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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의 상자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5년 2월
평점 :
“이토록 살가운 SF소설이라니, 단편집이지만 다음 소설로 쉬이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동심원의 파문들이 자꾸만 마음 한켠에서 일렁이게만 하는 이야기들 앞에선 그렇게 속수무책이 되고야 말게 하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2024.10.20 <앨리스와의 티타임> 리뷰 中
3개월 여만에 '다시 만난' 정소연 작가의 이야기들은 처연하거나 뭉클하다가 또 안스럽도록 ‘살가운 SF’, 역시나 제겐 그러했습니다.
항성 간 초광속 이동 기술을 독점한 카두케우스 사의 존재를 공유하는 우주시대를 살아가며, 시간과 공간과 인연과 이별을 토로하는 속살거리는 ‘카두케우스 이야기’의 아홉 가지 이야기들.
그렇게 작가는 이러저러한 인물들을, 광대한 우주에 덩그러니 남겨진 감정의 크고 작은 소용돌이를 애써 외면하며 각자의 비상점에 이르러 마침내 마음의 소실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당신도. 앞으로도 우주비행은 안 하는 편이 좋아요. 기회가 와도, 도약하지 마요.”
-p.79 <한 번의 비행> 中
21세기 이 지구마을 어느 구석에서나 일어나고 있을 법한 사는 이야기들이 더 넓은 우주로 옮겨졌을 뿐,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의 시간과 공간으로 관계의 변수를 추가했을 뿐, 오롯이 우리들의 이야기로 치환되어 있어서 마음이 쉽지 않은 페이지들과 문장들을 여럿 마주했습니다.
“그렇지만 수진아. 나달에 찾아온 가을은 너무나 아름다웠어.”
-p.105 <가을바람> 中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비매품’인 우주여행이라는 허상을 향하듯, 지금 여기의 사람들이 목을 매고 생을 투자하며 상실해가고 있는 것들이 자꾸만 생각났습니다. 항성 간 이동을 하는 동안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남겨진 사람들과의 어마어마한 시차를 만들고 또 마음의 거리를 만들고야 마는 그 ‘비매품’ 때문에 이별하고 포기하고 좌절하고야 마는 그들이 지금 여기에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그 아름다운 시간을, 그 순간들을 놓쳐버리는 사람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송두리째 갈아넣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책의 전반이 ‘원미래’를 담은 이야기라면, 후반에 자리하는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의 다섯 이야기는 ‘근미래’ 혹은 요몇년 사이의 우리네 삶을 절단면으로 들여다보는 듯 했습니다. 특히 표제작 <미정의 상자>는 가까스로 벗어난 ‘코로나 펜데믹’ 이야기라 더욱 그러했습니다.
“역학조사 결과에 따라 자가 격리 대상자와 자가 격리 권고자가 나뉘었다. 미정은 자가 격리 대상자였고, 유정은 자가 격리 권고자였다. 유경과 미정은 한집에서 공간을 나누어 생활했다.”
-p.263 <미정의 상자> 中
자가 격리, 진단검사, 음성, 양성, 확진자, 동선파악…. 그새 어색해져버린 단어들을 눈으로 확인하며, 얼마 전의 우리의 시간을 휘몰아치듯 지나간 그 때를 떠올렸습니다.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쓸모없이 사그라들어버린 그 때. 하루가 멀다하고 죽음의 소식들이 전시되던 그 때. 얼굴 맞대고 두런두런 거릴 수도, 죽음을 앞둔 이과 마지막 인사조차 거절당했던 그 때를 말입니다. 그 때의 불가항력의 안타까움과 간절한 희망을 다시 떠올려보노라니, 지금의 스스로를 돌이켜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떤 위기나 재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세계는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어떤 상실은 돌이킬 수 없지만, 우리는 결국 더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천천히, 망설이고 의심하며, 그러나 확실하게 한 걸음씩. 이 믿음을 말하고 싶었다.”
-p.367, 작가의 말 中
정소연 작가의 문장들과 이야기들은, 다시 힘을 내고, 또 나아갈 마음가짐을 정비해보게 하는 든든하고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다름아니다 싶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은 가끔씩 펴보며 면역력을 키우는 약 같은, 우리들의 사진첩이나 일기장 속 숨겨둔 누구나의 추억같은 살가움이 내내 뭍어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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