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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인 1
최지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평점 :
한 소설가의 주인공으로 강렬하게 등장한 흡혈귀는 지금도 매력적인 소재다. 흰 피부에 붉은 입술. 뛰어난 신체능력. 멈춰진 시간 등. 어저면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만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가 세상에 나온 이후로 영화, 드라마, 뮤지컬, 소설, 만화 등의 매체에서 끊임없이 다뤄지고 있다. 창작자마다 능력에 대한 세세한 설정은 바뀌지만 변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피를 양식으로 한다는 것과 더이상 늙거나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이미 발견되 완전하게 정의된 수학공식과도 같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지고 다쳐도 바로 아물로 쉽게 죽지도 않는 피를 양식으로 하는 고지인이 등장한다. 무려 조선시대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피를 뒤집어쓴 사람이 피를 먹고 싶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해 사람에게서 피를 섭취한다. 그렇게 물린 사람들의 대부분 죽지만 드물게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을 문 사람와 같은, 피를 원하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 무엇으로 변화된다. 그렇게 퍼져나간 이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싸움이 시작되고 헤치려는 사람들을 피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 고지인(高地人)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조선에까지 흘러들어갔고 그곳에서도 자신과 같은 고지인들을 만들어냈다. 이 책은 원해서 고지인이 된 자와 원치 않게 고지인이 된 자의 이야기다.
시체를 담당하던 하급 관리가 갑자기 높은 벼슬을 받고 제주에 살인사건을 해결하러 내려가면서 본격적으로 책은 시작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물린 상처와 쭉정이 같은 시신에 대충 시간만 때우려던 염일규는 상처를 만든 자에 대해 흥미가 생긴다. 하지만 좀처럼 수사에 진전이 없자 제주목사는 염일규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관아에 가둬놓은 사내가 한 명 탈출했는데, 행방이 묘연한 그자의 소행이라 하자는 것이다. 어차피 섬 자체가 감옥이나 마찬가지니 문제될 것은 없다고. 염일규는 그 제안에 동의하며 일본으로 가려다 표류되었다는 네덜란드인들과 수사를 함께 하며 연정을 품게된 관노 아리와 뭍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염일규는 배에서 네덜란드인들이 항해 중에 태웠다던 늙은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사내를 태운 후에 선원이 계속해서 죽어나갔고, 시체는 염일규가 제주에서 봤던 시체들의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두려웠던 그들은 표류되었다며 거짓말을 하고 제주에 왔던 것이라고.
뭍에 도착한 염일규는 제주 관아에서 도망간 그를 발견한다. 뭍에서도 많은 살육을 한 그를 쫓던 염일규는 그에게 물리게 되고, 그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구해준 왜인에게서 그가 고지인이 되었고, 자신도 고지인이라는 사실을 듣게된다. 염일규는 사나다라는 왜인에게 고지인에 대한 것, 왜인의 검술 등을 배우며 아리와 함께 산 깊은 곳에 숨어산다. 어느 날 고지인이 나타나 그들을 습격한다. 아리는 납치되었고, 그들은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강해지기 위해 다른 고지인의 목숨을 취하는 흑호에게서 아리를 되찾아오기 위해 염일규는 흑호를 찾아나선다.
고지인은 흡혈귀에 대한 특이한 설정이 있다. 다른 이의 목숨을 취하면 더 강해진다. 특히, 상대가 고지인이라면 그의 영기를 섭취해 더 강해질 수 있고 일정기간 흡혈을 하지 않아도 버틸 수 있다. 이는 고지인들끼리도 목숨을 건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굳이 선한 쪽이라고 한다면, 일반사람들을 해치지 않기 위해. 악한 쪽이라면 상대의 영기를 취해 더 강해지기 위해. 혹은 공격당하기 전에 공격하기 위해. 복수를 목적으로 고지인이 된 흑호는 강대한 힘을 원했기에 무차별적인 살육을 했다. 원하지 않게 고지인이 된 염일규는 사람의 피를 섭취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 있다. 다른 목적을 가진 두 고지인은 만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흑호는 아리를 인질로 염일규의 목숨을 취하고 싶어하고, 염일규는 아리를 되찾고 싶어한다.
간만에 본 조선시대 흡혈귀는 특이한 설정을 더해 내 상상력을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크게 부풀렸다. 두 고지인 사이에 타협은 없을까. 사나다와 염일규처럼 함께 행복할 수는 없을까. 둘은 잘 타협해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하고 싶기도 하고 뒷 권을 보고 싶기도 하다. 고지인이 되었다고 불행하게 살아야되는건 아니니까. 다른 고지인들은 어떻게 설득할까. 애초에 둘이 원만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술술 잘 넘어가던 책장에 비해 꽉꽉 막힌 생각이 피곤하긴 했지만 재미있는 흡혈귀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