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과학의 화해 - 급진적 종교 개혁파의 관점에서 본
낸시 머피 지음, 김기현.반성수 옮김 / 죠이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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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기독교는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 힘으로 철학을 신학의 하녀로 취급했었다. 과학이 신학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 KO승을 거두었다. 갈릴레이는 살기 위해 그의 과학적 주장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처럼 신학은 모든 것 위에 군림했었다. 그러나 그 후, 과학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종교는 과학의 펀치들을 맞기 시작했다. 그래도 헤비급이었던 기독교는 아직 저력이 있었다. 20세기 초, 미국의 스코프스 재판에서 기독교는 과학에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제는 과학이 헤비급 챔피언이다. 과학은 세상을 설명하는 최고의 지식의 자리에 올랐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성경에서 과학을 찾아내고 그것을 근거로 현대의 과학을 무시해왔다. 그런 기독교를 비과학적이고 몰상식한 종교집단으로 치부하는 목소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자 기독교는 틈새의 신처럼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찾아내 거기에서 신학의 명분을 주장한다. 삶의 고통의 문제, 사후의 문제, 심지어 축사와 신유의 능력으로 기독교의 능력을 과시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과학의 시대에 신학은 설득력을 잃어갈 뿐이다.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가장 흔한 두 견해는 갈등 모델두 세계 모델이다. 갈등 모델은 서로 옳다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이다. 결국 최후 승자만 남게 되는 것이다. 두 세계 모델은 서로 독립성을 인정하고 갈등하지 말자는 것이다. 서울대 우종학 교수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단체를 통해 말 그대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과학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고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더 이해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 통합 모델이 있는데, 이는 과학 이론이 신학적으로 충분히 설명되고 수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풀러 신학교 교수인 낸시 머피는 <신학과 과학의 화해>에서 통합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하나의 과학과 또 다른 과학의 관계로 말한다. 그래서 신학을 과학으로서의 신학”(2)으로 명명한다. 신학과 과학 사이에 상호 존중과 배움을 주장한다. 과학의 진보에 따라 때로 신학을 수정해야 하고, 때로 신학은 과학의 결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과 과학을 아우르는 세계관이 무신론의 세계관보다 일관성 있으며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16)고 주장한다.

 

이 책의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급진적 종교개혁파의 관점이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여느 종교개혁파들이 칭의론을 강조한 반면, 급진적 종교개혁파들은 제자도평화주의를 강조했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가 나아갈 방향성을 고려할 때, 급진적 종교개혁파가 그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신뢰가 생긴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기독교 진리의 포괄성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동안 기독교와 과학의 대화를 시도한 여러 저자들에 비해 이 책은 신학이 과학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역자 후기를 읽을 것을 추천한다. 역자의 간결하고 쉬운 설명은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역자의 입장에 대한 설명은 이 책의 주장에 대해 무조건적인 동의와 수용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편안하게 저자의 주장을 볼 수 있게 한다. 그 다음에 1장을 읽으면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려는 핵심을 이해할 수 있다. 얇지만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목표로 한 어느 책보다 무게감이 있다. 또한, 여느 책들의 접근과는 다른 차원에서 신학이 과학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상호 공존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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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 구절 - 말씀이 삶이 되다
김기현 외 지음 / 잉클링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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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완서가 아들의 죽음을 겪으면서 기록한 일기문인 <한 말씀만 하소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그 침묵에 얼마나 분노하고, 얼마나 답답했을까. 아들을 잃은 어미에게 하나님인들 무슨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을까. 욥의 친구들의 잘못을 하나님이 반복하실 리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욕을 먹어가면서도 박완서 작가에게 침묵으로 일관하셨을게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성경 66권을 통해 침묵 속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신다. <내 인생의 한 구절>에 나오는 17명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들이 고백하는 내 인생의 한 구절은 그들이 발버둥치며 걸어와야 했던 길을 벗어나도록 도와준 동아줄과 같았다. 삶의 고통, 절망의 심연으로 깊이 빠져들어갈 때, 그 동아줄이 있었기에 그들은 그 수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서문을 쓰신 김기석 목사는 그들의 글에서 피 맛을 느꼈다고 했다. 그렇다. 철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삶에 한 구절의 말씀이 찾아와 지혈을 하고, 그 상처를 싸매고 치료해주었다. 성경 66권이 다 중요하겠지만, 그 절박한 상황에서는 단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한 말씀이 그들의 인생을 바꿨고, 지독한 고통에서 구원의 빛으로 다가왔다. 말씀은 진정 그 자체로 치유와 권능이 있음을 그들은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침묵하기도 하시지만, 그보다는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침묵은 특별한 의미이다. 그 말씀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능력있고, 위로의 메시지로 다가오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엘리야에게 남은 자 칠천 명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말씀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배부르게 맛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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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 -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을 바라보며, 세상의 별이 된 다니엘처럼 청년이 희망이다 3
조영민 지음 / 죠이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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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이 있다. 교회는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교회는 세상 속에 있었다. 교회에서 코로나 집단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주변 사회가 불안해하고 교회를 욕하고, 심지어 일부 회사와 공무원들은 주일에 교회에 나가는 것을 금하기도 하였다. 예전처럼 종교는 사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세상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불가침의 영역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코로나 방역에 대한 소극적 대처와 태극기 집회에 다수의 기독교인이 참여하는 것으로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는 추락하였고, 점차 세상의 주변부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이제 세상의 중심에서 기독교의 외침 소리를 듣기는 어렵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는 비전은 옛말이 되었고, 소외와 멸시 속에 동시대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새롭게 풀어야 할 숙제가 생겼다.

 

조영민 목사는 다니엘을 통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도전한다. 그의 다니엘 설교집인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적대와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분리되어서도, 그렇다고 세상과 동화되어 살아도 안된다고 강조한다. 조 목사는 세상을 살되, 세상에 선을 긋는 신앙의 길로 우리에게 도전한다.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처럼,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그들이 신앙의 원리를 견고히 붙들고 정체성을 온전히 지키며3의 길을 걸어갈 때, 그 걸음이 은혜의 통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보통 다니엘 6장까지의 설교는 많이 하지만, 7장부터 12장까지는 묵시문학적 성격때문인지 교회에서 설교자들이 잘 설교하지 않는다. 조 목사는 다니엘 1-6장을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하는 삶으로 묶은 반면, 7-12장을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하는 꿈으로 묶었다. 두 부분을 명확하게 그 주제를 구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의 내용 또한 오늘의 코로나 시대에 적용하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

 

조 목사의 이 책은, 코로나 시대의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고, 주변부로 밀려나는 교회에 대해 염려하는 우리의 마음이, 다니엘을 통해 여전히 교회는 이 시대의 별이라는 희망과 격려를 주고 있다. 오늘의 세상 속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이에게 읽기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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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말을 건네다
황진숙 지음 / 부크크(book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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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열풍이 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입시를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써의 인문학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인문학은 인간을 알고 세상을 알아가고자 하는 진실함이다. 인간다운 삶이 무엇이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질문하게 하는 책은 결코 수준 높은 철학책만은 아니다.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그림책을 통해 그 순수와 감동을 맛보여주는 현직 교사가 있다.

 

그림책이 말을 건네다의 저자 황진숙은 아이들과 그림책 수업을 하는 초등학교 수석교사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20편의 그림책에 대한 자신의 감상과 사유를 보여줌과 동시에 각각의 그림책들을 활용해 어떻게 아이들과 수업을 진행했는지 보여준다. 그의 수업 시간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주입식과는 거리가 멀다. 아이들에게 질문하면 아이들은 생각하고 답할 뿐 아니라, 아이들은 스스로 질문하고 글로 자신의 감상을 표현한다. 그림책에 대한 정해진 해석을 강요하지도 않고, 아이들 저마다의 해석과 느낌을 존중한다.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분출하는 열정과 신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림책이 말을 건네다에는 아이들의 관찰하는 눈이 보인다. 그림책을 적극적으로 관찰하는 생기있는 눈망울들이 보인다. 한 마디로 관찰 독서이다. 저자는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면 바로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 주위에 선물처럼 주어진 모든 것들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희망하는 저자의 마음이 따뜻하다.

 

이 시대의 무서움은 무관심이라 할 수 있다. 타인의 아픔에 대한 무관심과 공감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 그런 무관심은 시대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묻지 못하고, 묻지 않으니 나아지지 않는다. 관찰하고 질문하는 것. 그것이 인문학의 출발일 것이다. 세상과 인간을 알아가는 지평을 넓힘으로써 삶을 풍성하게 살아가기 위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 삶의 요소이다. 저자는 아이들에게 그러한 삶 교육을 하고 있다.

 

그림책이 말을 건네다는 그림책이란 영유아기 아이들만을 위한 책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게 한다. 저자가 아이들과 나누었던 그림책들 하나하나가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저자의 말처럼, “그림책은 0세에서 100세까지 읽는 책이고 그 속에서 삶을 돌아보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아이들을 대하는 부모와 교사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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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아타나시우스 지음, 피넬로피 로슨.오현미 옮김 / 죠이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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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유명한 조직신학자인 다니엘 밀리오리의 <조직신학 개론>이 조폭의 어깨처럼 덩치를 자랑하고 있다. 양장본에 그 두께와 사이즈가 아타나시우스의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는 백두장사 앞에 서 있는 금강장사 씨름 선수를 보는 것 같다. 골리앗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 같다. 나 역시 골리앗의 가소롭다는 심정으로 아타나시우스의 책의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C.S.루이스의 서문이 나의 편견을 흔들어 털어낸다. 그는 이 책을 극찬하며 말한다. “요즘 나오는 책과 옛날 책 중 한 가지를 읽어야 한다면, 나는 옛날 책을 읽으라고 독자에게 권할 것이다루이스는 플라톤의 1차 자료를 읽는 것보다 그것에 대한 현대의 자료들을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면서, 위대한 사람은 바로 그 위대함 때문에 현대 주석가들의 글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고 한다. 그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고픈 마음과 함께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인 아타나시우스가 마카리우스(Macarius)라는 가상의 인물에게 말씀이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일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해주는 방식인데, 이는 누가가 데오빌로를 위해 기록했던 누가복음을 생각나게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4세기에 아리우스 논쟁으로 교회가 시끄러웠을 때, 완전무결한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일갈했다. 그는 여러 반론들과 질문들에 대한 변증적 설명을 통해 성육신의 필연성을 확증해주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다각도적인 반론들과 답변은 질문하는 신앙을 통한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보여준다. 무조건 믿는 신앙이 아니라, 믿기 위해 이해하는 초기 기독교 신앙의 사이다같은 시원함을 맛보게 한다.

 

육신이 없으신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심으로써 몸은 성전이 되었다. 죽음을 종식시키기 위해 죽음을 기다리셨으며 이 죽음을 서둘러 성취하셨다. 생명의 성전은 죽음 후에 그 몸을 다시 살려내어 영원히 썩지 않는 몸이 되었다. 말씀이 내주하시는 몸은 그 생명의 충만함을 통해 몸의 본질인 썩음을 성결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상실한 인간의 몸이 되어 그 몸으로 보여주시는 신적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지식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셨다.

 

모든 철학은 소크라테스 철학의 주석이라 하지 않는가. 현대 기독교의 기독론과 구원론은 아타나시우스의 이 책에 대한 각주에 불과할 것이다. 밀리오리의 두꺼운 조직신학이 더 깊이가 있을 것이라 착각하지 마라. 이 얇은 교리적 책을 읊조르며 읽다 보면 그 어느 경건 서적보다 경건 생활에 큰 힘이 되고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광대하심과 그 영광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다니엘 밀리오리 앞에 서 있는 아타나시우스는 골리앗 앞에 서 있는 다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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