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정재은 지음 / 플레인아카이브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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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 <여섯 개의 시선>, <태풍태양>의 극영화로 새로운 한국영화의 어떤 발견이었더, 정재은 감독이 돌연(?)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했을 때 저의 일감은 ‘아쉬움’이었습니다. 

그렇게 첫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를 불꺼진 극장에 앉아 물끄러미 스크린을 기다리던 때가 기억납니다. 그 아쉬움에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 양, 조금은 상기된 마음으로 말이죠.


영화는 담담하지만 옹골찼고, 또 많이 보여주고 들려주지만 그만큼 절제된 태도가 느껴졌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쉬움은 기대로 바뀌었고.


  “그동안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작품을 만드는 것에 주력해 왔다면 이제는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정리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영화 <말하는 건축가>에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p.8, 서문 中


그렇게 <말하는 건축가>에 담아내지 못하고 노트와 외장하드에 잊혀질 운명의 말들을 위한 집을 지어주려고 나온 책이 바로 이 책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입니다. 아쉬움이 기대로 바뀐 그 극장의 어둠 속에서, 제가 느꼈던 태도의 이유가 어쩌면 이 책으로 지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사유의 전개와 말하기와 글쓰기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과정은 마치 뇌라는 기계에서 실처럼 문장을 뽑아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바로 원고지의 힘인가 싶었다. 그는 평생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써왔다고 했다.”

  -p.159


정재은 감독이 정기용 건축가에게 다큐멘터리 제작을 제안하는 것으로 말문이 트인 이 책은, 어떻게 그 거대한 성 같고 울창한 숲 같은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생각과 말과 글을, 정기용이라는 주인공에 의미를 두고 이야기로 담아내는 2시간 여의 영화로 지어내는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 또박 기록해냅니다. 기록이 영화가 되고, 그 편집되고 절제된 태도들이 책이 되었구나 생각하노라니, 정말 힘이 쎈 것들을 떠올려볼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힘이 쎈 그것들 말입니다. 


  “건물은 사라져도 길은 남는다. 그래서 길은 역사다. 길이 건물만큼, 아니 건물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길은 풍경의 저장 창고다. 할아버지가 봤던 풍경을 아버지가 바라보고 나도 같이 동일한 풍경을 본다는 것은, 나 또한 길의 역사에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길은 역사이며 그림일기다.”

  -p.205


건축가 정기용을 찍다가 영화감독 이재은에게 건축가가 거울이 되는 순간을 마주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영화감독’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부분에서는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관계와 반응, 모방과 공감 그리고 연대에 이르는 어떤 흐름이 읽혔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인식도 포함해서.


  “나는 평소 영화감독이란 영화로 말을 해야지 결코 말이 많아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관객들과 대화를 하면서 나는 위로 받았다… 영화에 대해 말하는 시간을 즐겨야 한다. 어쩌면 영화의 본질 역시 ‘말’인지도 모르겠다.”

  -p.217



책의 여기저기 흩어진 정기용 건축가의 말과 정재은 감독의 글을 이어서 읽어도, 따로 떼어 읽어도 그 담백하지만 깊은 생각의 힘을 느낄 만한 이 책은, 그래서 건축이나 영화와 전혀 무관하게 사람과 관계, 풍경과 지도, 순간과 인생을 만나고 싶은 이라면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무엇 하나 건져낼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기용 건축가를 읽어낸 관찰일지이자, 정재은 감독 스스로를 들여다본 내면일기이기도 한 이 책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의 초상화의 피사체는 그래서 정기용 일 수도, 정재은 일 수도 그걸 읽고 있는 독자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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