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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딩 - 그곳에 회색고래가 있다
도린 커닝햄 지음, 조은아 옮김 / 멀리깊이 / 2025년 7월
평점 :
정신이 회색고래를 찾아 떠나버렸습니다. 피검사 결과를 모니터에 띄워두고 한참을 마우스 스크롤을 하던 의사는 별거 아닌 듯 몇가지 항목의 수치가 경계에 있으며, 먹고 마시는 것을 조절하고 심장이 쿵쾅 거리도록 매일 운동을 꾸준히 하기만 하면 신경쓸 거 없다 말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나름대로 열심히 의사가 그어준 선을 좇아왔습니다.
여전히 혈압이 심각하지는 않은데 경계에 계시고요…
그래서 시작한 단식에 가까운 절식. 몇 일만에 3 킬로그램이 사라졌고 묘한 카타르시스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몸살 기운과 변비로 이틀 정도 헤메고 다녔습니다. 잠시 회색고래를 본 것도 같습니다. 그 노랫소리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도린 커닝햄이 살아낸 전쟁 같은 시간의 기록, <사운딩>의 원제는 <Soundings>입니다. 한순간에 나락을 경험하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세워내는 힘을 차곡차곡 마주하고 연대하고 또 넘어지지만 그렇게 또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로스앤젤레스 입국 심사장의 남자 직원이 나를 노려보다
맥스를 내려다보고는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다.”
-p.19, 로스엔젤레스 : 세상은 잠시 기다려 줄 것이다
-북위 33도 59’ 40” 서경 118도 28’ 57”
인생은 예측불허이고 맥스도 그러함이었습니다. <사운딩>은 그런 저자의 인생과 그리고 맥스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디인지를 매 챕터마다 지명과 좌표로 표시합니다. 모든 페이지의 좌측, 그러니까 쪽수 페이지에는 지명이, 그리고 우측 홀수 페이지에는 책의 물리적 쪽수와 함께 좌표가 지리적 좌표인 위도와 경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매 챕터가 펼쳐지는 물리적 위치이면서, 저자 본인의 인생의 좌표를 매 페이지마다 각성하며 나아가고 있는 듯 합니다.
“훌륭한 꼬마 여행가이긴 하지만,
이렇게 어린아이를 데려오다니 놀랍네요.”
주디가 말한다.
-p.153, 코르테즈해 : 두려움은 사랑만큼이나 압도적이다
-북위 26도 0’ 53” 서경 111도 20’ 20”
매 페이지 마주하는 좌표가 어느새, 책을 읽고 있는 나는 어디에 있는지 되묻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책 속에서 물리적 공간과 시간을 점유하고 있는 이야기와 책 밖에서 물리적 공간과 시간을 점유하는 독자가 묘하게 긴장감 아닌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은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그랬습니다.
‘난 여기서 이렇게 살아내고 있는데, 책 읽는 당신, 당신은 거기서 뭐하고 있소?’하고 말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빙하와 공허함, 치열함과 가까워졌고
흰 설월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나는 그 안에서 살면서
그것을 호흡하고 그것을 마셨다.”
-p.313, 그레이셔 베이 : 우트키아빅의 빙하는 내 안에 있다
-북위 58도 27’ 3” 서경 135도 49’ 21”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챕터 ‘집’에서는 좌표가 더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의 자신과 맥스가 어디 있는지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그저 알고 있노라 선언하는 듯 합니다. 그렇게 선언할 수 있게 해준 ‘소리들’이 있었노라 고백합니다. 그리고 물어보는 듯 합니다.
‘당신이 들었던 소리들은 무엇인가요?
당신을 이끌어온 그 소리들을 기억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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