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꽃 세트 - 전2권 (한정판 케이스 + 조정래 작가노트)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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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러고도 사람이 살아지는구나!’ 내가 상처를 내려다보며 첫 번째 한 생각이었고,
‘어쩌자고 이 지경이 되도록 글을 썼나!’하는 것이 두 번째 생각이었다.
- 1권, p.5 ‘작가의 말’ 中

‘한국문학의 산증인’이라는 수식어가 있는 그대로일, 작가의 속내는 그렇게 자신이 겪은 2025년 9월 1일의 ‘‘복부대동맥 수술’로 시작합니다.

업무적인 이유로 익숙하지만 그닥 달갑지 않은 ‘복부대동맥 수술’. 대부분이 응급수술이고 대부분이 생존하지 못하는 수술입니다. 숱하게 새벽녘 수술실 앞 대기실에서 스치듯 만났던 환자 보호자들의 슬픔보다 멍한 표정들은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019년 5월의 두번째 탈장수술 이야기. 그리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위궤양과 오른팔 마비 현상까지.

그렇게 정말로 자신과 싸우고, 중력과 싸우며 온 몸으로 써내려간 이야기들이었구나 싶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우리의 현대사를 꿰뚫는 역사와 포개어지며 우리네 마음을 공명케 했었지요.

그런 그의 새로운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럴싸한 홍보를 위한 인터뷰나 예능이나 유튜브 출연도 없지만, 조정래, 이름 석자만으로 그저 궁금해지는 이유가 되는 것일테지요.

그리고 이번에 그가 꺼내든 것은 의외로 ‘사랑’입니다.<서리꽃>을 읽으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선택과 행동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내가 윤소인을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 1권, p.143 中

이재이의 깨달음처럼, 이렇게 사랑은 어느 순간 찾아오는 감정이지만, 그 감정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선택이라는 시선.
좋아한다는 말보다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상대의 고통을 어디까지 내 삶 안으로 들일 수 있는지를 자문하는 것. 그런 사랑이라는 선택과 행동으로서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연인인 두 사람 사이에는 돈과 계층, 가족과 체면, 오래된 가부장적 질서가 끊임없이 끼어듭니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악인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세상의 질서에 가깝게 보입니다.
평생 역사와 사회를 들여다 보면 이야기를 지어온 작가답게, 연애의 가장 사적인 순간에도 시대와 사회가 슬며시 그리고 여지없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개인의 사랑조차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연하게도.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역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바라보는 사랑입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두 권을 따라가다 보면 사랑을 향하는 구심력의 이야기, 그 주변부로 향하는 늙어감과 상실, 죽음과 존엄이라는 더 커다란 질문을 던지는 원심력의 이야기를 동시에 만나게 됩니다.

‘서리꽃’은 가장 추운 순간에 피어나지만 햇살이 닿으면 이내 사라지는 꽃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의 제목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사랑도 삶도 결국 사라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사랑하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떠나보낸 뒤에도 끝끝내 기억하며 살아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복부대동맥 수술이라는 죽음의 문턱을 지나 다시 원고지 앞에 앉은 팔순의 소설가가 하필 ‘사랑’을 이야기했다는 사실도 그래서 더 새롭고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쫓아온 작가가 그 끝에서 발견한 것은 결국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내미는 손, 사랑하기로 마음먹는 그 선택과 그에 따른 행동에 대한 이야기라니요!

조정래 작가의 장편소설 <서리꽃>은,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사랑은 어쩌면 영원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어렴풋하게 들려주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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