이 '정의'에 대해 고민하다 <심문천답>이라는 철학책을 쓴다. 핵심은 선악의 인과응보는 하늘의 뜻이 아니라 인간 각자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정의로운 자가 곤궁하고 선한 자가 화를 입는 건 시대나 사회의 탓이 아니라 사람들의 지혜와 성심이 부족해서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마음을 정리한 정도전은 본격적인 유랑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함주 막사 회동을 실행한다. (p.70)
실리주의 노선을 택한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명나라와 연합작전을 해야 한다. 말 안 통하는 용맹한 장수보다는 중국어를 잘하는 똑똑한 문신이 낫다"란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때 광해군 눈에 들어온 인물이 강홍립이었다. 강홍립은 예전에 어전통사로 맹활약했는데 어전통사는 지금으로 치자면 대통령 통역관이라고 보면 된다. 광해군은 왕 직속 통역관으로 원어민 수준의 중국어를 구사하던 강홍립의 실력을 높이 샀다. 결국 도원수 한준겸 밑에서 종사관을 했고 순검사로 있었던 게 군대 경력의 전부였던 강홍립에게 1만 3천 파병군의 총사령관 자리인 오도 원수 자리를 제수한다. (p.75)
역사 교과서에는 인조반정 이후 겪는 두 번의 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은 국제정세를 파악 못해 인조 행정부가 자초한 외교적 실패라고 나와있는데 실상은 다르다. 인조반정 후 명나라와 후금은 너나 할 거 없이 인조를 비난했다. 후금은 그렇다 치고 명나라조차 인조를 비난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명나라로서는 광해군은 꽤 괜찮은 왕이었다. 핑계를 많이 대긴 했지만 군대도 파병해준 말이 통하는 군주였다. 불만이 없었단 소리다. 그런데 난데없이 인조가 등장한 것이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한때 심각하게 조선을 쳐 다시 광해군을 왕으로 앉힐까 고민할 정도였다. 덕분에 인조는 2년 넘게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지 못했다. 후금의 경우 한 수 더 떴는데 정묘호란을 광해군에 대한 복수로 내세울 정도였다. (p.82)
인조가 비록 범상한 군주이긴 하지만 광해군에게 넘겨받은 강홍립을 끝까지 지켜준 것은 군주가 어떤 자리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당대에는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쓴 배신자였지만, 긴 역사로 본다면 강홍립은 조선을 사랑하고 군주에게 충성을 다한 충신이었다. (p.96)
효종이 세자 시절 감기에 걸렸는데 인조가 자신이 총애하던 이형익에게 침을 맞으라고 (…) 당황한 효종은 침을 맞지 않겠다며 끝까지 버텼고, 결국 효종은 자신의 병이 감기임을 증명해낸다. (…) 이형익은 소현세자 독살설의 핵심인물로 지목된 사람이다. (p.94)
효종은 산림의 거두인 양송 송시열과 송준길의 마음을 잡고 지지를 얻어내야지만 왕권을 지킬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조정 내에서 자신의 정통성과 왕위 승계를 거의 유일하게 지지했던 김자점을 버려야 했다. 김자점은 친청파였다. 명분과 의리, 예의를 중시하던 산림세력들은 곧 죽어도 반청이었다. (…) "복수설치."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하겠다는 선언! 바로 북벌을 정권의 기치로 내걸었다. (p.97)
효종은 다방면으로 엄청나게 노력했다. 북벌을 제외한 일반적인 군주로서 평가한다면 효종은 평균 이상의 성적을 냈다. (…) 경연에도 열심히 임했고, 옷차림 하나에도 검소함이 묻어났으며, 세자 때 끊은 술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입에 대지 않았다. 여색을 밝힌 것도 아니었고, 유흥을 즐기지도 않았다. 무인의 기질이 강해서 욱하는 성격이 있었지만 신하들과 종친들에게는 관용으로 대했다. 자신의 정통성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석견에게도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줬으며, 김자점이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던 이징조차도 죽이지 않았다. (…) 정치적으로도 평균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대동법을 확대시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노력했고, 부임하는 지방관들은 꼭 접견해 지방에서 해야 할 임무를 주지시켰고, 이도 못 미더웠는지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해 지방관들의 횡포를 제어하려 애썼다. (p.98)
송시열은 북벌을 에둘러 표현하는 효종 앞에서 수기치인을 말했다. 유교의 핵심 사상이 바로 수기치인이다.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이를 바탕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유교다. 옳은 말이지만 관념적이다. 효종의 입장에서는 답답했을 것이다. 실제로 북벌을 준비했든지 간에 기껏 고개를 숙이고 데려온 이가 한가롭게 수신하라는 말만 하고 있으니 앞이 막막했다. 송시열이 출사하기 직전 효종에게 보낸 상소와 십여 권의 별첨 시무책을 보면 현실정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 그러나 그는 송시열이었다. 그가 효종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효종의 행보에 힘이 실릴 수 밖에 없었다. (p.100)
(예송논쟁-체이부언) 효종이 그렇게나 송시열을 아꼈는데 결국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파렴치한으로 매도되자 송시열은 기해독대의 내용을 공개한 것이다. 효종에게 충성을 다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p.102)
1894년 일본 시마네 현의 지방지인 <산인 신문>의 울릉도 탐방기 제목이 <조선 죽도 탐방기>였다. 1894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죽도라고 불렀다. 그럼 독도는 뭐라고 불렀을까? 바로 송도다. 그런데 1905년 2월 22일 생뚱맞은 짓을 한다. (…) 울릉도를 죽도라 부르더니 이제 와선 독도를 죽도라 고 하는 것이다. 더 웃긴 건 이때부터 울릉도를 송도라 했다는 점이다. (p.107)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라고 생각한다. 미천한 군졸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강적과 겨뤄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해복했으니, 영특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포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서는 형벅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을 보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는 척박하다. 그러나 대마도는 한 조각의 농토도 없고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우환이 되어왔는데, 울릉도를 한번 빼앗기면 이것은 대마도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이니 앞으로의 앙화를 이루 말하겠는가. (p.112)
한반도의 성, 그중에서도 산성을 보면 충차를 움직이고 활용할 만한 지형이 없다. (…) 한반도는 기본적으로 화강암 토질이어서 땅을 파다 보면 돌이 나온다. 결국 한반도에서 성을 공격하기 위해선 대부분 성벽을 넘는 공격법을 택해야 했다. 이러다 보니 활만 잘 쏘면 외부의 침입을 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이는 한민족의 기본 방어 전략인 청야입보와 맞물리는데 평시엔 성을 중심으로 생활하다가 전시가 되면 적들이 사용할 물자를 싹 없애고 모든 인원과 전략 물자들을 성으로 집결시켜 방어하는 것이다. (p.127)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면 주인공 박해일이 애깃살, 즉 편전을 날리는 모습이 보인다. 국궁보다 훨씬 빠르고 파괴력도 대단한 편전은 조선군에게는 비밀병기 같은 존재였다. 설사 맞지 않았다 하더라도 보통 화살의 절반 크기인 편전은 통아가 없이는 다시 쏠 수 없기에 적들이 재활용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 보니 조선은 이 편전 기술 연마와 기밀보호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p.129)
정권을 잡은 이의방은 같은 혁명동지였던 이고와 채원 등을 제거한 뒤 완벽한 일인 독제체제를 갖춘다. 그러나 독단적이고 오만방자하게 정권을 운영하던 이의방은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살해되고 (…) 문제는 이때부터인데 정중부는 이의방의 형제였던 이준의와 이린을 포함한 백여 명의 가솔을 저자에서 참수한다. 남은 이린의 일족은 정중부의 칼날을 피해 낙향하는데 이 이린의 손자 중에 이안사가 있다. 이안사는 목조, 즉 이성계의 고조부다. 이성계는 이의방의 혈족인 것이다. (p.151)
이성계의 가별초는 최소 1천 명 이상의 병력을 자랑했고, 수많은 전장을 함께 누빈 실전 경험이 있었다. 아울러 평시에는 같은 촌락에서 농사를 짓고, 누대에 걸쳐 이성계 일족의 휘하에서 생활했기에 그 충성도 역시 여타 장군의 사병과는 차원이 달랐다. 물론 개별적 충성도는 높았겠지만 다른 장군의 사병은 소수였다. 소수일 수 밖에 없었던 건 경제력과 토지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고려 말의 활약으로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이 됐고, 그에 따른 포상금도 어마어마했다. 아울러 누대에 걸쳐 관리했던 함경도 지역에 꽤 많은 재산이 있었다. 조선이 개국할 당시 함경도 지역 토지의 1/3이 이성계의 소유였다. (p.155)
사극이나 각종 역사 사료에 등장하는 아전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먹는 부패관료의 전형처럼 그려지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의 성품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였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다. 재정상태가 극도록 허약했기에 중국에서 사신이 방문할 경우 접대비를 염출하기 위해 일반 관료의 녹봉을 깎아야 할 정도였다(1년 중 제대로 봉급을 받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을 정도였다). (…) 결국 이들은 권력을 활용해 알아서 수익을 보전해야 했다. (p.162)
고려의 사헌대와 어사대는 중서문하성 낭사로 구성돼 있었는데 오늘날로 치자면 행정부 관료 중 젊고 패기 있는 인물들만을 모아 감사원으로 파견하는 형태였다. 쉽게 말해서 독립적인 기관이 아니라 행정부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형식상으로는 재상이나 고급관료들의 부하 직원인 셈이다. (…) 아무리 사명감이 투철하다 해도 자신의 상관을 탄핵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 나오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사간원은 의정부나 6조에 속해 있지 않은 독리 기간이었다. 정승이나 판서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p.184)
<효경>에 "천자는 쟁신 7인만 있으면 비록 무도하더라도 그 천하를 잃지 않고, 제후가 쟁신 5인만 있으면 비록 무도하더라도 그 나라를 잃지 않으며, 대부가 쟁신 3인만 있으면 비록 무도하더라도 그 집을 잃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조선은 이 말뜻을 잘 알고 몸소 실천한 나라다. (p.186)
성종이 세종이나 정조에 비해 그렇게 뛰어난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닌데 꽤 괜찮은 왕으로 기억되는 이유 중 상당수는 바로 신하들의 평가 덕분이다. 성종은 신하들의 입맛에 맞는 왕이었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얼떨결에, 그러니까 한명회가 장인이란 이유만으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받는다. 즉 실권은 대비였던 정희왕후와 훈구대신들에게 있었다. 그사이 성종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유교적 덕목에 충실한 왕으로 키워진다. (…) 신하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유교적 소양을 기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최상의 가치라고 배운다. 물론 성종도 친정체제에 들어가서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왕다운 카리스마를 보여주려 하지만 번번이 신하들의 의견에 굴복하고 혼자 화를 삭이기를 반복해야 했다. 어린 시절 받았던 교육이 늘 발목을 잡은 것이다. (pp.190-191)
임금은 기본적으로 하루 다섯 끼를 먹었지만, 영조는 세 끼면 족해했다. 그마저도 육류가 아니라 채소 위주였다. 단백질은 주로 어류를 통해 섭취하였다. 영조가 현미나 잡곡을 섞은 밥을 먹었다는 것도 주목해서 봐야 한다. (…) 제일 중요한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끼니를 챙겼다는 점이다. 신하들과 회의나 토론을 하던 중이라도 식사시간만 되면 잠시 중단할 정도로 영조는 규칙적으로 식사를 했다. 이 부분은 주목해서 살펴봐야 한다. 이렇게 회의나 토론 중간에 밥을 먹는 경우 영조는 혼자 식사를 했고, 신하들은 영조가 수저를 내려놓을 때까지 그냥 기다렸다 다시 회의를 시작했다. 당연히 신하들은 배가 고픈 상화잉어서 영조의 페이스에 말려들 수 밖에 없었고, 영조는 이를 십분 활용해 자기 뜻대로 회의를 진행했다. (p.251)
영조는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 무서운 건 눈물을 타인에게까지 강요했다는 점이다. 타인의 진심은 믿지 않아도 타인의 눈물은 믿었떤 듯싶다. 사도세자에게 눈물을 흘리도록 강요했고, (…) 아이러니하게도 이 눈물이 영조의 장수를 도와줬던 것 같다. (…) 눈물을 흘리면 망간이 배출되면서 스트레스가 완화된다. (pp.254-255)
1666년 9월, 13년간의 억류 생활에서 탈출한 하멜은 네덜란드로 돌아가 조선에서의 생활을 한 권의 책으로 풀어낸다. 바로 <하멜표류기>다. 여기에 나와 있는 조선은 말 그대로 골초 국가였다. "현재 조선인들 사이에는 담배가 매우 성행하여 어린이들까지도 4, 5세 때에 이미 이를 배우기 시작하며, 그래서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p.258)
정조는 조선 시대 역대 왕 중 최고의 골초였다. 심지어는 흡연을 장려해야겠다며 신하들에게 담배 정책안 제출을 지시한 책문을 낼 정도였다. 겉으로는 쌀농사를 지어야 할 땅에 담배농사를 짓는다며 막을 방법을 찾았지만, 이를 정책으로 밀고 나가야 할 시점이 되면 흐지부지 일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 정약용도 소문난 골초였다. 오죽하면 <담배>라는 시를 지어서 귀양살이하는 사람에게는 차와 술보다 더 좋은 것이 담배라며 극찬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