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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
스탕달 지음, 이규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제아무리 밋밋한 영혼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이 책을 읽는다면 다시금 정의감에 활활 불타오르거나, 명백히 부도덕한 사건들에 분개하거나, 자기 나름의 진실했던 사랑에 대한 회고에 젖어들지도 모른다. <적과 흑>은 인간의 타락한 욕망, 사랑과 배신, 위선과 인위적인 기교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부분들은 물론, 사회적 분위기와 시대성을 고려한 사실주의적 소설이다.

 

 

 

작가는 170개의 필명을 사용한 마리 앙리 벨이다. <적과 흑>에 사용된 그의 필명은 스탕달이다(어느 작은 마을 이름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사명감을 안고, 열정적으로 책을 쓴 것 같다. 누구든 이 책에서 그의 숨결과 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그가 몽마르트르 언덕에 고요히 안치되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설의 배경은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귀족들이 다시 예전의 특권을 되찾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로, 권력을 되찾게 된 자들이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던 시대다. 그들은 소설의 주인공인 쥘리앵처럼 명석하고 박학다식한 하류층의 젊은이들을 증오했다. 바로 이 시기에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의 쥘리앵은 그들을 넘어서는 출세를 꿈꾼다.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쥘리앵은 출세를 위해 위선적인 사람이 되어보기도 하고, 자존심을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교활하게 얻게 된 것에 대해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는 못한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예를 들면, 그가 계획적으로 얻어낸 사랑과, 진심으로 얻어낸 사랑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또한 쥘리앵이 출세를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는 신학생들 대다수는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일, 그리고 금전욕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매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상류사회의 숨 막히는 권태와 위선을 경멸하게 되고, 가난한 자들의 것을 착취하여 호화롭게 꾸민 으리으리한 저택에도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라 몰 저택에 머물며 여러 인사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쥘리앵을 수치심을 느끼기도 하며 스스로 '낙오자'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귀부인' 마틸드가 그에게 고백해오자 그것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기주의의 사막에서는 누구나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다!' 라며 이상과 현실, 출세를 위한 욕망과 그가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 사이의 갈등 속에서 오는 괴리감을 표출한다. 그는 이렇듯 꿈꾸는 '이상'의 실태를 고발하는 동시에 그 자신이 '저항하는 것'에 기대고자 하기도 한다. 비록 쥘리앵은 출세를 바라긴 했지만 그가 진정 바라던 것은 오히려 사회적 출세와 공존하기 힘든,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그는 꿈꾸던 '이상'에 행복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갈수록 자신이 바라던 행복과는 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쥘리앵의 고뇌와 심적 갈등이 우리에게 행복은 무엇인지 되묻는다. 행복에는 공식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영혼이 갈망하는 길에 오름으로써 행복을 '선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적과 흑>은 결코 절망적인 비극이 아닌, 독자에게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쥘리앵이 출세를 꿈꾸는 것은, 현대인의 모습과 별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타인보다 더 나은 위치에 서고자 하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의 권리를 짓밟기도 한다. 정의나 양심보다 개인의 이득이 우선시되고,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시되는 사회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권력을 가진 인간은 대개 쥘리앵과 같은 하류층 사회 계층들을 그들의 통제 아래 묶어두고자 한다. 그것이 19세기 프랑스이건, 현재의 한국이건, 세계 곳곳에서는 노동자들은 그들이 일하는 것 외의 다른 것들은 '알지 못 하도록' 억압받고 있다. 상류층 사람들은 손쉽게 살 수 있는 몇십만 원짜리 명품 음악회 티켓이 그들에게는 그럴듯한 문화생활의 일부이지만, 하류층 서민들에게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사치인 것이다. 같은 시공간에서 누군가는 따뜻한 최고급 핸드드립 커피를 음미하고, 누군가는 당장 하루를 먹고살기 위해 차가운 바닥을 마다하지 않고 길거리를 전전긍긍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역시 공정무역이 아닌, 부당한 거래로 인해 노동력을 착취당한 사람들이 굶주림에 죽어간다. 사회계층의 엄청난 간극에 대한 회의감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스탕달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적과 흑>을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그가 <적과 흑>에서 파헤쳐진 인간의 욕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한한 인간의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파생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결코 꺼트려지지 않았다. 우리가 다만 잊고 있을 뿐이다. <적과 흑>은 오늘의 우리에게 삶에 대한 간절한 경고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스탕달은 우리가 진실을 갈구하기를, 우리 자신의 욕망을 바로 알기를 노래하고 있다.

 

 

스탕달은 진지하고 어두울 수 있는 내용을 매우 재치 있고 명쾌하게 표현하였고, 무엇보다 독자의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 내는 데 탁월한 것 같다. 독자는 쥘리앵에 완전히 투영되어 쥘리앵으로서 꿈을 꾸고, 분개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사랑에 빠지며,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적과 흑>은 절대 진부한 고전이 아니다. 읽히고 또 곱씹어야 할 우리의 시대상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의(義)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어떻게 쓰여야 하는 것일까?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쥘리앵은 처형을 당하기 전 사회계층의 심각한 불평등을 규탄하며 자신의, 그리고 하류층의 소신을 지킨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비극일 수 있는 이 고전은, 무엇이 스스로를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지, 무엇이 우리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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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
스탕달 지음, 이규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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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밋밋한 영혼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이 책을 읽는다면 다시금 정의감에 활활 불타오르거나, 명백히 부도덕한 사건들에 분개하거나, 자기 나름의 진실했던 사랑에 대한 회고에 젖어들지도 모른다. <적과 흑>은 인간의 타락한 욕망, 사랑과 배신, 위선과 인위적인 기교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부분들은 물론, 사회적 분위기와 시대성을 고려한 사실주의적 소설이다.

 

 

작가는 170개의 필명을 사용한 마리 앙리 벨이다. <적과 흑>에 사용된 그의 필명은 스탕달이다(어느 작은 마을 이름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사명감을 안고, 열정적으로 책을 쓴 것 같다. 누구든 이 책에서 그의 숨결과 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그가 몽마르트르 언덕에 고요히 안치되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설의 배경은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귀족들이 다시 예전의 특권을 되찾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로, 권력을 되찾게 된 자들이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던 시대다. 그들은 소설의 주인공인 쥘리앵처럼 명석하고 박학다식한 하류층의 젊은이들을 증오했다. 바로 이 시기에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의 쥘리앵은 그들을 넘어서는 출세를 꿈꾼다.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쥘리앵은 출세를 위해 위선적인 사람이 되어보기도 하고, 자존심을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교활하게 얻게 된 것에 대해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는 못한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예를 들면, 그가 계획적으로 얻어낸 사랑과, 진심으로 얻어낸 사랑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또한 쥘리앵이 출세를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는 신학생들 대다수는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일, 그리고 금전욕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매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상류사회의 숨 막히는 권태와 위선을 경멸하게 되고, 가난한 자들의 것을 착취하여 호화롭게 꾸민 으리으리한 저택에도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라 몰 저택에 머물며 여러 인사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쥘리앵을 수치심을 느끼기도 하며 스스로 '낙오자'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귀부인' 마틸드가 그에게 고백해오자 그것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기주의의 사막에서는 누구나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다!' 라며 이상과 현실, 출세를 위한 욕망과 그가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 사이의 갈등 속에서 오는 괴리감을 표출한다. 그는 이렇듯 꿈꾸는 '이상'의 실태를 고발하는 동시에 그 자신이 '저항하는 것'에 기대고자 하기도 한다. 비록 쥘리앵은 출세를 바라긴 했지만 그가 진정 바라던 것은 오히려 사회적 출세와 공존하기 힘든,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그는 꿈꾸던 '이상'에 행복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갈수록 자신이 바라던 행복과는 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쥘리앵의 고뇌와 심적 갈등이 우리에게 행복은 무엇인지 되묻는다. 행복에는 공식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영혼이 갈망하는 길에 오름으로써 행복을 '선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적과 흑>은 결코 절망적인 비극이 아닌, 독자에게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쥘리앵이 출세를 꿈꾸는 것은, 현대인의 모습과 별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타인보다 더 나은 위치에 서고자 하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의 권리를 짓밟기도 한다. 정의나 양심보다 개인의 이득이 우선시되고,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시되는 사회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권력을 가진 인간은 대개 쥘리앵과 같은 하류층 사회 계층들을 그들의 통제 아래 묶어두고자 한다. 그것이 19세기 프랑스이건, 현재의 한국이건, 세계 곳곳에서는 노동자들은 그들이 일하는 것 외의 다른 것들은 '알지 못 하도록' 억압받고 있다. 상류층 사람들은 손쉽게 살 수 있는 몇십만 원짜리 명품 음악회 티켓이 그들에게는 그럴듯한 문화생활의 일부이지만, 하류층 서민들에게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사치인 것이다. 같은 시공간에서 누군가는 따뜻한 최고급 핸드드립 커피를 음미하고, 누군가는 당장 하루를 먹고살기 위해 차가운 바닥을 마다하지 않고 길거리를 전전긍긍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역시 공정무역이 아닌, 부당한 거래로 인해 노동력을 착취당한 사람들이 굶주림에 죽어간다. 사회계층의 엄청난 간극에 대한 회의감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스탕달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적과 흑>을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그가 <적과 흑>에서 파헤쳐진 인간의 욕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한한 인간의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파생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결코 꺼트려지지 않았다. 우리가 다만 잊고 있을 뿐이다. <적과 흑>은 오늘의 우리에게 삶에 대한 간절한 경고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스탕달은 우리가 진실을 갈구하기를, 우리 자신의 욕망을 바로 알기를 노래하고 있다.

 

 

 

스탕달은 진지하고 어두울 수 있는 내용을 매우 재치 있고 명쾌하게 표현하였고, 무엇보다 독자의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 내는 데 탁월한 것 같다. 독자는 쥘리앵에 완전히 투영되어 쥘리앵으로서 꿈을 꾸고, 분개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사랑에 빠지며,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적과 흑>은 절대 진부한 고전이 아니다. 읽히고 또 곱씹어야 할 우리의 시대상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의(義)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어떻게 쓰여야 하는 것일까?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쥘리앵은 처형을 당하기 전 사회계층의 심각한 불평등을 규탄하며 자신의, 그리고 하류층의 소신을 지킨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비극일 수 있는 이 고전은, 무엇이 스스로를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지, 무엇이 우리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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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함께 A학점을 - 시험 잘 보며 세상 바꾸기
버텔 올먼 지음, 김한영 옮김 / 모멘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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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한 잡지의 소개글에서였다.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경제나 정치 잡지를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날도 여느날처럼 시사IN을 들썩이다 나의 반항심을 자극할만한 기사를 읽었다. 바로 이 책에 관한 이야기다. 그때만 해도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면 시험도 잘 치를 수 있다는 저자의 거래 제안에 헛소리!’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그것이 모순된 말임을 당장이라도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마르크스야말로 자본주의를 비판한 사람이 아닌가! 그와 함께 학생들을 성적으로 상품화하는 부도덕한 A학점이라니! 저자 스스로가 얼마나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무모한 망상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헤쳐보고 싶었다.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내가 설득 당하는 입장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 얄팍한 주머니 사정을 무시하고 이 책을 기어코 사버린 순간 나는 이미 저자와의 거래를 시작한 거다. 하지만 정황상 그 거래가 나쁘지는 않았다는 판단이다. 거래의 결과로 저자의 말처럼 '영혼을 잃지 않고 시험에서 A학점을 따내는 방법'을 손에 넣게 되었다. 나를 옭아매었던 족쇄를 벗어 던질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접하게 된 당시 나는 예상치 못한 방황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진리를 탐구하고 자유를 추구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대학은 기업이 돈들이지 않고 학생을 맞춤형 기업인으로 찍어낼 수 있는 공장에 불과했다. 마르크스의 이념과는 달리 배움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수단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성적에 대한 치기어린 무관심으로 대항했지만 그것은 곧 학사경고라는 무거운 짐으로 내게 다가왔다. 학비를 벌어야 하는 차가운 현실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욱 암담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렇다, 그제야 현실이 얄미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순응하라고. 너는 가진자도 아닌 잔말 없이 공부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싫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공부는 항상 시험이라는 벽에 부딪혀서 그 틀 안에서만 행해져야 하는 꼴이었다. 시험을 위해 공부해야 했고, 시험을 위한 수업이 이루어졌다. 교수님들을 언제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나는 회의를 느꼈고, 저자의 말대로 교수님들은 '고용된 하수인'에 불과했다. 또한 저자의 '헛소리 빙고'게임을 직접 해보니 몇몇 교수님들의 말씀에 섞인 편향적 사고와 어조가 드러났다. 하지만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사회적 게임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저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지 못한 나는 부적응자일 뿐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인인 저자 버텔 올먼이 밝히는 존경에 대한 입장은 매우 통쾌했다. 그는 정당한 이유 없이 요구하는 존경, 우리 사회의 위계 구조 안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요구하는 존경을 반대한다. 특히 한국 사회의 '존경'은 무엇이 정당한지, 그것의 옳고 그름 혹은 목적을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윗사람'을 따르게 하는 일종의 속임수일 뿐인데, '존경'에 대한 강요가 뿌리 깊게 박힌 사회의 문제점까지 그가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점이 매우 신기하게 다가왔다.

 

 

나는 이러한 사회의 틀에 속박되는 것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하루빨리 나를 붙들어두는 족쇄를 풀어버리고 싶었다. 자유를 꿈꾸는 내게 그저 앞만보고 목표 아닌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은 너무나 무의미한 일이었다. 저자는 그런 내가 자유의 의미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자유라고 다 같은 자유는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자유는 수많은 위조 단어 중 하나일 뿐이다.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자본가에 의해 고용되고 해고되는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화려한 이름으로 탈바꿈한 것처럼, 그래서 전혀 불만을 느끼지 못하는 혼수상태에 빠진 것처럼, 자유도 수시로 색깔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숙자와 부유한 부자에게 있어 자유는 다르다. 자유는 언제나 있는자의 편일 뿐이고 그러한 자유는 없는자의 자유도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자본주의'에 힘입어 말이다. 그가 헤겔의 말을 빌려 설명하기를 ' 자유는 필연에 대한 인식' 이라고 한다. 우선적으로 우리를 조종하는 힘들에 대한 사전지식을 충분히 터득한 후에야 비로소 무엇을 선택할지에 있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그렇게 되면 '마침내 우리를 지배해온 그 힘들을 장악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어둠의 사회에서 자유를 향한 '열쇠'를 찾게 된 것 같아 참 다행스럽단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나는 무지에 휩싸여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때로는 비참하게 만드는 이유를 찾아 분석하고 맞서 싸워야 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현실을 회피하는 반항 아닌 반항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진정 맞서야 하고 마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또 보이지 않는 공포란 무엇인지, 그 그림자의 실체를 알려주는 소중한 책이다. 이제 내 앞에 모습을 보인 사회의 실체와 그것이 선사하는 공포를 제대로 파악하고, 어둠의 손아귀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내 몫이다. 나의 신념을 잃지 않고, 목적 없는 교육의 노예가 되지 않는 당당한 A학점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내 몫이 아닐까.

 

 

앞으로 남은 대학생활 동안 공부하면서, 그리고 내게 남은 날들을 살아가면서, 내가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를 확고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거래가 단순히 A학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공부가 그저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내가 공부하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고 의로운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

 

 

열쇠는 나 자신에게 있던 셈이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빚어낸 부조리의 어둠 속에 묻혀있었던 열쇠를 찾은 셈이다. 사실 족쇄에 계속 붙들려 있을 것인지, 열쇠를 찾아 자유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 그건 우리의 몫이다. 삶에 있어 배움을 멈추지 않는 우리 모두, 자유를 주장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P.S: 마지막으로, 냉혹한 현실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면서도 그 현실에 너무 주눅들지 않도록, 지루하지 않도록 나를 이끌어준 저자의 배려와 유머감각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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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나눔수업 - 자아존중감과 소통의 리더십을 키워주는 나눔교육 이야기
전성실 지음 / 착한책가게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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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정이 많아서 자잘한 것들을 나눠주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것이 진정 나눔인지,

행복감을 얻기 위한 나의 이기적 양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괴로웠다.

 

버스에서 짐을 많이 들고 탄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친구를 위해 친구가 부탁한 쓰레기를 대신 버려주는 것,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는 것,

지하철 계단에서 쑥떡을 파는 아주머니에게서 떡을 믿고 사주는 것,

내겐 이런 사소한 것들이 전부 배려였고 나눔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괴로움이 있었다.

어디에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 잘 몰랐고, 내가 나눔을 베푸는 대상이

그걸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자리를 양보해드린 할머니 입장에서는

젊은이가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친구는 자신의 쓰레기를 나한테 부탁하는 것이 '별거 아닌' 일이었고

길을 묻는 사람은 내가 대답하는 즉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뜨는 것이 '예의'였고

떡을 파는 아주머니는 떡집에서도 아닌 지하철에서 낮선 사람을 믿고 떡을 사는 내게

처음엔 1000원이라고 했다가 2000원을 달라고 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나는 이렇게 베풀면서 상심도 하고 좌절도 했다.

의연하게 생각하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세상 사람들 마음이 다 내 마음 같지가 않고

사소한 것도 고마워 하는 나와는 달리

배려를 배려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씁쓸했다.

나눔을 정말 해야할까?

이익을 따지자고, 주는대로 돌려받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저 나누면 기쁨이 두배가 되는 마음에 그런 것인데

사람들의 태도는 나를 서운하게 만들었고 절망시키기도 했다.

어쩌면..내가 잘못된 나눔을 하고 있는걸까?

혹 나도 내가 받는 '나눔'을 모르고 지나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있을 때,

<아름다운 나눔수업>은 내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눔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그리고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일방적으로 배려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감하는 것이라고!

 

책에서는 이런 내용이 있다:

'서로 받고도 모르고 주고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서로 알아주게 되면 더욱 나눔이 쉬워지고 재미있어집니다.'

작가는 연대기를 하루 단위로 써보라고 조언한다. 나눔연대기!

하루 단위로 작게 생각해서 내가 받은 나눔, 준 나눔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쓰는 것이다.

 

나눔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던 부분을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이걸 가장 먼저 가족 단위에서 실천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나눔에 대한 나의 가치관도 생겼다.

돈, 재능,시간, 지식 등을 하나의 가치를 통해 모두 한 번에 할 수 있는 나눔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나눔이라는 거다.

이제 조금은 쉽게, 조금은 덜 고통스럽게 나눔을 실천할 수 있을 것 같고,

나를 거쳐가는 아이들이 앞으로 더 생긴다면 내가 깨닫게 된 책의 내용을 전달해주고 싶다.

그 아이들은 조금 덜 혼란스럽게, 조금 덜 고통스럽게

오히려 당당하게 나눔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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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 두 번째 아이는 사라진다 문학동네 청소년 13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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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나는 끝내 2등이었다. 그런 내게 두번째 아이는 사라진다는 꺼림칙한 제목의 <괴담>은 제목 그 자체가 내게 강한 끌림을 주는 작품이었다.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나의 가치관을 조롱하는 듯한 책의 표지를 넘겨 젖혔다. <괴담>은 사회비판적인 책이다. 동시에 우리 자신도 잊고 지낼만한 내면 세계에 내재되어 있는 깊은 심연의 밑바닥까지 낱낱이 들춰내는 책이다.

 

 

책에서 등장하는 괴담은 새롭다:

 

'연못 위에서 형제가 사진을 찍으면 둘째가 사라진다. 연못 위에서 1등과 2등이 사진을 찍으면 2등이 사라진다. 연못 위에서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사이가 사진이 찍히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진다.'

 

 

학창시절에 떠돌았던 전형적인 괴담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잘 알려진 콩콩 귀신 이야기만해도 2등이 1등을 옥상에서 밀어내 1등이 죽는다. 억울한 1등은 거꾸로 죽은 자세 그대로 2등을 찾아다닌다. 이렇듯 전형적인 괴담 속의 2등은 항상 못된 아이, 나쁜 아이였다. 하지만 방미진의 <괴담>에서는 다르다. 그녀는 우리 모두가 2인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다는 전제 하에 피만 튀기지 않지 살벌한 전쟁터나 다름 없는 학교 배경을 소개한다.

 

 

신비로운 음색의 성악을 뽐냈던 인주의 사체가 연못에서 발견 되면서 아이들은 인주의 죽음을 2등은 사라진다는 괴담과 엮어버린다. 실은 인주를 질투하고 시기했던 연두와 지연은 괴담을 이용해 1인자로 우뚝 서고자 하지만, 정작 그 괴담에 사로잡히고 만다. 친구의 죽음 직후에 그들 마음에 자리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다. 오로지 여전히 1등이 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어떻게 하면 1등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다.

 

 

하지만 이 외에 <괴담>의 여러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처음부터 자신이 없었다. 누가 '있어서', 누구 '때문에' 그들이 두 번째 인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들 자신을 두 번째로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서 그치는 것이다. 사실, 욕망으로 가득찬 눈을 씻고 보면 세상에 1등, 2등은 없다. 학교는 A등급 소고기를 찍어내듯 A등급 학생을 찍어내는 공장이 아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망각하게 만든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런 현상이 아이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주가 사라지자 연두와 지연의 부모는 남몰래 묘한 기쁨을 느낀다. 끝없는 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지독하게도 잘 담아내었다.

 

 

언제나 학업의 스트레스에 지쳐있는 아이들은 쉽게 괴담에 동요하고 이용당한다. 그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아마 쉽게 흔들리는 불안정한 어른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이렇게 타락해버린걸까. 어린시절의 우리는 달랐다. 그저 호기심에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기쁘고 신났고, 친구를 마주보고 앉아 가식없이 대할 수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말한다. 사실 등수에 처음부터 연연해 하지는 않았다고. 성취감이 언제나 누군가의 인정(認定)에서 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1등만을 기억했다고. 간발의 차이로 정상을 향했던 2등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고. 우리도 사랑 받고 싶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보고 싶다고.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이냐고.

 

 

변명이다. 사회가 만든 '괴담'의 덫에 꼼짝없이 걸려든 우리가 하는 변명이다.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는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관심 밖인 경우가 많다.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자리하고 싶으면 믿고 싶은대로 믿게 되는 것 같다. 또한 유혹의 손길에 금방 사로잡힌다.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 만족 또한 없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악마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건 아닐까. 학창시절에 공부만이 전부는 아니다. 친구의 의미에 대해, 개인의 가치관과 자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국, 개인이 바뀌면 사회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바뀌면 아이들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 스스로가 변해야 할 때다. 우리 스스로가 쳐 놓은 덫을 벗어 던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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