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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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이 한없이 작아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어떤 순서도 내게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호치키스나 진공청소기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드들 때가 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가치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이봐, 실망하지 말라구. 인간이 된다는 것은 번호표를 가진다는 거야. 그러니 조용히 순서를 기다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 226p 中
 

  이 책을 추천하는 사람들 중에 한번도 이 책이 '별로'라는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당연히 그런것에 '솔깃'잘하는 내가 넘어갈 수 밖에. 처음에 책을 잡았을 때는, 왠지 두껍다, 라는 느낌이 들었다. 심사한 분들 글에도 나중에 보니, 내용이 약간 긴게 흠이 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

  내용은 따로 쓰고 싶지 않다. 이미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고, 정보도 많이 얻었을테니까. 느낌을 말하면, 어느 순간부터 '심토머'들은 평범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 맨 처음 '옛 이야기'는 검색해 봐야 하지 않을까, 정도의 의문을 가질 정도로 사실에 가깝게 다가왔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많은 것들이 '허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작가는 계속 독자들을 '믿으라' 하지만, 심술이 강한 나는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쇼' 라고 콧방귀를 끼면서 책을 읽어 나간다. 내용은 갈 수록 '심토머'와 멀어진다. '심토머'증상의 몇몇은 현실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느껴진다. 너무 많은 심토머를 겪어서 내가 그냥 저냥 하는 생각이 들어 버렸던 건지, 아니면 심토머에 약간의 현실성을 부여하여 심토머와 현실을 가깝게 하려는 작가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작가는 '수상작가 인터뷰'의 내용 처럼 현실을 보여주려한다. 현실에 '있는'것을 보여주려.



  "이번에 응모작품이 112편이었다더군요. 그 말 듣고 살벌했어요. 자그마치 112명이 나처럼 산이나 집 안에 틀어박혀서 몇 년씩 글을 썼을거 아니에요. 장편은 취미생활로 쓸 수 없는 거니까요. 제 경우엔 최소한의 생활비를 대준 친구가 있었어요. 원래 저랑 같이 소설 쓰다가 가난 때문에 장사를 시작한 춘섭이라는 친군데 '언수야 내가 세계문학을 위해서 한번 쏜다' 하며 꼬박 이 년 동안 매달 1일마다 오십만원씩 보내줬어요. 지금은 수천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사장이 되었지만 처음 저에게 돈을 보낼 때는 전세금 천삼백만원 빼서 막 가게 차렸을 때거든요. 그놈도 많이 팍팍했을 거예요. 어쨌든 저는 그 돈으로 이 년 동안 돈 안 벌고 처음으로 글에 전념해본 거죠...." - 373p 수상작가 인터뷰 中

  이 책이 도대체 얼마나 잼있길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나 싶어 서점에 간 날이었다. 가만히 서서 보다가 이 인터뷰를 먼저 보게 되었다. 그러다 저 단락을 보다 눈물이 핑돌았다. 보통 책 읽다 이런 느낌이 드는게 극히 드문 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왜, 왜? 세계문학을 위해서 한번 쏜다, 라는 친구의 말. 멋지다. 아아, 감동이다. 열심히 쓸 수 밖에 없었겠구나. 혹시나, 잘 안됐을 때 친구가, 세계문학을 위해서 쏜거, 갚아줬음 좋겠다, 라고 말해버릴 지도 모르니까, 농담이지만.

  사실 첫 장부터 약간 실망하면서 시작하긴 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거라니. 너무 많이 본 문구잖아.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전혀 상관없는 말을 끌어들여 비슷한 의미나 말을 가진 단어로 대체하여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길 수 밖에 없었다. 페이지를 적어두지 않은 게 아쉽지만.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 난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내용은 '스릴러'에 가깝게 전환된다. 그 전환의 연관성이 난 아무래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아무래도 이해못하겠다. 내가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해서 인지 모르겠지만, 관련성이나 타당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무슨 책임인지. 그런데 그 과정이 정말 소름돋더라. 엄청나게 빨려들어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무서우면서도, 읽는 속도는 점점 빨라 지고 내 심장은 두근두근 거려지고 손은 덜덜 떨릴정도로. 그 노인의 정체를 미리 알고는 있었어도, 그 정도로 말하고 행동할 줄이야. 아후, 이 작가 이런 쪽으로도 잘 쓰네, 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예전에 이적이 쓴 <지문사냥꾼>에 피를 마시는 집단이 나온다. 그들은 수혈을 받기도 하고, 서로 공유하기도 한다.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지만, 단지 사람의 피를 마신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 이 책의 내용은 그러한 것들을 여러개로 나누어 담아 놓은 '캐비닛'이다. 한번, 빠져 보는 것도 좋을 꺼라 본다. 그냥 무턱대고, 나처럼 의심 하지는 말고, 작가 말만 다 믿으면 된다. 그가 말하는 용어가 다 실제로 존재하고, 과학적 뒷받침들이 사실이라고 인식하면, 내용은 엄청 흥미로울테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한번 쯤 생각하겠지, '혹시 나는 심토머의 기질을 갖고 있진 않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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