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 댄스 댄스 1부 - 운명의 미로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향하면서 2권의 마지막 즈음을 읽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일 하지 않고 지내는 요즘의 삶도, 어쩌면 지루할 수 있을 요즘의 삶도 이런 글들과 함께라면 전혀 지겹지 않겠구나, 라고. 그만큼 또 오랜만에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의해 자극받았고 빠져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전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건 이미 진부해진 자기표현이다. 그런데 그 작가가 왜 좋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난 솔직히 뭐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지금 문득 생각해보면, "그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분위기가 좋아요. 그 주인공이 누가 되었던 조금씩 혹은 완벽히 저랑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그러다 보면 전 그 작품속에 흠뻑빠져 버리죠. 완전히 감정이입을 시켜버리고, 제가 살고 있는 현실조차도 잊어버리고, 책 속이 가끔은 현실로 받아들여져 버려요. 그 순간 많은 것들이 저에겐 쉬워지죠. 내적인 어려움은 주인공들처럼 많을지라도, 남에게 무슨 말이건 -가령 그게 누군가와 같이 섹스 하자 라는 말일지라도- 쉬워보이게 된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생기지만, 쉽게 느껴지는 거죠. 전 사실 책 읽고 영화보는 건 현실도피적인 경향이 많거든요. 그만큼 저에겐 흡입력이 있어요. 중간 중간에 나오는 음악에 대한 그의 생각이나 분위기도 너무 좋아요. 솔직히 흥미진진한 내용전개나 엄청난 깨달음이나 현실적인 문제제기는 거의 없죠. 하지만, 그 흐름을 따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정화되는 느낌이예요. 상실감을 내 가슴 깊이 가득 받아도 그 상실감을 겪는 순간, 전 상실감을 이겨낼 수 있는,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거죠. 참 신기해요. 그리고 주인공이 자주 만드는 음식들이 참 간단하면서도 담백해요. 그러한 정돈된 느낌이 전 좋아요. 그게 지겹지가 않아요, 신기하죠."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이번에도 난 그러한 느낌을 똑같이 받았고, 난 푹 빠져버렸고, 너무나 좋았고.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책의 제목이 날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하루키의 작품과 춤은 너무나도 안어울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싫으니까. 그건 내가 '전문적인' 춤을 싫어 하는 경향 때문인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중간에 '춤추라' 라는 양사나이의 말을 듣는 순간 그게 실제의 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과연 지금 제대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요즘은 이런 생각들이 든다. 나는 언제나 지금 하나의 조그만 행위가 나중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말것인가를 궁금해 한다. 만약에 전자처럼 된다면,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야 하고, 결정 하나에도 온 정신을 담아서 선택해야 한다. 먹는 것 하나 조차도 꼼꼼히 따져 신경을 써야 한다. 솔직히 이렇게 살면 정신적 질환을 얻게 되겠지만,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살지 않는다. 작가 김영하의 말처럼, 투표 때 개인이 행하는 하나의 투표는 하나의 투표 그 이상의 의미는 지니지 못한다는 것처럼 내가 지금 무언가 행하는 것 하나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단지 큰 영향을 미칠 어떠한 행위 하나는 따로 존재 한다고 생각할 뿐.

  주인공 주위 사람들이 우는 이유는 주인공이 울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과연 내 주위에 나 대신에 울어줄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들이 나 대신 울어준다고, 내가 바르게 살아갈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울음은 순간적인 감정의 소통일 뿐이지, 더 이상의 의미는 없지 않는 것일까, 눈물이 쉽게 말라 버리듯이.

  책의 마지막은 언제나처럼 해석이 달려 있다. 예전에 사실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나서는 무얼 얘기 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았다. 허무한 결말, 단조로운 내용 전개. 과연 그 속에 무슨 큰 의미를 담겠다는 것인지. 그래서 그 해설을 보고 이해 하곤 했는데, 이제 나에겐 큰 의미가 없더라. 그냥, 단지 그 작품 그대로가 난 좋을 뿐이지, 그 속에 담긴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던가, 상실의 회복이라던가 하는 깊은 의미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한가지 아쉬운건, 언제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를 <상실의 시대>와 결부시키냐 하는 것이다. 그 작품이 훌륭하고 나도 너무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을 지워놓고는 그를 평가할 수 없는 것일까. 그의 책표지들 곳곳에는 언제나 '상실'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젠, 좀 지겨워 진다. 그에게 씌어놓은 어설픈 감투같다. 이젠, '상실' 말고 다른 걸 그에게 씌어주고 싶다. 그게, 그를 위해서, 다른 독자를 위해서 더 좋은 일은 아닐까.

  난 그래도 또 그의 책들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속에 숨어 버릴 것이다. 맥주와 깔끔한 샌드위치, 그리고 음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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