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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평점 :
이기호의 장편소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은 잔물결처럼 흩어지는 에피소드의 나열로 “투쟁 없는 삶”이라는 역설적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도 보인다. 사건보다는 분위기를, 책은 결말을 향해서라기보다는 흐름을 기록하는 것이었구나 싶은 마무리였다.
모든 중심에 반려견 이시봉이 있지만 결국 그를 둘러싼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개를 통해 인간이 살아보지 못한 삶, 어쩌면 인간보다 나은 삶을 투영한다.
이시봉의 가계와 병렬되는 스페인왕족의 계보가 블랙유머처럼 스민다.
이시봉의 혈동과 계보는 정작 이시봉의 행복이나 의사와는 무관하다.
이시봉은 싸우지 않고, 선택하지 않으며,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싸움과 선택, 변화를 만드는 주체는 인간들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벌이는 투쟁은 대체로 사소하고 자기중심적이다. 제목 속 “투쟁 없는 삶”은 그래서 반어적이다. 비인간 존재는 인간의 투쟁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지키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 끊임없이 싸운다.
500쪽에 걸친 자잘한 사건들의 나열하며 작가는 독자를 지루하게 만든다. 그 지루함을 ‘투쟁 없는 삶’을 관찰하는 감각으로 전환시킨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은,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속에도 소유욕과 허영, 자기 투영이 겹겹이 깔려 있음을 집요하게 드러낸다. 그 드러냄은 큰 서사적 굴곡 없이 반복되며, 독서 경험을 마치 한 편의 정물화처럼 만든다. 이런 느낌을 주는 책을 만나기란 극히 드문 일인 것 같다. 알고있는 사물들이 나열된 그림 앞에서 머물고 집에 돌아와서 그 물감의 질감과 붓의 터치가 그리는 빛과 그림자가 계속 생각나 듯 이 책은 다 읽은 후 접었을 때 더 많은 말을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