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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ㅣ 가랑비메이커 단상집 1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0년 9월
평점 :
사실 책이 얇아서 읽으려면 금방 읽을 수 있는데, 마음이 조급할 때 읽으면 좋은 책도 의무감으로 읽어야 하니, 이 책은 아껴두고 읽고 싶었다. 마지막 서포터즈 책이라 더욱 아쉬운 마음에 천천히 느껴가며 읽었다. (변태같다 ㅋㅋ)이번에 받은 책은 작가님이 직접 시의 느낌을 살려서 쓴 글이다. 문장과 장면들 작가님들은 표현 하나를 해도 섬세하고 꼼꼼하게 하셔서 읽으면서 감탄을 할 때가 많았다. 이번 책도 마찬가지였다. 어쩜 같은 장면을 보아도 예쁜 표현으로 할수가 있을까. 그래서 출판사 이름이 문장과장면들인가 싶다.
제목 :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작가 : 가랑비메이커
출판사 : 문장과 장면들
본문 중에서
하루의 끝으로 가만히 밀어두고 싶은 얼굴이 있다.
늦은 밤 혹은 짙은 새벽 그 어떤 방해도 없는 곳으로
고요하게 남겨두고 싶은 시간이 있다.
오직 어둠과 적막만이 스며든 세계에서
마주한 두 눈 외에는 어떤 것도 담지 않고
고요한 숨결 사이의 의미들을 안은 채 오래도록 곱씹고 싶은 만남이 있다.
어떤 서사와 얼굴들을 지나왔든 상관없이 오늘의 엔딩에 초대하고 싶은 단 하나의 이름이 있다. (p24)
당신과 내가 사는 삶은 종이 위에 있지 않아서
모든 선과 면이 선명할 수는 없다.
선명해질 때 흐려지는 것 흐려져야만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
저편의 당신이 선명하려면 이편의 나는 반드시 흐려져야 한다.
망각은 선명하지 못한 것들이 밟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p36)
옷이 조금 크면 품을 키워 입을 수 있어도
커다란 신발에 맞춰 발을 키울 순 없다.
가끔은 내려놓아야 하는 크기도 있다.
다리에 쥐가 나지 않도록 헐떡거리는 신발에 엎어지지 않도록
미련 없이 던져버려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p81)
깊어지고 싶어서 멀어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
멀리 두고 가끔이나 꺼내 보더라도
오래도록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p95)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옅은 두통처럼 조바심을 안고 산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면 마치 대단한 무언가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하다가도, 점을 찍고 나면 한없이 유한하고 사소한 자신을 깨닫는다. 우리는 순간에 존재하고 사유하며 유한하다. 그리하여 닿을 수 없는 영원함을 향하여 끊임없이 발버둥칠 뿐이다. (p147)
내 삶이란 영화에 나레이션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은 어떤 문장이 될까.
조금은 담담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당신에게는 빗물이 되고
바다가 되어 파도를 가져왔으면 (p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