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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뼘의 계절에서 배운 것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2년 10월
평점 :
며칠 전에 읽었던 썸머 작가님의 쌍둥이 동생인 가랑비메이커 작가의 에세이.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계절을 소재로 에세이를 썼다. 겨울-봄-여름-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순서로.
'사계절의 전환이 없었더라면 내 몫의 문장은 절반도 되지 않았을 거다. 춥고 더운, 시끄럽고 고요한 계절의 변화가 좁고 얕은 나의 세계를 무한히 밝혔다. 가난한 애정도, 옅은 질투도 겨우 한 뼘의 계절에서 왔다. 한 뼘의 계절에서 배운 것은 무궁무진하다'는 글로 책을 열어준다. 나는 예쁜 꽃들이 피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봄을 제일 좋아한다. 하지만 내 생일이 있는 겨울도 춥지만 좋아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계절로 에세이를 쓸 수 있다니 작가님의 글재주에 감탄이다. 나는 과연 계절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그냥 춥다, 덥다, 따뜻하다 이런 단순한 느낌이 다인데..
제목 : 한 뼘의 계절에서 배운 것
작가 : 가랑비메이커
출판사 : 문장과 장면들
기억하고 싶은 문장
내리는 눈을 가만히 바라볼 때면 눈이 지닌 힘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한다. 오래된 동네를 동화 속처럼 만들어 버리는 로맨틱한 둔갑술에 대하여. 저 높은 하늘에서 대지 위로 안착하기 위해 지나와야 했을 긴 여정과 인내에 대하여. 미지근한 손바닥 위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눈의 모습에서는 겸손을 배우기도 한다. 한밤중에 내리는 눈은 밤눈이 어두운 나에게는 길을 밝혀주는 환한 등이 된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볼 때면 느린 춤을 추며 내려오는 작은 눈송이들의 다정한 환대가 이어진다. (p23)
서른이 되어도 삶에는 쉬운 구석이 하나 없다. 늘어난 것은 비운 밥그릇과 실수뿐인 것 같다는 생각에 실소를 하는 저녁이 드문드문 찾아온다. (p30)
넣은 돈만큼 정확한 몫이 툭 떨어지는 자판기 같은 삶을 기대한 적은 없지만 힘껏 찬 발길질에 반응해 줄 고장 난 자판기 정도의 삶은 기대했다. (p63)
계절을 감지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꽃이 필 때 봄이 왔다고 느끼지만 나는 눈꺼풀이 자주 감겨오기 시작하면, 바람이 아직은 서늘해도 봄이 도착했음을 느낀다. 마르기 시작하는 입술에서 가을을, 동이 늦게 트는 아침에서 겨울을 감지하는 나의 계절 안테나는 왈칵 쏟아지는 찬란한 기억들로 여름을 직감한다. (p79)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 많은 이유는 그들의 삶이 평화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그 어디서도 해답과 위로를 찾을 수 없어서 뛰쳐나왔던 작은 산책길이, 묵은 문제를 희미하게 만들고 선명한 감각의 문장을 쓰게 하지는 않았을까. (p103)
낡은 책을 좋아한다. 모서리가 찍히고 코팅이 벗겨진 표지와 구겨지고 접힌 흔적이 가득한 페이지, 누군가 그어둔 밑줄이 듬성듬성 발견되는 책은 새 책보다 더 나를 설레게 한다. 책의 출간 시점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p161)
글이 읽기가 편하지만 그렇다고 또 가벼운 내용은 아니라서 , 요즘같이 추운 날씨에 이 책을 읽으면 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