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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는 그리스 신화 - 번뜩이는 지성과 반짝이는 감성으로 나를 포장하자 ㅣ 눈으로 보는 시리즈
모리 미요코 외 지음, 박유미 옮김 / 인서트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그리스 로마 이야기는 구전된 '신화'다보니 책마다 수록된 에피소드가 다르고 결말도 조금씩 달라 항상 새 책을 읽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도서관이나 책방에서 표지가 다른 그리스 로마 신화 책을 찾으면 찾는 족족 읽곤 했다. 그 결과로 집에 가지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책이 이 책을 포함해서 여섯권이나 된다. 7월에 읽었던 인서트에서 나온 [눈으로 보는 셰익스피어]가 꽤 괜찮았기 때문에 이 책의 서평단을 신청하게 되었는데, 이 책은 기대했던 것보다 수록된 명화가 많지 않은데다 명화와 글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어서 전작보다 다소 아쉬운 생각이 든다. 책 제목에 "눈으로 읽는"다는 키워드가 들어가니만큼 신화 줄거리 소개와 더불어 그림 속에 해당 그리스 신을 알아보는 상징물을 친절히 일러주고, 화가들이 어떤 의도로 해당 신화를 차용해 그림을 그렸는지, 신화 그림은 어느 시대에 유행했는지 등을 소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신은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많지 않지만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불의 여신 헤스티아&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베르툼누스와 포모나,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에로스와 프쉬케다.
베르툼누스와 포모나 이야기는 다루고 있는 책이 많지 않은데(그리스 신화만을 다루는 이 책은 로마의 신인 베르툼누스와 포모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다.), 베르툼누스는 예전에 만화 잡지 파티에서 박정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 처음 접했던 계절의 신이다. 그는 계절의 신답게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해 과수원 일을 관장하는 요정 포모나에게 접근했고, 연애놀음에는 관심이 없는 포모나에게 사랑을 깨우치고자 이피스의 사랑을 거절하고 돌이 되어버린 아낙사레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베르툼누스와 포모나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2894&cid=41869&categoryId=41869)
베르툼누스와 포모나 이야기 못지 않게 나는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쳐오고, 뼈는 신에게, 살코기는 인간에게 주기 위해 주신을 속여 평생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던 티탄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 역시 좋아하는데, 어느 책에서는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의 꾀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애초 영원히 썩지 않는 뼈를 신에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썩고 부패하는 살코기는 인간에게 부여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만든 창조신이자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들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영웅으로, 어찌 보면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신, 제우스보다 더 위대하고 고귀한 신이다. 우리가 손가락에 끼는 반지의 원형은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쇠고랑 대신 찼던 돌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반지를 보며 그의 고생과 고마움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서란다.
프쉬케와 에로스를 그린 명화는 유럽 미술관 순례를 돌면서 수도 없이 본 것 같다. 나는 코톨드 갤러리에서 보았던, 프쉬케가 촛불을 켜 잠든 에로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장면이 매우 인상깊다. 에로스는 의심이 깃든 곳에 사랑이 머물 수 없다며 자신이 부탁을 저버린 프쉬케를 원망하며 그녀를 떠나가지만, 나는 프쉬케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남편이 나에게 뭔가 숨기는 게 있는데, 비밀이 있는 곳에 어떻게 완전한 믿음이 생길 수 있겠고, 믿음이 없는 곳에 사랑이 싹틀 수 있겠느냐고? 프쉬케는 남편처럼 똑같이 남편의 잘못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남편이 비난한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생각하며 가슴 치며 후회, 반성한 뒤, 남편을 되찾기 위해 용기내어 아프로디테를 찾아가 엎드려 용서를 빈다. 자신의 명성과 사랑하는 아들을 상처입힌 프쉬케를 증오하는 아프로디테는 인간인 프쉬케가 결코 완수하기 힘든 위험천만한 명령만을 내리지만 프쉬케는 도망치지 않고 그 시련을 혼자서 계속 감내해냄으로써(물론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의 서포트가 비밀리에 존재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자신의 사랑을 되찾는다. 프쉬케는 내가 알기로 인간에서 신이 된 유일한 여자로, 제우스의 공증(?) 하에 에로스의 영원하고 유일한 반려자로 알려져있다. 프쉬케와 에로스의 사랑은 "서로의 미모에 반해 한눈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모두의 응원과 축복 속에서 결혼해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오히려 실수하고, 의심하고, 싸우고, 불완전했던 과정을 통해 서로에 대해 신뢰를 쌓아간 지극히 '인간적인' 우리네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내게 큰 여운을 남긴다.
코톨드 갤러리 :: http://jaera1990.blog.me/220330213934
그리스 로마 신화 자체로서는 지극히 평면적이고 진부한 이야기 모음집이다. 성인 남성만을 시민으로 치던 당시 그리스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보니 수많은 편견과 남녀불평등이 이야기에 범벅 되어 있어, 서양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교양서로의 가치는 인정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가치관을 형성하는 나이 대에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지정되기에 합당한지 늘 의문이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고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잘못 정의될 수 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고전을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는 재독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남자영웅들의 이야기로 인식되었던 [트로이 전쟁]을 능동적인 여성캐릭터 카산드라와 헬레네를 주인공으로 세워 고전 비틀기를 시도한, 다음에서 연재중인 이하진씨의 [카산드라]를 강력 추천하고 싶다. 신화가 역사로 바뀌는 순간, 우리가 문자 그대로 인식했던 스토리가 색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