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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랑전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6월
평점 :
켄 리우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마주하는 익숙한 낯섦은 어느새 반가움과 기대감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가려서 뽑은 열세 편의 단편들은 그래서 그런 켄 리우를 다시 조우함에 설레었습니다.
샛노랗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책 커버를 들여다보며 이번엔 어떻게 읽어볼까 하며 차례 부분을 펼쳤습니다. 나름의 소설집을 읽는 개인적인 버릇은 표제작을 맨 나중에 읽고 나머지는 랜덤으로 읽어가는 것인데, 이번엔 그저 맨 뒤에서부터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런 읽는 순서는 고민 고민해서 순서를 정한 편집자의 의도는 나 몰라라 하는 어쩌면 건방지거나 무지한 방법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기억하려 애쓰지 마라. 다만 잊으려 애써라.”
- p.499, <잘라내기>中
짧은데 심오한 테제를 들추어내는 그래서 마지막에 배치했을 듯한 느낌이 드는 이야기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켄 리우의 이야기에는 어쩔 수 없는 오리엔탈리즘이 배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익숙함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것이 이야기의 재미나 특이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무기나 치트키가 아니라 스스로의 창작에 솔직해지려는 작가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부분이라 저 개인적으로 작가에 더 애착이 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역사라는 것에 대한 단순한 금언으로 던져지는 문장들과 짧은 에피소드가 주는 묵직한 한방이 역시나 작가의 인장이 도드라진다 싶은 시작(?)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군데군데 잘라내진 성전이 나름의 문장으로, 시처럼 그림처럼 표현된 아름다운 입체감이 색다른 즐거움도 선사합니다.
“우리 비록 같은 해의 같은달의 같은 날에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셋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 p.460, <회색 토끼, 진홍 암말, 칠흑 표범> 中
그렇게 이어진 밑도 끝도 뚝 떨어져나온 듯한 ‘민들레 왕조 전쟁기’의 발췌 본은 또 다른 맛의 상상력의 단짠 조화가 도드라졌고, 이내 삼국지의 도원결의의 멀티버스 버전으로 만나보는 듯한 <회색 토끼, 진홍 암말, 칠흑 표범>이 보여주는 세계관은 켄 리우만이 가능한 비전을 여성의 서사, 영화적 묘사로 표현해냅니다. 국내 소개되는 작가와 계속해서 작업해온 장성주 번역가의 발군이 더더욱 빛을 발하는 문장의 맛에 제법 빚을 지고 있다 싶을 정도로, 이제 장성주 번역가를 떼고는 켄 리우의 소설을 생각하는 것이 어색하기 조차 한 이유이다 싶습니다.
“빅 세미는 예술을 공학으로 바꿔 버렸다.”
- p.359, <진정한 아티스트> 中
뉴스에서 AI가 만들었다는 짧은 영상의 그 멀끔한 결과물에 깜짝 놀란 것이 정말 얼마 전 같은데,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새로 생긴 부문이 다름 아닌 ‘AI 영화섹션’이라는 소식에 그 빠른 진화와 확대를 체감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진정한 아티스트>에 등장하는 위대한 아티스트, ‘빅 세미’가 그려내는 미래의 영화제작은 그야말로 머지않은 미래를 슬쩍 보여주는 듯 소름이 오소소 돋았습니다.
영화화가 확정되었다는 표제작 <은랑전>과 근미래의 공포를 들추는 <메시지>도 특유의 흡인력이 또렷하게 살아있는 그럴만한 작품들이었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다름 아닌 <환생>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어떤 기억이 진실이고 어떤 기억이 거짓인지 분간하지 못해. 그러면서도 기억이 중요하다는 관념에 집착하고, 기억을 토대삼아 그 위에 삶을 쌓아 올리다시피 하지.”
- p.157, <환생> 中
다양한 상황과 소재, 그리고 인물들, 그님 포함,이 등장해서 작가의 독보적 상상력을 펼쳐보이지만, 이번 소설집에서 유독 눈에 뜨이는 것은 ‘기억’이었습니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금껏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기억’이라는 연결고리 덕분이라는 점을 켄 리우도 아이덴터티와 연결해서 큰 질문으로 대뇌이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렇듯 켄 리우의 이야기는 멀리에 있는 먼 후일의 것보다는 지금 여기의 우리 삶을 비틀거나 상상력을 끼얹어버린 버전으로 독자들을 이야기의 설정이라는 문턱을 가볍게 넘어서게 해주는 탁월함이 넘사벽이란 점에서 여타의 SF작가의 아우라와는 또 다른 매력 지분을 보유한 작가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신작은 언제나 기대 중.
덧. 황금가지의 커버 디자인은 항상 기대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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