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 댄스 댄스 2부 - 그림자와 춤추는 공백지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향하면서 2권의 마지막 즈음을 읽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일 하지 않고 지내는 요즘의 삶도, 어쩌면 지루할 수 있을 요즘의 삶도 이런 글들과 함께라면 전혀 지겹지 않겠구나, 라고. 그만큼 또 오랜만에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의해 자극받았고 빠져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전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건 이미 진부해진 자기표현이다. 그런데 그 작가가 왜 좋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난 솔직히 뭐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지금 문득 생각해보면, "그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분위기가 좋아요. 그 주인공이 누가 되었던 조금씩 혹은 완벽히 저랑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그러다 보면 전 그 작품속에 흠뻑빠져 버리죠. 완전히 감정이입을 시켜버리고, 제가 살고 있는 현실조차도 잊어버리고, 책 속이 가끔은 현실로 받아들여져 버려요. 그 순간 많은 것들이 저에겐 쉬워지죠. 내적인 어려움은 주인공들처럼 많을지라도, 남에게 무슨 말이건 -가령 그게 누군가와 같이 섹스 하자 라는 말일지라도- 쉬워보이게 된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생기지만, 쉽게 느껴지는 거죠. 전 사실 책 읽고 영화보는 건 현실도피적인 경향이 많거든요. 그만큼 저에겐 흡입력이 있어요. 중간 중간에 나오는 음악에 대한 그의 생각이나 분위기도 너무 좋아요. 솔직히 흥미진진한 내용전개나 엄청난 깨달음이나 현실적인 문제제기는 거의 없죠. 하지만, 그 흐름을 따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정화되는 느낌이예요. 상실감을 내 가슴 깊이 가득 받아도 그 상실감을 겪는 순간, 전 상실감을 이겨낼 수 있는,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거죠. 참 신기해요. 그리고 주인공이 자주 만드는 음식들이 참 간단하면서도 담백해요. 그러한 정돈된 느낌이 전 좋아요. 그게 지겹지가 않아요, 신기하죠."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이번에도 난 그러한 느낌을 똑같이 받았고, 난 푹 빠져버렸고, 너무나 좋았고.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책의 제목이 날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하루키의 작품과 춤은 너무나도 안어울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싫으니까. 그건 내가 '전문적인' 춤을 싫어 하는 경향 때문인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중간에 '춤추라' 라는 양사나이의 말을 듣는 순간 그게 실제의 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과연 지금 제대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요즘은 이런 생각들이 든다. 나는 언제나 지금 하나의 조그만 행위가 나중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말것인가를 궁금해 한다. 만약에 전자처럼 된다면,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야 하고, 결정 하나에도 온 정신을 담아서 선택해야 한다. 먹는 것 하나 조차도 꼼꼼히 따져 신경을 써야 한다. 솔직히 이렇게 살면 정신적 질환을 얻게 되겠지만,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살지 않는다. 작가 김영하의 말처럼, 투표 때 개인이 행하는 하나의 투표는 하나의 투표 그 이상의 의미는 지니지 못한다는 것처럼 내가 지금 무언가 행하는 것 하나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단지 큰 영향을 미칠 어떠한 행위 하나는 따로 존재 한다고 생각할 뿐.

  주인공 주위 사람들이 우는 이유는 주인공이 울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과연 내 주위에 나 대신에 울어줄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들이 나 대신 울어준다고, 내가 바르게 살아갈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울음은 순간적인 감정의 소통일 뿐이지, 더 이상의 의미는 없지 않는 것일까, 눈물이 쉽게 말라 버리듯이.

  책의 마지막은 언제나처럼 해석이 달려 있다. 예전에 사실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나서는 무얼 얘기 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았다. 허무한 결말, 단조로운 내용 전개. 과연 그 속에 무슨 큰 의미를 담겠다는 것인지. 그래서 그 해설을 보고 이해 하곤 했는데, 이제 나에겐 큰 의미가 없더라. 그냥, 단지 그 작품 그대로가 난 좋을 뿐이지, 그 속에 담긴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던가, 상실의 회복이라던가 하는 깊은 의미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한가지 아쉬운건, 언제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를 <상실의 시대>와 결부시키냐 하는 것이다. 그 작품이 훌륭하고 나도 너무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을 지워놓고는 그를 평가할 수 없는 것일까. 그의 책표지들 곳곳에는 언제나 '상실'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젠, 좀 지겨워 진다. 그에게 씌어놓은 어설픈 감투같다. 이젠, '상실' 말고 다른 걸 그에게 씌어주고 싶다. 그게, 그를 위해서, 다른 독자를 위해서 더 좋은 일은 아닐까.

  난 그래도 또 그의 책들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속에 숨어 버릴 것이다. 맥주와 깔끔한 샌드위치, 그리고 음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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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댄스 댄스 1부 - 운명의 미로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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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향하면서 2권의 마지막 즈음을 읽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일 하지 않고 지내는 요즘의 삶도, 어쩌면 지루할 수 있을 요즘의 삶도 이런 글들과 함께라면 전혀 지겹지 않겠구나, 라고. 그만큼 또 오랜만에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의해 자극받았고 빠져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전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건 이미 진부해진 자기표현이다. 그런데 그 작가가 왜 좋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난 솔직히 뭐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지금 문득 생각해보면, "그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분위기가 좋아요. 그 주인공이 누가 되었던 조금씩 혹은 완벽히 저랑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그러다 보면 전 그 작품속에 흠뻑빠져 버리죠. 완전히 감정이입을 시켜버리고, 제가 살고 있는 현실조차도 잊어버리고, 책 속이 가끔은 현실로 받아들여져 버려요. 그 순간 많은 것들이 저에겐 쉬워지죠. 내적인 어려움은 주인공들처럼 많을지라도, 남에게 무슨 말이건 -가령 그게 누군가와 같이 섹스 하자 라는 말일지라도- 쉬워보이게 된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생기지만, 쉽게 느껴지는 거죠. 전 사실 책 읽고 영화보는 건 현실도피적인 경향이 많거든요. 그만큼 저에겐 흡입력이 있어요. 중간 중간에 나오는 음악에 대한 그의 생각이나 분위기도 너무 좋아요. 솔직히 흥미진진한 내용전개나 엄청난 깨달음이나 현실적인 문제제기는 거의 없죠. 하지만, 그 흐름을 따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정화되는 느낌이예요. 상실감을 내 가슴 깊이 가득 받아도 그 상실감을 겪는 순간, 전 상실감을 이겨낼 수 있는,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거죠. 참 신기해요. 그리고 주인공이 자주 만드는 음식들이 참 간단하면서도 담백해요. 그러한 정돈된 느낌이 전 좋아요. 그게 지겹지가 않아요, 신기하죠."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이번에도 난 그러한 느낌을 똑같이 받았고, 난 푹 빠져버렸고, 너무나 좋았고.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책의 제목이 날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하루키의 작품과 춤은 너무나도 안어울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싫으니까. 그건 내가 '전문적인' 춤을 싫어 하는 경향 때문인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중간에 '춤추라' 라는 양사나이의 말을 듣는 순간 그게 실제의 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과연 지금 제대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요즘은 이런 생각들이 든다. 나는 언제나 지금 하나의 조그만 행위가 나중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말것인가를 궁금해 한다. 만약에 전자처럼 된다면,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야 하고, 결정 하나에도 온 정신을 담아서 선택해야 한다. 먹는 것 하나 조차도 꼼꼼히 따져 신경을 써야 한다. 솔직히 이렇게 살면 정신적 질환을 얻게 되겠지만,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살지 않는다. 작가 김영하의 말처럼, 투표 때 개인이 행하는 하나의 투표는 하나의 투표 그 이상의 의미는 지니지 못한다는 것처럼 내가 지금 무언가 행하는 것 하나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단지 큰 영향을 미칠 어떠한 행위 하나는 따로 존재 한다고 생각할 뿐.

  주인공 주위 사람들이 우는 이유는 주인공이 울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과연 내 주위에 나 대신에 울어줄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들이 나 대신 울어준다고, 내가 바르게 살아갈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울음은 순간적인 감정의 소통일 뿐이지, 더 이상의 의미는 없지 않는 것일까, 눈물이 쉽게 말라 버리듯이.

  책의 마지막은 언제나처럼 해석이 달려 있다. 예전에 사실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나서는 무얼 얘기 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았다. 허무한 결말, 단조로운 내용 전개. 과연 그 속에 무슨 큰 의미를 담겠다는 것인지. 그래서 그 해설을 보고 이해 하곤 했는데, 이제 나에겐 큰 의미가 없더라. 그냥, 단지 그 작품 그대로가 난 좋을 뿐이지, 그 속에 담긴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던가, 상실의 회복이라던가 하는 깊은 의미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한가지 아쉬운건, 언제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를 <상실의 시대>와 결부시키냐 하는 것이다. 그 작품이 훌륭하고 나도 너무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을 지워놓고는 그를 평가할 수 없는 것일까. 그의 책표지들 곳곳에는 언제나 '상실'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젠, 좀 지겨워 진다. 그에게 씌어놓은 어설픈 감투같다. 이젠, '상실' 말고 다른 걸 그에게 씌어주고 싶다. 그게, 그를 위해서, 다른 독자를 위해서 더 좋은 일은 아닐까.

  난 그래도 또 그의 책들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속에 숨어 버릴 것이다. 맥주와 깔끔한 샌드위치, 그리고 음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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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유곤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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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보던 중에 병원을 갈 일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책을 보다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일본인 여성 두명이 보였다. 그러다가 내가 '일본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두 일본인이 '책'이라는 것을 많이 읽는지,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지, 혹은 한글판 표지만 보고도 자기나라의 작가가 쓴 책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찌되었든 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나라의 사람이 그 나라의 책을 다른 나라에서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반가울까?  


  이 책이 다른 책들에 비해서 약간 크기가 작은 느낌이었다. 또한, 예외적으로 앞 부분에 독서감상에 관한 글이 미리 나와 버린터라, 연작소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을 미리 알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소설은 다 보고 나서, 그리고 감상을 보고나서 좀더 깊이 있게 알게되곤 하는데, 미리 이 책은 감상을 보여주어 속았다는 느낌을 약간 받았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보는 내내, 하루키 책을 읽을 때 나에게 다가오는 뭉퉁함이 많이 제 모습을 갖추고 다가오는 느낌이 들더라.

  하루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책 표지도 중요시 한다고 한다. 그런데, 분명 한국어 판으로 발매될 때는 이 책이 어떻게 번역될지를 비롯하여, 표지도 어떻게 될지 참고할 텐데, 왜 문학사상사의 책들은 좀 성의가 없어 보이는 것일까. 예전엔 겉 모습보다 내용으로 평가받겠다는 자신감으로 봤지만, 요즘은 먼저 보기가 좋아야 먹기 위해 시도라도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만든 신에 의해 인간은 버림 받는다' 라는 구절을 본 기억이 나는데, 어느 페이지 인지 확실히 찾을 수가 없다. 다른게 아니라, 난 이런 말들을 좋아한다. '부재의 존재'(억지스러울 수도 있지만, '부재'한다는 것 자체를 '존재'한다는 의미로 쓰임) 같은 말이나 '반대를 위한 반대' 같은, 얼핏 보면 말이 안되는 듯도 하지만, 그런 말이 안될것 같은 말에서 좀더 생각후엔 깊은 의미를 이끌어 내는 말들이 난 좋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연설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단어를 썼을 때, 알고는 있었지만 이 사람도 보통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 자신의 어휘적 수준이 떨어져서 일 수도 있겠지만.

  난 이 연작들 중에 <벌꿀파이>가 제일 마음에 들더라. 주제보다는, 이야기 방식이 마음에 들더라. 화자가 중간에 꼬마에게 '곰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그 이야기는 마지막에 주제와 맞물려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와 상징이 된다. 이러한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전체 이야기와 연결되는 구성을 잘 보진 못하지만, 많은 통찰력이 없다면 쉽게 만들 수 없는 이야기다. 누가봐도 이건 얼핏 하루키 자신의 이야기 같지만, 그래서 긍정하는 모습 자체가 어색하기도 하지만, 좋은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소설의 기본은 누가 뭐라 해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시작일 뿐이고, 중간은 '허구'다. 그러나, 난 그걸 '사실'로 가정해 보고 나 자신을 시험해 본다. 소설 읽기의 이유 중 하나가, 삶을 재평가 하고 재구성 하며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바탕이 될 수 있다는 한 선생님의 말이 생각난다. 그러한 이유를 나에게도 적용하여 많은 것들을 나에게 적용해본다. 그러면, 난 많은 부분을 (소설이지만) 화자와 같은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벌꿀파이>에서도 자기가 좋아했지만, 친한 친구와 결혼을 해버린 여자와, 그 여자가 이혼후에 다시 내가 그녀와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난 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어쩜, 내 소설읽기 방식에서 유래할 수도 있다. 소설읽기는 하나의 또 다른 세계속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현실감각은 무뎌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반복되면 현실이 가상이 되고, 가상도 현실이 된다. 이러한 복합적인 것들이 내 삶을 지탱한다. 그게 어느 순간부터 애매모호해져서 내 삶을 받치는 기둥이 되곤 한다. 그래서 난 쉽게,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생각도 하고 세계도 간직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한 세계관에 하루키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이젠 피해갈 수 없다. 하지만, 난 그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진 않다. 난 주인공들 처럼 양을 쫓아 떠날수도, 춤을 출 수도 있을테니까,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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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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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이 한없이 작아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어떤 순서도 내게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호치키스나 진공청소기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드들 때가 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가치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이봐, 실망하지 말라구. 인간이 된다는 것은 번호표를 가진다는 거야. 그러니 조용히 순서를 기다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 226p 中
 

  이 책을 추천하는 사람들 중에 한번도 이 책이 '별로'라는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당연히 그런것에 '솔깃'잘하는 내가 넘어갈 수 밖에. 처음에 책을 잡았을 때는, 왠지 두껍다, 라는 느낌이 들었다. 심사한 분들 글에도 나중에 보니, 내용이 약간 긴게 흠이 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

  내용은 따로 쓰고 싶지 않다. 이미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고, 정보도 많이 얻었을테니까. 느낌을 말하면, 어느 순간부터 '심토머'들은 평범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 맨 처음 '옛 이야기'는 검색해 봐야 하지 않을까, 정도의 의문을 가질 정도로 사실에 가깝게 다가왔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많은 것들이 '허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작가는 계속 독자들을 '믿으라' 하지만, 심술이 강한 나는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쇼' 라고 콧방귀를 끼면서 책을 읽어 나간다. 내용은 갈 수록 '심토머'와 멀어진다. '심토머'증상의 몇몇은 현실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느껴진다. 너무 많은 심토머를 겪어서 내가 그냥 저냥 하는 생각이 들어 버렸던 건지, 아니면 심토머에 약간의 현실성을 부여하여 심토머와 현실을 가깝게 하려는 작가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작가는 '수상작가 인터뷰'의 내용 처럼 현실을 보여주려한다. 현실에 '있는'것을 보여주려.



  "이번에 응모작품이 112편이었다더군요. 그 말 듣고 살벌했어요. 자그마치 112명이 나처럼 산이나 집 안에 틀어박혀서 몇 년씩 글을 썼을거 아니에요. 장편은 취미생활로 쓸 수 없는 거니까요. 제 경우엔 최소한의 생활비를 대준 친구가 있었어요. 원래 저랑 같이 소설 쓰다가 가난 때문에 장사를 시작한 춘섭이라는 친군데 '언수야 내가 세계문학을 위해서 한번 쏜다' 하며 꼬박 이 년 동안 매달 1일마다 오십만원씩 보내줬어요. 지금은 수천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사장이 되었지만 처음 저에게 돈을 보낼 때는 전세금 천삼백만원 빼서 막 가게 차렸을 때거든요. 그놈도 많이 팍팍했을 거예요. 어쨌든 저는 그 돈으로 이 년 동안 돈 안 벌고 처음으로 글에 전념해본 거죠...." - 373p 수상작가 인터뷰 中

  이 책이 도대체 얼마나 잼있길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나 싶어 서점에 간 날이었다. 가만히 서서 보다가 이 인터뷰를 먼저 보게 되었다. 그러다 저 단락을 보다 눈물이 핑돌았다. 보통 책 읽다 이런 느낌이 드는게 극히 드문 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왜, 왜? 세계문학을 위해서 한번 쏜다, 라는 친구의 말. 멋지다. 아아, 감동이다. 열심히 쓸 수 밖에 없었겠구나. 혹시나, 잘 안됐을 때 친구가, 세계문학을 위해서 쏜거, 갚아줬음 좋겠다, 라고 말해버릴 지도 모르니까, 농담이지만.

  사실 첫 장부터 약간 실망하면서 시작하긴 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거라니. 너무 많이 본 문구잖아.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전혀 상관없는 말을 끌어들여 비슷한 의미나 말을 가진 단어로 대체하여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길 수 밖에 없었다. 페이지를 적어두지 않은 게 아쉽지만.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 난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내용은 '스릴러'에 가깝게 전환된다. 그 전환의 연관성이 난 아무래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아무래도 이해못하겠다. 내가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해서 인지 모르겠지만, 관련성이나 타당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무슨 책임인지. 그런데 그 과정이 정말 소름돋더라. 엄청나게 빨려들어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무서우면서도, 읽는 속도는 점점 빨라 지고 내 심장은 두근두근 거려지고 손은 덜덜 떨릴정도로. 그 노인의 정체를 미리 알고는 있었어도, 그 정도로 말하고 행동할 줄이야. 아후, 이 작가 이런 쪽으로도 잘 쓰네, 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예전에 이적이 쓴 <지문사냥꾼>에 피를 마시는 집단이 나온다. 그들은 수혈을 받기도 하고, 서로 공유하기도 한다.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지만, 단지 사람의 피를 마신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 이 책의 내용은 그러한 것들을 여러개로 나누어 담아 놓은 '캐비닛'이다. 한번, 빠져 보는 것도 좋을 꺼라 본다. 그냥 무턱대고, 나처럼 의심 하지는 말고, 작가 말만 다 믿으면 된다. 그가 말하는 용어가 다 실제로 존재하고, 과학적 뒷받침들이 사실이라고 인식하면, 내용은 엄청 흥미로울테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한번 쯤 생각하겠지, '혹시 나는 심토머의 기질을 갖고 있진 않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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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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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일 전에 서점에 혼자 가서 '어떤 책'을 가만히 서서 꽤 오래 봤다, 라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 때 본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러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13,000원이라니. 사실 한국인이 '한국인'을 공부한다는 것은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 '국어'를 왜 따로 배워야 하나, 라는 의문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내가 다 알고 있는데, 내가 바로 한국인인데 왜 더 알아야 하고, 더 알 게 뭐가 있는가, 라는 의문. 하지만 그것은 고등학교 졸업후에 내가 글을 쓸 때에서야 '국어'과목을 배우길 잘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같이 책을 다 보고 나서야, 알긴 알아야 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에게 진중권은 어려운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롯하여) '진중권과 지만원의 대결 동영상'을 보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 편집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만원도 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스스로가 지식인이고, 그의 말대로 피타고라스가 만든 정의 처럼 자기도 공식 몇개 만들었고, 엘리트였단다. 그때 진중권의 말은 날 웃게 만들었다. 다음에 나올 땐 고등학교 성적표라도 갖고 나와야 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에겐 어려운 사람이었다. <씨네 21>맨 마지막 페이지에 그의 칼럼이 2, 3주에 한번씩 실렸는데, 말들이 많이 함축적인 느낌이었고, 그가 인용하는 많은 내용들이 내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발터 벤야민'을 인용할 때, 특히 '아우라'를 인용할 때만은 예외였지만. 그러다 그의 진보성향이 좋아 그의 책을 하나 빌렸었는데, 그게 <폭력과 상스러움, 진중권의 엑스리브스>였다. 얼마 보지 못했다. 3, 40페이지 읽고 더이상 머리에 들어오지 않더라.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왜 어떤 말을 이 내용에서 인용하는지 조차도 나에겐 다가오지 않았다. 그만큼 난 그가 어려웠고, 내 머리는 인문서적이 들어오기엔 많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렇게 서점에서 한참을 읽다, 비싼 책값에 놀라 그냥 집에 왔었다. 그 때 이글루스를 켰더니, 엘리엇님이 이 책을 봤다는 글을 올리셨더라. 한참 멍했다. 이유는 굳이 서술하진 않겠지만, 나 자신이 초라해보였다, 라는 한 문장으로 모든 의미가 통할 꺼라고 본다. 그래서 몇일 후에 서점가서 이 책을 구입했다. 그게, 오늘에서야 다 보게 되었다(이 게으름이란).

  내가 이 책을 다 볼 수 있었던 것도 큰 이유가 없다, 쉬워서 이다. 진중권도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까. 인문서적을 잘 못읽는 내가 정말 술술 이해하면서도 읽었을 정도니까. 예상 하는 대로, 한국인의 '빨리빨리'문화를 비롯하여 우리가 아는 많은 내용들을 언급한다. 중요한 것은, 진중권은 그걸을 깨서 어떤 인간이 되자! 라고 말하지 않고, '왜'그렇게 되었는지를 말한다. 이것은 또 다른 각성 혹은 환기의 방식이다. 근원을 파악하여 그 근원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무작정 현상만 갈아 버리자는 방식과는 효과성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그의 원인분석이 무조건 맞다, 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같은 한 사람을 설득시키기에는 충분했다고 본다.

  난 <캐비닛>보다 이 책을 솔직히 더 추천해주고 싶다. 수준의 차이겠지만, 난 이 책을 통해 얻은 것이 너무 많다. 글을 보는 내내 연습장에 글 쓸 내용과 페이지를 메모하면서 봤으니까. '각성'이란 단어가 어울릴 만큼 날 일깨워줬다고 말하고 싶다. 가령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의 진중권의 분석은 내 머리를 강하게 쳤다. 많은 이들이 운동을 권하거나, 일을 할 때 밥을 꼭 먹고 해야 한다고 말할 때 '체력은 국력'이니까, 하는 말들을 한다. 나도 가끔은 쓰곤 했다. 하지만, 그 깊이 있는 의미는 퇴색되어 버리고, 우리 머리 속에는 체력이 좋아야 한다, 먹어야 산다, 라는 의미만 머리에 씌어져 있었다. 그러나, 저것은 국가를 향한 충성이 담겨져 있다. 저것은 70년대 산업사회 발전 기조속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난 그 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 의해 나까지도 현재엔 쓸모 없는 사고가 자연스레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이다. 단어 하나에도 의미가 다른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안경이 나도 모르게 씌어 있었던 것이다.

  진중권의 말빨도 나에게 충격을 많이 주었다. 가령 이런 것들.

  얼마 전 주부들을 위한 강연을 했다. 강연 후에 나온 질문은 역시 대부분 자녀교육에 관한 것. 애들 억지로 공부시키지 말랬더니 한 어머니가 말한다. "우리 아이는 5년 전 강제로 과외를 시켜주지 않았다고 지금 저를 원망해요." 자기가 공부 안 하고 왜 남을 원망하는지 모르겠다. 그 어머니에겐 이렇게 조언을 해주었다. "걔한테, 지금 혹시 5년 후에 후회할 것 없는지 생각해보라고 하세요." - 155p 中

  하긴 우리 부모 세대도 우리가 라디오로 '별밤'을 들으며 시험공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말문이 막힌 그는 결국 구시대적으로 윽박을 지르고 말았다고 한다. "아빠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말것인지, 웬 말이 그리 많아?"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던 그가 딸 앞에서 보수성을 드러내놓고 매우 민망해했다. 그에게 이렇게 대꾸해주었다. "그런데요, 그건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문제예요." - 219p 中

  그의 예법에 관한 글은 내가 지내온 생활과도 많은 연관이 있어서 생각케 했다. 가령 외국인이, 엘리베이터에서 왜 한국사람들은 인사를 안하냐, 라는 내용. 예전에 아파트에 살 때 아버지는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꼭 내릴 때 그 사람에게 인사를 하곤 하셨다. 그리고 아파트가 13층 까지 있었는데, 그 집 사람들 모두와 인사를 하곤 하셨다. 난 그걸 어렸을 때부터 봐와서 자연스럽게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한국사회는 꼭 그렇지 않나 보다. 남자 여자가 동시에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꼭 양쪽 벽에 붙거나 엘리베이터 숫자표시를 물끄러미 쳐다보곤 한다. 또한 개그맨 선.후배가 동시에 자리한 적이 있었는데, 군대에 있던 것 처럼 각을 잡고 있더란다. 그러면서 진중권이 왜그러냐, 라고 했더니 자기도 담배한대 펴도 되겠냐고 물었단다. 왕의 머리위에서 놀던 옛 '광대'였는데 그 속에서의 수직 관계라니. 세상을 보는 시각이 이리도 다르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얻은 것은, 한국사회의 발전 과정과 상황에 대한 그의 해석. 사실 난 '전근대', '근대', '탈근대'에 관한 용어를 생각할 때면 그 기준이나 시기가 명확하지 않았었다. 의미도 '전근대' 하면 바로 다가 오는 것이 아니라 '前근대'라고 의미해석을 해야 그 시기가 나에게 이미지로 다가왔던 것이다. 한국현실 자체도 난 '근대'인지 '탈근대'인지 헛갈렸던 게 사실이다. 그게 내가 개념적인 미숙함 때문인지, 현실 상황 때문인지는 그가 확실히 말해준다.

  그는 한국사람의 '몸 변화'에 관심이 많다. 지금 한국인들의 몸은 '산업사회' 때의 몸이란다. 거기서 비롯된 것들 중에 빨리 빨리 문화가 있다. 양적이 문제 보다 '질적인 문제'에 더 집중해야 하고, 신입사원들의 극기 훈련이 아닌, 창의적 발상을 위한 훈련이 필요하단다. 난 스스로가 아직 멀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극기훈련을 통한 마음가짐이 더 나은 창의력을 가져온다는 얼토당토 않는 사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디스커버리 채널>을 통해 삼성에서 신제품 개발부서의 팀장으로 설치예술가를 영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러한 '글자 그대로의(literal)' 결합이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술과 예술의 융합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으로 보인다. 미래의 생산은 엔지니어, 아티스트, 인문학자의 삼각 컨소시엄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모할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 엔지니어는 기술을 가지고, 아티스트는 상상력을 가지고, 인문학자는 콘텐츠를 가지고 생산 속에서 서로 결합하게 된다. - 228p 中

  미래에 대한 내 마음에 다가오는 내용이다. 사실, 누구나 불안하겠지만, 나는 미래가 더욱 불안하게 느껴진다. 대학에 속해 있는 과의 진로는 거의 정해져 있는 곳이라, 이곳에서 벗어날 궁리를 많이 해야 하는데, 그 진로가 난 걱정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 의해 약간의 청사진이 그려지게 되었다. 카이스트에서도 그러한 관련 과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를 한다는데, 앞으로 희망적 미래를 상상해 본다, 그 속의 나의 위치도.

  너무 할 말이 많아 두서없어진 글이 된 것 같지만, 그래도 많은 내용들을 쓴 것 같다. 몇몇 사람들은 진중권이 너무 외국에서 살다온 시각만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걸 의식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한국사회에 많이 융화되어서 일으키는 많은 오류들을 직접 서술한다. 여기서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은 이제 진부하다. 그들의 시각도 중요하고 우리의 시각도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 혹은 많은 분야중에서도 둘 중에 맞다고 느껴지는 곳도 있을터이다. 그러한 곳을 진중권이 밝혀주려고 노력한다는 모습은 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쉬운 말들을 갖고서.

  우리가 밖에 외출을 할 경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나가기 전에 꼭 '거울'을 본다. 그것은 나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비추어 질지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습속과 그것의 이유를 살펴보는 것도, 비슷한 일이라 본다. 그렇기에, 이책을 권한다. 가려운 곳을 많이 긁어 붉게 될 정도는 아니더라도, 일정한 해소는 충분히 이 책이 해줄것이라 본다.

 

  덧. 예전에 진중권이 추천한 책 중에 <문명화과정>이 있었다. 서점에 갔다가 그 굵기와 가격에 주춤해서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 책에서 많은 내용들이 <문명화과정>이란 책에 기대어 있더라. 도전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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