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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환상 여행 - 궁궐에 숨은 73가지 동물을 찾아서
유물시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평점 :
경복궁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처마 끝이나 다리 밑, 굴똑 옆에 있는 동물 조각상과 마주쳤을 것이다. 그 작은 조각상들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면 이 책은 더 없이 흥미로운 안내서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경복궁 곳곳에 숨어 있는 100여 마리의 동물들을 따라가며, 우리가 미처 몰랐던 궁궐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각 동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불길한 기운을 막고 궁을 수호하는 '순라군'의 역할을 맡은 상징적 존재로, 그 자리에 놓인 이류를 하나하나 밝혀나가는 여정은 경복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이 책은 '경복궁 동물 순례 지도'라는 이름으로 경복궁의 지도를 수록하여 궁궐의 수문장처럼 경복궁 입구를 지키는 해치부터, 북쪽 끝에 자리한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동물이 어디에 어떤 의미로 자리잡고 있는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책의 시작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그 앞을 지키는 '해치'에 관한 이야기로 열리며, 그 자체만으로도 경복궁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네 차례나 다시 세워진 광화문은 조선의 건국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역사 속에서 수차례 사라지고 복원되기를 반복했다. 특히 2023년 10월, 고종 때의 모습을 바탕으로 복원된 월대와 함께 해치 석상의 본래 자리까지 되찾으며, 경복궁의 역사적 공간은 한층 더 풍성해졌다.
광화문 앞에서 처음 만나는 해치는 위엄 있는 인상과는 달리 가까이 다가가면 익살맞고 친근한 표정을 발견하게 되는 존재다. 선악을 판별하는 상상 속의 동물로, 조선시대에 궁에 들어서는 이들이 해치의 꼬리를 쓰다듬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곤 했다. 오늘날엔 많은 사람들이 해치 옆에서 사진을 남기며 그 곁을 지니지만, 해치가 지닌 싶은 상징성과 역사적 위치는 여전히 경복궁의 문기로서 굳건히 남아 있다.
그리고 해치 외에도 3문 천장에는 봉황, 용마, 거북 같은 동물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놀라울 따름이다. 경복궁을 몇 번이나 갔음에도 이태껏 이 책에 담긴 동물들을 다 보지 못했음이 안타깝게 다가올 정도로 신비로운 동물들이 참 많음이 놀라웠다. 그리고 고개들 들어 보면 보이는 지붕 끝을 장식하는 용의 형상과 '감괘' 문양에 담긴 깊은 의미와 왜 경복궁의 남문에는 물을 상징하는 장식이 필요했는지, 옛사람들이 불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어떤 상상력과 지혜를 발휘했는지,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너무 쏠쏠하다.
책 속 동물들 가운데 특히 인상 깊은 존재는 광화문을 지나 금천 위 영제교를 지키는 수호동물, 바로 '천록'이다. 비늘로 덮인 몸, 이마에 난 뿔, 용의 머리와 말의 몸, 기린의 다리까지. 현실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이 상상 속 동물은 외부의 악운과 침입을 막는 변사의 상징으로, 예로부터 다리나 무덤, 궁궐 입구에 놓이던 존재다. 조선 후기 학자들의 기록을 통해 '천록'이라는 이름이 확인되었고, 그 의미는 '하늘이 내려준 복록'으로 왕의 자리, 곧 정통성과 번영을 상징하기도 한다.
영제교에는 총 네 마리의 천록이 놓여 있는데, 그중 하나는 유독 혀를 날름 내밀고 있어 관람객들의 시선을 끈다. 오늘날에는 이 모습을 본떠 '메롱해치'라는 친근한 캐릭터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익살스러운 모습 뒤에는 아픈 역사도 숨어 있다. 일제강점기 경복궁이 훼손되던 시기에 입술이 파손되어 혀가 길게 드러나 보이게 된것이다. 본래는 살짝 혀를 내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을 천록은, 지금은 마치 메롱하듯 익살스럽지만, 오히려 그 천진한 표정 속에서 경복궁이 겪은 시련과 회복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듯하다.
천록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위엄보다는, 오히려 궁궐을 찾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친근한 첫 인상으로 기억된다. 경복궁의 초입에서 방문객과 처음 마주치는 이 동물은, 궁궐의 문턱을 훌쩍 넘게 해주는 반가운 안내자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처럼 느껴진다.
이 책은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경복궁 속 동물들의 이야기들은 단지 과거의 유물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의 궁궐을 넘어 조선의 시간과 상상력이 살아 숨쉬는 공간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든다. '유물시선'팀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혹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던 73마리의 동물들을 섬세한 일러스트와 함께 생생하게 되살려 생동감까지 함께 전한다. 움직임과 표정을 제대로 포착해낸 그림들은 각 동물에 담긴 이야기를 더욱 입체적으로 전달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람들의 바람과 염원들이 어떻게 궁궐의 디테일에 녹아들었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복궁의 돌다리, 지붕, 천장 깊숙한 곳까지 이토록 다양한 동물들이 의미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몇 번이고 보았던 경복궁 자제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이 책을 통해 이제 경복궁은 더이상 멀리서 바라보는 유적지가 아니라, 과거의 사람들과 그들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환상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조선의 이상세계와 그 안에 담긴 이야기과 의미를 하나씩 알아가가면서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지켜온 시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