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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로 철학하기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 2023년 11월
평점 :
처음 서평단에 선정되었다는 출판사의 DM을 받았는데, ‘작가가 워낙 문사철은 넘나드는 글을 써서, 읽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는데, 문사철이 뭐지 하면서 흘려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문장들을 읽고 나서, 기억이 나서 ’문사철‘을 검색해봤더니 ’문학/사학/철학‘을 줄여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읽는 동안 제가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던 거구나 싶었습니다. 문과 같은 공대 출신인 저이지만, 그 방대한 지적 데이터베이스와 인사이트로 ’피노키오‘라는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는 고전을 들여다보면서 저자가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언뜻언뜻 느껴졌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적절하고도 친절한 각주들의 하이퍼링크를 통해 뇌가 살찌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다양한 저자의 지식을 수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크게 신뢰하지 않기로 한 밀교적 맥락에서 이 글을 다시 검토한다면, 제페토는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사악한 데미우르고스이자 불길한 창조자다. 제페토가 ‘자신의 꼭두각시’에게 행한 첫 번째 폭력은 그에게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p.56. 천상(혹은 지옥)의 프롤로그. 중>
역시나 아감벤은 특유의 감각과 철학과 신학까지 끌어들여 피노키오의 창조신화와 이에 개입한 제페토를 바라봅니다. 여러 신화들에서 등장하는 이름 부여의 의미를 끌어와 피노키오와 제페토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냅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버전의 사람 좋은 제페토라는 선입견을 걷어내고 메타포와 밀교적 맥락까지 들먹이면서 이해의 폭과 심도를 확장하며, 전혀 다른 차원의 피노키오로 선보입니다.
“전체 이야기를 피노키오의 엇나간 모험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콜로디는 프리메이슨보다 아나키스트에 가깝다. 고양이와 여우는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 불가분하게 지닌 두 측면, ‘잔인한 폭력성과 기만’ 그리고 경찰의 곤봉, 국가원수와 의회제도가 지닌 ‘허례허식’을 상징한다.”
<p.128. 모험들. 중>
앞에서 언급했던 피노키오의 창조과정을 들여다본 독특함 뿐 아니라, 이후 피노키오를 따라가면서의 만남들과 사건.사고들 속에서 철학과 사회학, 역사의 거물망을 펼쳐서 그 모험들의 해부학을 시도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개념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아감벤의 문장들은 나름의 논리로 독자를 친절하게 안내해냅니다.
이 책이 제공하는 덤으로 누리는 재미이자 작가의 인사이트를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이유는, 원전에 가까운 한국어판 <피노키오의 모험>이 새로 번역되어 뒤쪽에 부록처럼 붙여둔 점이라 하겠습니다. 여러 버전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 극영화, 소설들을 통해 접했던 피노키오 이야기에서 놓치고 간과했던 에피소드들과 인물들을 찾는 재미가 솔솔하고, 뿐만아니라 앞쪽에 제시된 아감벤의 ‘철학하기’를 따라가기에 더없이 훌륭한 교보재가 되어 고마운 구성이라 하겠습니다.
“콜로디는 이에 <어느 꼭두각시 인형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몇몇 에피소드를 보냈고, 연재 후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콜로디는 처음 약속했던 원고료 지급이 늦어지자 ‘피노키오가 여우와 고양이에 의해 교수형 당해 죽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버린다. 이에 수많은 독자가 항의했고, 결국 원고료가 지급돼 우리에게 잘 알려진 파란머리 요정이 등장해 피노키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p.217 : 부록-피노키오의 모험, 설명문 중>
작가와 그 출판의 뒷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쿠키 영상처럼 한스푼 추가! 같은 즐거움이었습니다.