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호시스 ㅣ 슬라우 하우스
믹 헤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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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TV+의 <슬로 호시스>는 한꺼번에 몰아보기가 아까워,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아껴가며 보는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2010년 영국에서 발표된 ‘슬라우 하우스’ 시리즈의 첫 작품인 원작소설을 펼치는 기분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이미 얼굴과 목소리까지 익숙한 사람들을 이번에는 활자가 만들어놓은 그들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며 다시 만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리버 카트라이트가 출세 가도에서 탈락해 ‘느린 말’들에 합류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p.7

MI5에서 사고를 치거나, 누군가의 눈 밖에 나거나, 더 이상 쓸모없다고 판단된 요원들이 밀려나는 곳, 슬라우 하우스. 멋진 슈트와 첨단 장비로 무장한 스파이 대신, 실패의 이력이 덕지덕지 붙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실패한 스파이들’이라는 역설적인 설정입니다.

그 중심에는 잭슨 램이 있습니다. 지저분하고 무례하고 독설을 입에 달고 사는 최악의 상사입니다. 드라마에서는 게리 올드만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먼저 눈이 갔다면, 소설에서는 그 불쾌한 언행 뒤에서 모든 것을 관찰하고 계산하는 램의 노회함이 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리버의 조급함, 캐서린의 상처, 루이자와 민, 로디 호까지. 화면에서 스쳐 지나갔던 표정들에 저마다의 과거와 내면이 덧붙여집니다.

두 번째 매력은 긴장과 웃음이 이상할 만큼 잘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이 납치되고 참수 영상의 생중계가 예고되는 끔찍한 사건인데도 믹 헤런은 끊임없이 비틀고 조롱합니다. 사람들은 실수하고, 조직은 책임을 떠넘기며, 첩보기관 내부에서는 국가안보만큼이나 자리와 체면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남는 것은 의외로 조직에 관한 소설이라는 점입니다.
MI5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떼어놓으면 승진하고 싶은 사람,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람, 실패를 감추려는 사람과 다시 한번 기회를 얻고 싶은 사람들이 뒤엉킨 직장입니다. 유능한 사람만 살아남는 곳이 아니라 정치와 배신, 운과 실수가 사람의 자리를 결정합니다. 그 냉소가 제법 지독한데도 이상하게 웃깁니다.

드라마를 먼저 보았기에 반전의 상당 부분을 알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재미는 별로 줄지 않았습니다. 문장과 문장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내달리는 이야기의 속도감과 입체적인 인물들이 찰진 재미를 매 페이지마다 끼얹어 대는 통에 페이지 터너라도 된 듯, 달리고 또 달리게 되는 독서적 쾌감!

그래서, 오히려 ‘무슨 일이 벌어질까’보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 우습게도,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을 읽다 보면 슬라우 하우스에 정이 붙습니다. 서로를 좋아하지도 않고 툭하면 헐뜯으면서, 막상 일이 벌어지면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잘 달리는 말들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믹 헤런은 굳이 뒤처지고 낙오한 ‘느린 말들’을 주인공으로 골랐습니다.

이 더할 나위 없이 밀도 높은 드라마를 제가 아껴 보던 이유를, 이제는 소설에서도 하나 더 발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드라마로 만들었겠다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 드라마 제작자가 느꼈을 그 마음처럼, 또 끝나지 않을 시즌들을 기대하며 다시 느린 말들의 삶 속을 들여다봅니다.
사건의 다음이 궁금해서라기보다 이 형편없는 사람들과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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