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름지기 지연이나 학연 같은 구태의연함은 척결하여야 할 적패임이 분명합니다만, 태어나서 스무 해를 살았던 고향, 그 고향에서 가까워 소싯적 자주 방문했던 포항의 여기저기가 소설에 등장하는 연작소설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읽으면 서서히 팔이 안으로 굽게 되는 묘한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작가의 삶 굽이굽이의 사건과 인물들을 SF적 상상력으로 버무린 이 연작소설집의 연작의 소재는 바로 해산물입니다. (어쩌면 매거핀) 대학연구소에서 불법 복제된 문어, 러-일 해저 가스관 건설 현장에서 탈출한 노동자 대게 등의 해산물.

“강사는 학교의 천민이었다. 학생 수가 폭증하고 수입이 줄어들고 처우가 나빠져도 잘리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을 고마워하라는 것이 학교 측의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술 냄새 가득한 농성 천막에 가서 술병을 치우고 사무국장님한테 전화해서 위원장님을 깨우고 피켓을 내다 놓고 구호를 외치고... 그랬는데 위원장님이 문어를 먹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한 마리처럼 보이는 두 마리를 말이다.”
- p.18~19, <문어> 중

자전적 SF소설이라고 했을 때, 이 무슨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둥근 사각형 같은 소린가 했습니다. 그리곤 첫 이야기인 <문어>에서 실마리를 발견했습니다. 대학 내 천막 농성 중인 시간강사가 처한 SF적 상황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정보라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시간강사 퇴직금 청구소송’ 기사와 겹쳐졌고, 형용모순의 ‘자전적 SF’의 표방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공상과학 혹은 과학소설은 그 이야기 자체의 재미로 읽히기도 하지만 대게의 경우에는 현실을 풍자하거나 빗대어 미래를 전망 혹은 상상하는 수단이곤 합니다. 이 책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문어와 복제문어의 “지구_생물체는_항복하라”는 선언 혹은 경고를 통해 대학,을 포함하는 기업,들이 시간강사나 비정규직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을의 목소리로도 읽힐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연포탕을 앞에 두고 대뜸 사랑 고백하는 로맨스도 들입다 등장하지만, 어찌되었거나 좌충우돌 슬랩스틱 해산물 공상과학 혹은 과학소설 되시겠습니다. 그리고, 문어를 먹지 않겠다는 결심은 무너져버렸지만, 사랑은 쟁취했으며 투쟁은 계속됩니다. 교육 공공성 확보와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 해방과 지구의 평화를 위해.

“나는 가만히 남편의 손을 잡았다. 남편의 손은 따뜻했다. 힘든 치료를 마치고 겨우 집에 돌아와 잠든 남편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남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 p.138, <상어> 중

이쯤 되면 연작소설의 ‘연’이 이어지다(聯)의 의미가 아니라 사랑(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그렇게 해산물 코스요리 같던 이야기는 가슴 뭉클한 사랑의 대서사시가 되고 또 굳은 사랑의 서약이 됩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아파하고 또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고 생명이니 결코 항복할 수 없노라 선포합니다. 그 사랑은 대상을 확장하며 지구를, 우리의 생명을 포기할 수 없노라 웅변합니다.

덧: 대입 학력고사를 끝내고 친구들과 새해 첫해를 보려고 포항 바닷가에서 추위에 떨며 버티던 이른 새벽의 어둠을, 그리고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일출 시간이 되었는데도 바다 수평선은 감감 무소식이더니, 한 친구가 고함을 치며 가리킨 포항제철 굴뚝 사이로 떠오르는 붉디붉은 태양이 기억났습니다. 이번 추위가 가시면 포항 바닷가를 한번 찾아가봐야겠습니다.

#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정보라 #연작소설집 #래빗홀 #래빗홀클럽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