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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교육 / 2025년 4월
평점 :
표지 그림 속 인물들의 서사가 호기심을 자극하여 읽게 된 책이다. 그림 속 인물들은 각각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그리고 제목이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인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이 책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려는 인물들이 미스테리와 어우러져 흡인력 있는 서사를 펼치고 잇다. 특히 19세기, 계급과 성별이 족쇄와 낙인으로 작용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인 열여섯의 다모 설은 인천 흑산도 출신의 노비로, 한성부 포도청으로 팔려와 수사관 한도현을 모시며 살인 사건을 파헤치게 된다. 정조 승하 이후 혼란스러운 조선,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천주교 탄압이라는 시대적 배경속에서 설은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찾아나간다. 활을 제대로 다룰 줄 알며 똑똑하고 기개 넘치는 여성 수사관 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당대의 편견과 싸우는 용감하고도 가슴 뜨거운 역사를 담고 있어 이야기에 완전 몰입하게 만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은 1800년 정조가 승하한 직후 혼란스러운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순왕후의 수렴 청정과 노론의 권력 장악, 남인 세력 숙청과 천주교 탄압이 뒤얽힌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조가 암살당하였다는 소문이 사실인지를 묻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한양 거리 한복판에 잔혹하게 살해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고 다모인 설은 남성 수사관을 대신해 그 여인의 시체와 마주하여 시체를 뒤집는다. 그렇게 범죄 현장 조사원으로 동원된 다모 설은 사건을 수사하는 한성부 포도청의 유능한 수사관 한도현과 함께 살인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나가게 된다.
노비 신분으로 한양에 온지 얼마되지 않은 열여섯 살의 소녀 설은 넘치는 호기심과 잔꾀, 날카로운 추리력 덕분에 한도현의 수사에 없어서는 안될 조력자가 되어간다. 설과 한도현이 여인의 시체를 마주하고 사건의 전말을 추적해가는 과정은 당대의 복잡한 정치상황과 사회적 갈등을 배경으로 숨가쁘게 펼쳐지고,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설이라는 인물은 단순한 수사관의 조력자가 아닌,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강인한 의지를 가진 주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노비로 태어나 팔천에 속한 설은 가장 낮은 신분으로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면 살아왔다. 그러나 그런 비참한 삶 속에서도 설은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 억압을 깨부수기 위해 발버둥친다.
하지만 수사의 과정은 어린 여자 노비인 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얼굴 한 쪽에는 '계집종'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고, 찾상을 나르거나 마당을 쓰라는 무시와 면박은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설은 또박또박 힘주어 말한다. "내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요? 활을 제대로 들 줄 아는 여자요. 본인이 표적을 맞힐 능력이 없다고 나를 탓하지 마세요.(p119)"라는 이 당찬 말에서 설이라는 인물이 가진 용기와 당당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범인이 시체에 남긴 잔인한 표식에 분노하며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설의 집념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다. 무장한 악인들에게 맞서 몸을 던지고, 심지어 호랑이와 맞닥뜨리는 위기의 순간에도 설은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타인을 구하려는 그녀의 모습은 행동으로 신념을 증명하는 '행동파' 주인공의 면모를 보여주며, 기존의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이러한 설의 독보적인 캐릭터는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으로 작용한다. 단순한 살인 사건의 미스테리를 파헤치는 수사물이 주인공을 넘어, 그 시대의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설의 모습은 이 책 자체에 완전히 빠져들게 만든다.
그러던 중 설은 위기의 순간에 한 종사관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그 은혜를 잊지 않은 한 종사관은 사건이 해결되면 설이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가는 사건의 실마리들은 설을 혼란에 빠뜨린다. 증거들이 가리키는 방향과 의심스러운 인물들 속에서 설은 한 종사관을 향한 중심과 진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자신을 믿어주는 한 종사관에게 끝까지 충심을 다하겠다고 맹세한 설은 눈 앞에 나타나는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한 종사관을 끝까지 믿고 따를 수 있을까?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길 추천해본다.
이 책은 단순한 미스테리 소설을 넘어 역사 속 억압과 차별을 딛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인 다모 설의 용기와 신념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보여주는 연대와 공감은 시대와 계층을 넘어서는 깊은 울림을 전한다.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정순왕후와 강완숙, 주문모 신부 등의 등장 또한 작품에 현실감을 더하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혼란과 억압의 시기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나아가야 할 용기와 연대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운다. 이 책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넘어 우리에게 옳은 길을 걸으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이 책은 오랫도록 기억 속에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