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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돌
육월식 지음 / 미디어창비 / 2024년 12월
평점 :
표지와 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실처럼 칭칭 뒤엉켜버린 모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섬세하게 담고 있으며 미디어창비에서 처음으로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선보이는 전 연령 그림책이다. 그리고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선인장 '인'의 이야기를 통해 나와 엄마 사이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들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책은 어느 날 주인공 '인'이 태어나면서 시작된다. 세상에 태어난 인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바로 '연'이었다.
인과 연, 그리고 몇몇의 선인장은 같은 물을 먹고 한 화분에서 잔다. 한 화분에서 먹고 자는 이들을 모두 가족이라고 하였다. 연은 인에게 먹는 법, 자는 법과 말하는 법,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법 모두를 연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화분의 분위기는 연이 결정했기에 인은 연이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사실 별다른 연에게서 모든 것을 배웠으니 별다른 연습 없이도 연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인은 연이었고, 연은 인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베란다 구석 그늘진 곳에서 살던 이들에게 변화가 찾아온다.
인의 앞에 길이라는 라벤더가 나타난 것이다. 이태껏 연하고만 교류하던 인의 앞에 나타난 길은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묻고 여태껏 듣지도 알지도 못했던 세상에 대해 인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길은 인에게 자신은 꼭 검은 돌을 던지고 바다에 갈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인은 검은 돌을 던지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묻고 이에 대해 길은 누군가 어떤 곳을 완전히 떠날 때 등 뒤로 검은 돌을 던지는 거라고 답했다.
그날 인은 연에게 우리도 바다에 갈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연은 바다는 우리가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답했다. 이런 연에게 다시 한번 인은 그럼 자신은 바다에 가서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적만이 흐르고 인은 연의 가시 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실로 칭칭 감긴 모습으로 서로에게 묶여 있던 인과 연 사이에 균열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은 조금씩 바다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서 조금씩 연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엄마 연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했던 인은 드디어 엄마 연에게서 벗어나 바깥으로 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인은 검은 돌을 던지지는 못했다. 그 때문일까. 엄마와 아무리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리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 숨을 기르면서 엄마 연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인은 숨을 키우면서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연의 모습을 자신이 너무나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그러하듯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벗어나고 싶어하며 느끼는 복잡하고 미묘한 애증의 감정을 너무나 섬세하게 잘 담고 있어 이 책의 모든 부분에 공감하고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아이 숨을 키우며 다시 세상을 바라보면서 인은 엄마 연이 자신에게 한 모든 행위가 사랑임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자기 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 순간 인에게서 '검은 돌'이 뚝 떨어지며 인은 진정한 행복과 따스한 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아이를 양육하면서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의 눈이 아닌 오롯이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진정한 독립을 하게 된 인의 모습은 딱 나의 모습이자, 이 세상 모든 딸들의 모습이 아닐까.
이 책을 통해 나와 엄마와의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어릴 적 일을 했던 엄마가 늘 그리웠던 나는 내가 중학생이 되어서 엄마가 일을 그만두었을 때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맛난 간식을 주는 엄마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 하던 그 시간들이 얼마나 행복했었던지. 정말 너무나 평했던 그 일상이 요즘에는 참 그립다.
나 역시 엄마가 되고서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한때는 나는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어린 나의 어리석음과 엄마가 왜 그토록 나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의 마음을, 행동들을, 말들을 이제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이 책의 인처럼 내가 엄마가 되고 나니 엄마의 딸이 아니라 오롯이 나로서 세상에 서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고, 나의 아이들 역시 어린 내가 느꼈던 나와 비슷한 감정을 나에게서 느끼겠지. 부디 나의 아이들은 검은 돌을 나보다 쉽게 던질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