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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어둠
조승리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6월
평점 :
나의 어린 어둠'이라는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감성이 아닌 분명히 무언가를 견뎌낸 이야기일 것 같았다. 실제로 이 책은 2025년 6월 출간된 조승리 작가의 첫 연작소설집으로 실명을 앞둔 청소년기를 살아가는 네 명의 화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네 편의 연작소설과 창작기를 다룬 에세이 한 편이 담겨 있다.
각 화자는 시각의 상실이라는 공통된 경험을 기반으로 관계의 붕괴, 미래에 대한 불안, 자존감의 흔들림 등을 겪는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개인적 고통에 머물지 않는다. 장애로 인해 드러나는 가족 내 갈등, 사회적 단절, 특수학교나 제도 안의 문제 등 구조적 현실까지 폭넓게 조망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서사는 픽션이지만 실제 경험에서 출발했기에 현실성이 강하며 에세이처럼 솔직하고 생생하다. 장애를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섬세하게 포착하면서도 인물들이 ‘살아내야 한다’는 의지를 놓지 않는 점에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마지막에 실린 자전적 에세이, <소설가가 되었다>에서는 저자가 안마사로 일하던 시절부터 다시 글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이 글은 앞선 소설들을 하나의 서사로 묶는 동시에 이 책의 현실적 기반을 분명히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책의 표제작인 〈나의 어린 어둠〉은 주인공 ‘성희’와 엄마와 남동생이 살아가는 농촌의 일상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장마철 새벽, 처마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깬 성희는 눅눅한 이불을 덮은 채 눈을 뜨고 '눈앞이 어둑하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날씨 묘사를 넘어 성희의 시야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음을 암시듯 하다. 습기 가득한 공기, 흙탕물 냄새, 젖은 운동화와 양말, 비로 망가진 자전거 등 이어지는 장면들은 장마철 농촌의 습하고 무거운 정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성희가 처한 환경적,신체적 불편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성희는 고장 난 자전거 대신 젖은 길을 걸어 통학하고, 방과 후엔 어머니를 도와 고추밭에서 고된 수확 노동에 나선다. 반복되는 작업과 끝이 보이지 않는 밭고랑 앞에서 성희는 좌절하고 울음을 터뜨리지만, 결국 다시 일어나 가족을 위해 움직인다. 첫 장면부터 느껴지는 어둑하고 눅눅한 분위기와 너무나 사실적이며 생생한 성희의 모습들은 자꾸만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시간이 흘러 성희는 중학생이 된다. 키가 부쩍 자라고 교복이 작아질 만큼 빠르게 성장하지만 그에 비례해 일상의 어려움도 늘어난다. 중학교는 자전거 통학이 어려운 거리였고, 매일 향제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나가 시내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학교생활 속에서도 점차 이상한 변화들이 나타난다.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고, 하키부에 뽑혀진 이후에 적응을 하는 듯 했으나 공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반복적으로 다친다. 자전거를 타다 자주 넘어지고, 해가 지기 시작하면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증상도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에 불안을 느낀 성희는 안경을 맞추러 간 시내 안경원에서 단순한 시력 문제 이상일 수 있다는 경고를 듣는다. 안경사의 권유로 혼자 서울의 안과를 찾아가 정밀 검사를 받은 성희는 결국 의사에게서 머지않아 시력을 모두 잃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는다. 보호자 없이 진료실에 들어선 어린 성희는 처음에는 아무런 감정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멍했지만, 진료실 문을 나서며 비로소 눈물을 쏟아낸다. 간호사가 건넸던 티슈의 의미를 그제야 이해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는 첫 순간의 좌절을 온몸으로 겪는다. 이 장면은 어린 성희가 실명의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장면으로 작품 전체에 흐르는 '어린 어둠'이라는 주제를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며 자꾸만 먹먹하게 만든다.
성희가 혼자 감당하기엔 벅찼던 그 사실은 곧 어머니에게도 알려지게 되고 두 사람은 병원을 함께 다니기 시작한다. 이후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슬픔과 아픔만을 담고 있지 않다. 집에 오는 길에 너무 울어 눈이 벌겋게 부은 채로서로를 바라보며 억지 웃음을 짓는 모녀의 장면은 읽는 이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다. 그렇게 ‘아픔’이라는 사실을 함께 나누는 일만으로도, 이들은 서로에게 조금씩 위로가 되어간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세 번째 병원을 다녀온 날이다. 성희도 엄마도 병원에서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대신 호박 부침개를 개걸스럽게 먹으며, 자전거 이야기를 꺼내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 대화 속에는 더 이상 시력이나 병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대신, 그저 평범한 엄마와 딸의 하루가 있다. 모녀는 그렇게 ‘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시시덕거리며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
이 짧은 이야기의 을림은 단순히 시력을 잃는다는 고통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무엇을 잃었는 가보다 잃은 후에도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가에 질문을 던진다.그리고 고통이 전부가 아니고 위로가 특별한 말에서만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만든다. 부침개를 나눠 먹으며 웃는 대화, 허물없는 농담, 그리고 끝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그거만 충분하지 않을까.
책은 실명이라는 개인의 상실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어둠에만 머무르지 않고 삶의 새로운 감각을 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시력을 잃어가는 인물들이 겪는 두려움, 관계의 균열, 사회로부터의 거리감은 감각의 문제를 넘어 존재 전체를 흔드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책의 인물들은 주저앉지 않는다. 불완전한 몸과 조건 속에서도 삶을 다시 조율하고, 관계를 새로 맺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된다.
저자는 픽션과 자전을 넘나들며, 고통의 경험을 단지 고발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응시한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기쁨들, 빗속 자전거, 갓 부친 부침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건네는 농담을 통해 어둠 속에서도 분명 살아가는 감각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 책은 결국 지금 당신은 어떤 어둠을 지나고 있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살아내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 질문에 답을 구하며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의 이야기가 단지 소설이나 에세이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확장되고 우리 역시 그렇게 책 속 인물들처럼 새로운 시작의 용기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