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서윤빈 지음 / 래빗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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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30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안았다. 그녀는 내 품에서 조용히 죽었다. 사인은 임플란트 구독 기간 만료로 인한 심정지였다. 이 시대에도 영생은 이론에 불과하다.”
<p.29>

짧고 강렬한 짧은 사건의 씬을 보여주고 난 다음, 이게 뭔지 알겠어? 하면서 타이틀이 딱 뜨는 영화의 오프닝 같이 다분히 영화적으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독자를 멀지 않은 미래의 대한민국과 그 시공간의 설정 속으로 워프 시켜버립니다. 버디, 모드, 장기 임플란트, 임플란트 구독, 그리고 가애와 수애. 그렇게 도입부의 사건을 지나서 드러내는 설정들, 건강상태와 건강 관리 상태, 생활습관 등으로 점수화 하고 그에 맞게 책정된 등급과 임플란트 구독료, 의료보험이 무너지기 직전이고 비보험이 늘어나는 상황 등의 낯설지만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그곳에 어느새 도착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아프고 오래 사는 것보다는 조금 일찍 죽더라도 아프지 않은 게 낫지 않느냐’ 내지는 ‘어차피 병원비가 없어서 죽는 거나 장기 구독료를 못 내서 죽는 것이나 똑같다’하는 분위기가 주류가 되었다.”
<p.55>

“그러나 입을 벌리기 직전, 나는 어머니가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 나는 고통스럽게 사느니 아프지 않고 죽고 싶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내려다보다가 그렇게 말했었다.”
<p.69>

어쩌면 건강이란 것이 유전적인 이유가 상당하고, 그 건강의 관리와 생활습관 등은 또한 경제적 유전과도 같은 대무림되는 경제적 여건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걸 고려하면, 너무나 지금의 현실과 다르지 않아 또한 너무나 폭력적이라 그 간극은 더없이 벌어져만 가는 노골적 구조화의 디스토피아적(?) 근미래가 얄밉도록 살갑게 잘 구현된 설정이다 싶었습니다.
어찌되었건 이렇게 주어진 사회 시스템에서 누리는 이들과 살아남아야 하는 이들 또한 분명히 존재할 터, 수애와 가애라는 수요공급을 따르는 관계를 통해 각자의 목적을 이루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근미래를 다루긴 하지만 현재의 과학기술 및 의료분야에서 미약하나마 개발 진행 중이거나 어느 정도 상용화가 이루어진 소재들도 적극적으로 이야기의 소재로 삼고, 또 여러 문학작품이나 작가들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끌어와서는 독자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부작용(!)도 좋았습니다. 플로베르의 소설들, <안나 까레리나>의 첫 문장, 구약성서의 <창세기>와 <욥기>, 댄 브라운의 소설 속 캐릭터 ‘로버트 랭던’, 로저 젤라즈니, 브램 스토커, 금홍.

“- 아내가 떠났습니다.
- 어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살아 있습니다.
- 어머, 그럼 그냥 복을 빕니다.”
<p.36>

“고수명 시대의 인간은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유치했다.”
<p.74>

“내가 남의 목숨을 위해 일하거나 남이 내 목숨을 위해 이용당하거나. 세상은 이 둘 사이의 줄다리기에 불과하다.”
<p.130>

“기술은 익을수록 힘이 덜 들고 자연스러워지는 법이다. 고생해서 이룬 일은 물론 보람차겠지만, 사실 인생은 힘들이지 않고 해낼 수 있는 일에 더 크게 좌우된다.”
<p.134>

촌철살인의 아재식 말장난이 난무하다가도, 인생을 관통하는 통철한 아포리즘들을 이야기를 즐기는 중간중간에 포진시켜서 마치 부록 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결혼제도와 이혼, 가족형태 등 현재를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현실적 고민거리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이런 미래가 되고 당신이 이때까지 살아간다면, 당신의 선택은 어떨 거 같습니까?

“- 재미있죠?
성아가 물었다.
- 재미있네요.
내가 대답했다.
- 그럼 저랑 커피 한번 마셔줘요.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p.101>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소설 속 대화 장면이 떠올랐고, 서윤빈 작가가 독자와 나누고 싶은 대화를 이스트 에그처럼 숨겨 놓은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다른 이야기도 얼마든지 있으니 다음 소설에서 다시 만나달라는 작가의 애프터 신청이라니! 그 제안,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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