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소포스의 책 읽기 - 철학의 숲에서 만난 사유들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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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2025, 교양인)


1. 경지에 도달한 이의 아우라


고명섭이 돌아왔다. 바라만 봐도 함께 구만리장천을 나는 듯 황홀한 식견의 높이와, 이미 익숙한 문사철의 뭇 주제를 다룸에도 매번 새로운 설렘의 폭풍 가운데로 독자를 이끌어가는 압도적인 필력, 모두 여전하다.


그의 이력은 엘리트 지식인의 전형이면서도 크고작은 의외성을 보인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나, 한겨레의 기자로 자리잡았다. 기자로만 일하려는가 싶더니, 돌연 전공자들도 접근하기 만만찮은 하이데거에 천착한 헤비급의 저서로 작가 데뷔에 성공했다. 뒤미처 니체 탐구서까지 내며 철학 전문 저술가로 자리매김하는가 할 때쯤, 웬만한 애서가도 범접하기 힘들만큼 방대한 자신의 독서 세계를 갈무리하여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이번의 신작 역시 『즐거운 지식』(2011, 사계절), 『생각의 요새』(2023, 교양인)를 잇는 치열한 서평의 모음집이다.


2. 그가 읽은 책들이 이루는 물결


니체의 사유와 오딧세우스의 일화를 빌어 (제목에도 쓰인) '필로소포스' 즉 지혜를 찾는 인간을 규정하는 서문. 그 단출하면서도 절박한, 세상과 우주를 알고자 하는 근원적 욕구의 진정성이 묻어나는 현관을 열어젖히면 독자는 곧장 근래 고명섭의 사유에 동반자 역할을 했던 책들의 현란한 의미망으로 안내된다. 일부 예외가 있으나, 대부분의 책마다 200자 원고지 15페이지 안팎의 분량을 할애하여 균형감 있게 서술했다. 그렇게 모인 독서의 기록이 이번의 신작에서만 자그마치 76권에 달한다.


먼저 제1장, <동일성에도 차이에도 머무르지 마라>에서는 2차대전 이후의 대륙철학을 주로 소개한다. 타자와 객체, 신과 윤리 등의 주제를 조금씩 건드리며 문제의식의 테두리를 잡아간다. 근대 이후 서구 문명을 견인해온 계몽주의적·합리적·수학적 사고의 어두운 면모(개체의 특수성의 말살과 전체주의로 향할 위험성)를 여러 현대철학자들의 입을 빌어 비판한다.


제2장, <우주는 생각하는 거대한 뇌일까>에서는 자연과학 특히 양자역학이 드러내는 우리 우주의 여러 비직관적인 면모를 짚은 뒤, 그를 바탕으로 우주론과 인식론을 전개하는 책들이 두드러진다. 명백히 비주류이며, 도전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을 담은 저서들의 향연이다.


제3장, <영혼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에서 고명섭은 다시 서구 고전 시대로 돌아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인류의 지혜의 우물을 들여다본다. 사제 관계로 맺어진 아테네의 두 거인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주저를 집중하여 반추한 다음, 그것들의 현대적 적용에 대한 각종 해석을 시도한 학자들의 지적 투쟁사를 펼쳐보인다. 


마지막 제4장, <영성과 개벽의 정치를 찾아서>는 본격적인 현실정치의 영역에 발걸음을 내딛는 책들로 가득하다. 오늘날까지 유의미한 주요 정치 이론, 통치 이념, 국가관 등의 모태가 된 시대적 상황들과 각자 처한 위치에서 최선의 답을 내려 암중모색했던 사상가들의 이야기다. 고명섭의 시선은 서구에서 동양으로, 동양에서 동북아로, 동북아에서 우리나라로 향하여 종국에는 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통관하기에 이른다.


3. 수십 권의 책으로 빚어낸 한 권의 책


이러한 사유의 우주를 장별로 조망하며 드문 경험을 했다. 고명섭은 분명 팔십여 권에 달하는 책들의 골자만을 소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흐름을 종합하여 따르다 보면 얼핏얼핏 그 주장들을 엮어 자신의 고유한 의견을 새로이 형성해가는 듯한 신비로운 인상을 받은 것이다. 이를테면, 소개된 각각의 책에서 한두 문장씩을 골라 연결해보니 그것이 또다른 가치 있는 의견으로 질적인 승화를 일으키는 듯한 기이한 광경을 목도한 셈. 수많은 명저들로 구성해낸 정신의 모자이크, 그것이 바로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다.


절대적인 독서량, 각종 정보를 이해하고 요약하고 재구성하는 능력, 최후에 완성될 사유의 건축물을 위한 조감도의 기획과 그를 위한 면밀한 계산까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전개방식이 아닐는지. 대부분의 인간은 평생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는 고전을 섭렵한 것으로도 모자라, 마치 '그 다음 단계의 영역으로 진입한 정신은 이렇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문학과 사상에 상대적으로 무지하고 어두운 나이지만, 고명섭의 진짜배기 사유에는 드물게 진심어린 감탄을 보낸다. 그는 자기류의 독창성과 보편적인 설득력을 동시에 갖춘, 한용운이나 함석헌을 방불케 하는 저술가다.


또한, 자아가 비대한 일부 저술가들의 경우 사적인 정치색을 작품 내내 드러내 거슬리는 경우가 있는데, 4장의 최후반부를 제외하면 고명섭은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철저히 스스로를 지켜내고 있는 것도 이 책의 한 장점으로 꼽을 만하다. 오히려 그렇기에 마지막 책인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소개하며 길게 포효하는 그의 진심이 더욱 강렬히 와닿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히 말하건대 고명섭은 사유의 달인, 독서의 장인, 서평의 이데아라 할 만한 우리 지식계의 거목이다.


 - 이 책은 인친 우주(@woojoos_story) 님께서 모집하신 우주클럽_철학방에서, #교양인 출판사 (@gyoyanginbooks)의 도서 지원을 받아 함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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