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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지키는 여자
샐리 페이지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3월
평점 :
이야기를 좋아하는 1인인지라 책의 제목에 자연스레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이야기'라는 단어가 가진 힘, 그리고 그 이야기를 '지킨다'는 말의 따뜻한 울림은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을 배가 시켰다. 더욱이 이 책이 영국에서 '국민소설'로 불릴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하니 더더욱 기대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이야기를 수집하는 청소 도우미,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특별한 이야기로 바뀌어 가는지를 따라 읽다 보면 어느새 우리 모두의 삶이 결국 하나의 소중한 이야기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야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은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재니스 역시 자신에게는 특별한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야기 수집가가 되었다. 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청소 도우미 일을 시작한 이후로 사람들은 자연스레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고, 어느 새 그녀는 그 이야기들을 조용히 모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재니스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지 않는 깊은 이야기를 조용히 받아주는 그릇과 같은 존재다. 그녀가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몸짓은 상대방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신호이자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지켜줄게요'라는 무언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모으는 재니스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이야기는 비어 있는 채로 남아 있다. 낮에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와 남편의 잔소리를 마주할 때면 그녀는 자신이 모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어 되새기며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재니스에게 이야기를 모으는 일은 그저 취미가 아니라 그녀가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인 셈이다.
이 책은 재니스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는 방식으로 서서히 그 세계를 확장해나간다. 단순히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는 듯한 이야기지만 그녀가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교차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풍성하고 깊어진다. 사실 재니스는 캠브리지에서도 손꼽히는 유능한 청소도우미다. 그녀가 청소를 맡은 집들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거나 단정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삶의 이야기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세계적인 테너 가수 조디의 집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점점 더 많은 이들의 내밀한 삶으로 나아간다. 자살한 남편을 남기고 홀로 아들을 키우는 피오나, 언제나 자기밖에 모르고 여러 직장을 전전하는 남편 마이크,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그래, 그래, 그래'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그래그래그래부인과 그녀의 남편. 심지어 말을 하는 듯한 폭스테리어 '테키우스'까지. 재니스가 만나는 인물은 하나같이 각자의 상처와 사연을 지닌채 그녀에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특히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처 입은 피오나의 아들 애덤과 그래그래 부인의 시어머니이자 괴팍해 보이는 노부인 등 주변 인물들이 더해질 때마다 그들의 이야기에 더욱 빠져들게 된다.
그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재니스가 가장 깊이 마음을 쓰게 되는 인물인 피오나의 아들 애덤과 그래그래그부인의 시어머니인 B 부인이며, 이들의 이야기는 재니스와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이야기도 더욱 깊어진다. 우선 애덤의 이야기로 돌아와, 피오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재니스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아차림을 깨닫고 애덤의 겪었을 상처의 깊이를 더욱 깊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재니스는 피오나에게 애덤과 함께 테키우스와 산책하겠다는 제안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결정들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인 재니스에게는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심스레 애덤의 곁에 다가가 연결되게 된 재니스와 애덤의 작은 연결은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조용한 연대와 치유의 시작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처음엔 괴팍해보였지만 너무나 매력적인 B 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재니스는 그동안 외면하기만 했던 마음 깊숙이 숨겨둔 자신의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눈물을 흐리는 것으로 시작된 그녀의 이야기들이 서서히 밝혀지게 된다. 그리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남편 마이크와의 결별은 재니스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재니스는 그동안 거리를 두었던 아들과 동생과의 오해를 풀고 진심을 나누며,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 보일 수 잇는 용기를 얻게 된다. 결국 이 책은 남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마침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재니스의 모습은 잔잔한 감동과 따듯한 위로를 선사한다. 과연 재니스는 어떠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어떠한 이유로 B부인과 재니스는 가까워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녀가 앞으로 써내려갈 새로운 이야기는 어떠한 모습일까? 그 답이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길 추천해본다.
이 책은 이야기를 수집하는 청소도우미 재니스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 나가는 성장소설이다. 평범한 삶 속에서도 비범함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누구에게난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으며, 인생은 그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임을 깨닫게 만든다. 삶의 소소한 조각들, 사람들의 각자의 이야기를 통해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특별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결국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세상 역시 그 이야기들로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니스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독자인 우리에게도 자연스레 '나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일까?'를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리고 책장을 덮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잊고 지냈던 소중한 기억들과 마주하게 될 듯하다. 그렇기에 이 책은 조금 지키고 내 이야기를 잃어버린 듯한 순간에, 혹은 누군가의 따뜻한 이야기가 그리운 날에 읽으면 더욱 깊은 위로가 될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는 동안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같이 삶의 의미와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 책에서 조용하지만 따듯한 감동을 발견하게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