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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프 : 이 정도면 충분해
제프 시나바거 지음, 이지혜 옮김 / 옐로브릭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흥미로운 실험을 해 보자. 밤에도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는 냉장고. 그 문을 열어 보라. 자, 어떤 풍경인가?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우유와 식빵 등이 고개를 쳐 들고, 빨리 처분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왜 이렇게 먹을 게 없어!”라며 쯧쯧 혀를 차며 문을 닫을 수도 있겠다. 진정한 실험은 여기서부터.
실험 제목은 <한 달 동안 먹거리 사지 않기>. 냉장고와 찬장에 고이 잠든 식료품을 재주껏 사용해 보는 것이다. 아니,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살란 말인가? 쇼핑의 욕구를 한 달동안 어떻게 막으라는 건가?’ 음. 벌써부터 비난의 소리가 들려온다. 좀 완화해 보자. 확실한 유통기한이 적혀 있는 우유만 예외로 하자.
다행히 당신보다 먼저 이 재미없는 실험을 시도한 이가 있다. 미국의 사회적 기업가 제프 시나바거. 그가 경험한 실험 결과를 공개한다. 부엌을 뒤져 보니 냉동식품, 옥수수 머핀 등이 매일 얼굴을 비쳤다. 신기한 보물찾기가 매일 펼쳐진다. 버터가 떨어져도 문제 없다. 올리브유로 대체하면 되니까. 그렇게 살다 보니 장을 보지 않고 한 달이 지났다. 정확하게는 슈퍼마켓 한 번 가지 않고 7주!

이 실험의 대성공 이후에도 제프는 흥미로운 실험을 계속 해 간다. <옷장 속에 있는 옷을 매일 하나씩 입어 보기(이 기간엔 새 옷을 사지 않는다)>,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이나 자신의 다리를 사용하기>, <남아 있는 기프트 카드 모으기> 등.
요상한 그의 실험과 시도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또 다른 이의 도전을 기다린다. 제목부터 강렬한 『이너프(enough)-이 정도면 충분해』. 누구도 그에게 이런 실험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괴팍한 실험을 지속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필요 이상으로 많이 소유하고 있고,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믿는다. 내가 살면서 한 멋진 일들은 그 뿌리에 어떤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체험한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단순한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의 질문에서부터 이 여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어느 정도면 충분한가? (18쪽)
맨 마지막 질문에 밑줄을 치고 싶다. ‘어느 정도면 충분한가?’ 제프는 여러 실험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는지 알았다. 하지만, 단지 수치적으로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물건에 대한 그의 관점이 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두 단어, ‘욕구’와 ‘필요’에 대한 저자의 정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요란 물, 음식, 옷처럼 꼭 있어야 하는 것, 없으면 못 하는 것이다. 필요는 사라지지 않고 일상생활에 빠질 수 없다. ... 욕구는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갖고 싶은 것이다. 욕구는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꾸며 주는 사치품이다. (110, 111쪽)
어쩌면,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욕구와 필요. 저자는 날카롭게 둘의 차이를 분석하고, 주위를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필요를 가장하여 우리 자신의 욕구대로 물건을 사들이고 있진 않는가? 냉장고, 찬장, 옷장, 책상, 지갑 속까지... 언젠가 쓸 때를 기다리며, 모으고 있진 않는가?
어쩌면 이 모든 실험이 시작된 것은 어느 날, 그의 집에 찾아온 한 불청객 때문이었다. 그 사람을 뭐라 정의할 수 있을까? 백수? 부랑아? 노숙자?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은 저자가 평소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부류였다. 어떤 대화를 해 나갈지도 막막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를 내쫓지 않는다. 음식을 주고, 자신이 입던 옷을 주고, 남은 기프트카드도 준다. 저자의 넘치는 물건이 노숙자에겐 정말 필요한 물건이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 저자와 그가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바라는 실험의 또 다른 목표는 이것이리라. 물건 뿐 아니라, 사람 즉 타인에 대한 관점을 바꾸라는 것.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이런 사회적 관심도로 측정할 수 없다. 오직 당신만이, 오직 당신만이 줄 수 있는 것으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 블로그 순위도 ‘좋아요 숫자도 당신과 당신이 할 일을 결정할 수 없다. 정체성에 대한 이런 오해가 당신이 세상에 기여해야 할 것을 규정하지 못한다. 당신은 남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다. (75쪽)
몇 가지 수치로 계량할 수 없고, 몇 가지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 그 다양함 속엔 각자의 존귀함과 신성이 빛나고 있음을 저자는 깨달았다. 그리고, 이젠 그 발견의 기쁨을 독자들에게 맛보라고 권한다.
처음에 내 주위의 물건을 향해 있던 나의 눈. 이젠 사람에게 향한다. 항상 옆의 사람과 비교하고, 옆의 사람이 가진 것으로 나를 규정하는 ‘나’를 바라본다. 또. 내가 쉽게 재단하고, 판단하는 주위 사람들을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나의 눈은 쉽게 만나볼 수 없는, TV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서울역 노숙자와 네팔 지진 피해자들에게 향한다. 그들 역시 소중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각인해 본다.
이 책은 ‘너의 사고를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라’는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주구장창 설교하진 않는다. 다만, 단순히 ‘머리’와 ‘가슴’이 변했다면, 개인의 삶의 현장에서 ‘손’과 ‘발’, 때로는 ‘입’이 변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각 장 마지막에 있는 <삶을 바꾸는 작은 실험>이 구체적인 매뉴얼이 될 것이다.
분주히 살고 있는 삶에서 한 발짝 물러서 보자. 우리 주위를 ‘넘치도록’ 채우고 있는 물건들은 없는가? 분명 나보다 그 물건들을 절실히 바라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혹시 아는가? 그것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될지. 무엇부터 시작할까? 냉장고부터 비울까? 아니면 옷장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